화도(상) 지은이: 민병삼 출판사: 아세아 미디어 책머리에 부쳐 내가 오원 장승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82년도였다. 현재 상명대학교 회화과 에 출강하고 있는 조진영교수의 학위논문 오원 장승업 회화 회화연구을 읽고부 터였다. 나는 이 논문을 읽고 오원의 삶과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에 경탄했음은 물론이고, 언젠가는 꼭 소설의 인물로 등재하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범부의 삶이 라 정신을 온통 호구책에 갉히는 바람에 그를 까맣게 잊었다가 지난해에 비로소 조우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소설에다 사실에 근거한 오원의 기인적인 삶과 광기와도 같은 예술정 신을 담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작업이 쉽지 않았다.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 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얻은 자료란 장지연의 일사유사와 김용준의 오원일사 오 세창의 근역서화징 그리고 조선 회화 연구가들이 몇 마디 언급한 것뿐이었다. 답답했던 심정을 이루 늘어놓을 수가 없다. 실존했던 인물을 소설에 등재할 때 는 반드시 역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둬야 하기 때문에, 낭패감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쨌든 쓰기로 작정하고, 일년 넘게 작품에 매달리는 동안 단원, 혜원 등과 함 께 조선 화단의 거봉인 오원의 인품과 예술에 흠을 내지나 않을까, 몹시 걱정했 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소설은 사실적인 필연성 을 가져야 한다는 구성의 준거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니 등 장인물 중에는 가공적인 인물이 나올 수 밖에 없었음을 밝혀야 될 것 같다. 이 소설의 독자들 중에는 조선 회화 연국가도 있겠고, 소문 없이 오원 장승업 을깊이 연구해 온 학자가 있을 수도 있고, 미술사관에 특별히 예리한 미술학도 도 있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들이 두렵다. 지금까지의 자료로는 오원이 타계한 지 금년으로 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자리를 빌어, 오원 장승업이 새롭게 조명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소설에 대해 여러분의 질타와 함께 촌철의 비판이 있기를 바라고, 또한 이 땅 곳곳에 문학비가 있듯이 오원을 비롯한 기타 훌륭한 작고화가들의 예술정신을 기리는 기념비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후학들이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이 소설 출판에 선뜻 나서 준 아세아미디어 이영빈 사장과 책이 나오기까지 고생한 편집부 여러분, 그리고 출판평론가 김영수 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자료를 아낌없이 제공해 준 김호근 학형, 또 천주교 관련 자료에 협조해 준 김은숙 군에게도 깊이 감사한다. 1997년 2월 만거에서 민병삼 오원과 만나기 전에 버스표를 끊기 위해 대합실로 들어갔다. 말이 대합실이지 실은 간이의자 몇 개 놓인 잡화상이었다. 주인이지 싶은 사내에게 분원리 가는 버스가 몇 시에 오 느냐고 묻자 퉁명스러운 어조로 15분 후라고 말했다. 나는 표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었다. 아까부터 검은 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간혹 바람이 먼지를 일으키는 회색의 창 밖 풍 경은 매우 을씨년스러웠다. 오늘 중으로 비나 혹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예 감이 들 만큼 음산한 날씨였다. 갑자기 불안해진 나는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얼굴이 푸르 죽죽하게 언 모습으로 대합실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구경하였다. 들 어서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구두덜대는 것으로 보아 스산한 날씨를 원망하는 것 처럼 느껴졌다. 눈은 내려도 괜찮지만 비가 오면 낭패를 겪게 될 것 같은 하늘 을 다시 올려보았다. 조만간 비나 눈이 내리고 말겠다는 단정이 주저 없이 들었 다. 분원리가 초행이기 때문에 나는 운전석 바로 뒤에다 자리를 잡았다. 그리곤 분원링서 내릴 수 있게 해 달라고 당부했다. 운전사는 딴전만 피울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안하고 불안했으나 룸미러에 들어 있는 그의 얼 굴이 전혀 온화하지 않아 입을 굳게 닫았다. 그러자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는 노인이 “나도 분원리에서 내리니까, 따라 내려요.”하였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따. “분원리에 사십니까?” “ 그렇소먼...?” “잘됐군요, 어르신께 도움 좀 받아 야 되겠습니다. 초행이라서...” “분원리 누구를 찾는데 그러우? 보아하니, 땅 사러 가는 사람 같자는 않은데...” 그가 갑자기 허리를 세우더니 내 행색을 요 리조리 훑는 것이었다. 나는 정색을 하여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하고 황망 히 지갑을 꺼내 명함 한 장을 내밀었따. 그가 엉거주춤 명함을 받아 들고는 눈 을 잔 뜩 찌푸려 한참 들여다보았다. “...대학 선생이시구먼.” 그는 내 차림새나 어림나이로 보아 교수가 어울리지 않은 듯 나를 또 훑어내 렸다. 나는 그저 웃어 보이는 것 외에 다른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네.뭣 좀 알아볼께 있어서요.” “답사하러 가시는구먼. 분원리에 연구할 것 이 뭐가 있누...? 조선시대 사응원 자리가 있시는 하지만, 지금은 면사무소가 들 어섰는걸.” “그럼, 도요지는 더러 보존돼 있나요?” “웬걸. 가마 있던 자리에 학교가 들어서는 바람에, 교문 옆에다 비석만 하나 세워 놨지.” “그랬군요, 혹 시, 분원리에 장씨 성을 가진 분들이 많이 계신가요?” “장씨?” 이때 버스가 느닷없이 급정거하는 바람에 무심히 서 있던 승객 일부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듯 한참을 비틀거렸다. 나와 얘기를 나누던 노인도 하마터면 앞 좌석 등받이에 이마를 찧을 뻔하였다. 그러자 그가 하얗게 뜬 얼구로 “운전 좀 잘 해. 사람 죽이겠어.” 하고 운전사한테 삿대질을 하였다. “저눔의 자가용이 갑자기 끼여드는 바람에 그랬지, 일부러 그랬어요?” 운전사가 얼굴을 돌려 눈을 부라렸다. 그제서야 노인이 씩씩대던 숨을 가라앉 히고 “그러니까, 차를 사알살 몰아야지.”하고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놀 란 노인의 감정이 수그러질 때를 기다려 잠시 입을 닫았다. “장씨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 중에 도자기 굽던 사람이 있을까 해서 그러 우?” “그런 분이 계시면 다행입니다만...” “그럼, 장씨 성 가진 사람을 찾아 나선 거유?” “그렇긴 한데, 그게 좀 까다로운 일이라서요.” “장씨가 하나 있 기는 해도, 그 사람은 도공의 후손이 아니고 그냥 농사꾼인걸.” “혹시, 장씨 집성춘이 있을까 해서 나섰는데...” “그렇다면, 헛걸음 한 거구. 혹시, 옛 사옹 원에 관해서 알고 싶으면 박응서라는 노인을 만나 보구료.” “이 마을에서 가 장 오래 사신 분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분원리에서 출토된 도자기를 많이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옹원에 관해서라면 마을에서는 제일 박식한 노인이나까.” “그분부터 찾아뵈야 되겠군요.” 이때 차창 밖으로 저만치 마을이 보이자 노인이 일어설 준비를 하였다. 나도 따라 내릴 차비를 하였다. 마을은 온통 음식점으로 채워진 것처럼 보였다. 팔당 저수지를 배경 삼아 ‘쏘가리매운탕’ ‘메기매운탕 ’‘붕어찜’‘장어구이’ 등의 간판을 내건 음식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옛 도요지였다기보다는 차 라리 ‘먹자마을’이었다. 내가 차에서 내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자 노인이 전면의 산자락 쪽으로 손 을 뻗어 큰 기와집 하나를 가리켰다. “저 집이 아까 말한 박응서 노인 집이니 까, 생각 있으면 찾아가봐요, 그리구, 저기 국민학교 자리가 바로 옛날 가마터니 까 둘러보구료.” “감사합니다, 어리신.” “그럼, 나는 가우.” 노인은 이내 나와는 무관한 사람이 되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는 노인으 ㅣ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지척에 있는 학교부터 보기로 하였다. 학교 정문 바로 옆에 ‘광주 조선백자 도요지’라는 알루미늄 안내판과 사적 314호로 지정된 도요지 기념지가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안내판에는 학교터가 조선시대에 백자를 굽던 사옹원 분원이고, 광주 땅 곳곳에 사기번조소가 분포돼 있었음을 설명하는 글이 음각돼 있었다. 운동장에 들어서자 전면에 비석 십여 개가 서 있는 것이 금방 눈길에 잡혔다. 나는 학교 건물을 곁눈질하며 비석이 들어앉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마침 방학 중이라 운동장에는 아이들 몇몇만이 뛰 어놀고 있을 뿐 아주 썰렁해했다. 비석에는 당시 사옹원에 있던 벼슬아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사옹원도재조채공제공 번조관정공학연선정비 여러 이름들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이는 그 당시 그릇이나 도자기 제작에 참 여했던 관리들의 후손들이 선대의 공적비로 세운 듯 싶었다. 인적은 간 곳 없고 이름 석 자 박힌 비석만이 쓸쓸하게 서서 백여 년의 세월을 헤진 옷처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당시 중노동으로 흙과 장작 따위를 나르던 상민들의 흔적 은 어디에도 없고 결국 그들을 감독했던 벼슬아치들의 이름만 비석으로 남아, 천민들의 애환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아 갑자기 마음이 울적했다. 비석 뒤에는 그리 넓지 않은 공터가 있고 여기저기에 깨진 사기 조각들이 박 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폐기한 도자기들을 버리던 곳으로 짐작되었다. 박 응서 노인이 소장하고 있는 도자기들도 결국 이곳에서 파낸 것이 틀림없을 것이 라 생각하니 보통 노인은 아니겠다 싶었다. 기어코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기온도 따라서 내려간 듯 손 끝이 시려웠다. 나는 박응서 노인을 만나 보기 위 해 그의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 분원리에 음식점이 즐비한 것이 팔당댐이 만들어지자 민물고기 좋아하는 관광객을 노린 것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버 스에서 만난 그 노인의 전언에 의하면 옛날에 이곳이 온통 채마밭이어서 각종 채소가 수로를 통해 뚝섬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결국 사옹원의 그릇 말고도 이 곳에서 재배된 채소르 ㄹ실어 나르던 나루터였고, 그래서 항상 상인들로 북적댔 고, 그때부터 이미 음식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박응서 노인 짐은 매우 큰 전통 한옥이었다. 옛날에는 행세깨나 했을 양반이 살던 집이 틀림없다고 단정하는 데 조금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대문 앞에서 잠시 서성거리고 있는데 마침 안에서 초로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 냈다. 내가 안을 햐애 기웃거리자 그가 대뜸 경계하는 표정으로 누구를 찾아왔 냐고 물었다. “이 댁에 박응서라는 노인이 사신다고 해서 왔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실은, 그분께 여쭤 볼 것이 좀 있어서...” 나는 서둘러 명함을 꺼내 정중하게 내밀었다. 명함을 받아 든 그가 내 행색을 훑어내렸다. 나는 그의 의심을 풀어 주기 위해 “사옹원에 관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왔습니다.”하 였다. 비로소 그가 “기다려 보슈.주무시는 것 같은데...” 하고는 혼자서 안으로 들어갔따. 나는 여전히 눈발을 쏟아놓고 있는 회색 하늘을 올려보며 이곳에 찾 아온 소득이 과연 있을까 조바심이 들었다. 죽은 지 이미 한 세기가 흘러 버린 지금, 어디에서도 볼 길이 없는 그의 계보를 찾겠다고 나선 내 의욕에 또 회의 가 들었다. 어쩌면 근거도 없이 태어났을 그가 그림 몇 점만으로 자신의 족적을 마감하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한 그의 성품을 알고 있었던 당시의 주 변 사람들이나 후세 인척들이 그의 뜻에 부응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의 근 거를 찾아 내기 위해 사방을 기웃거리고 있는 일에 보람을 얻을 수 있을지 요즘 와서 자주 의심이 드는 것이었다. 잠시 후 남자가 다시 나타나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가 마당 한가운데로 들어서더니 말머리는 잘라 버리고 대뜸 "아버님 연세가 아흔이요."하는 것이었 다. 비로소 그가 박응서 노인의 아들임을 알았다. 아흔이면 나보다 곱절도 넘게 산 인생이었다. 대청마루에 올라서자 여남은 개의 퇴색한 도자기가 낡은 장식장에 올려져 있 음이 금방 눈길에 잡혔다. 내 안목으로는 그것들의 진가를 전혀 가늠할 수가 없 었따. 버스에서 만난 노인의 전언을 떠올린다면 아마도 진품은 벽장 깊숙한 곳 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이 도자기가 아 니기 때문에 그것들이 진품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들이 열어 준 문 틈으로 내가 몸을 넣자 박응서 노인이 나를 흘끔 올려보았 다. 내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가앉자 그가 무슨 말인가 몇 마디 웅얼대며 손짓 을 보냈다. 편히 앉으라는 뜻으로 알고 비로소 정좌를 했다. 외모상으로는 그저 고령의 촌로에 지나지 않았다. 바싹 쪼그라든 몸피에 듬성듬성 남아 있는 백발 과 앙상한 뼈마디에 차라리 가죽으로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마른 표피를 보면 며칠 새에 죽고 말 몰골이었다. 그러나 나를 쏘아보는 그의 눈빛에는 아직 도 총명의 찌꺼기가 보이는 것 같았고 잇새로 발음이 가끔 새는 것 같으면서도 어조는 분명하였다. 나는 그에게 몇 마디로 예의를 건넨 다음 찾아온 용건을 말 했다. 그러자 그는 이곳이 옛날에는 사옹원의 분원으로서 사기그릇 제작소가 있 었으며 도요지가 많았던 곳임을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어리신께서도 아시겠지만, 조선 후기에 장승업이라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 있었지." "그럼, 장승업이 한때 여기 분원에 와 있었다는 얘기도 들으셨습니까?" "...그런 얘기가 전해지기는 해도 확실하지는 않아. 얘기만 전해질 뿐이지. 기록된 것이 없거든. 얘기로는, 장승업이화원직으로 와 있으면서 궁중으로 들어가는 자 기에다 그림을 그렸다는 게야." "저도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선생도 알 고 있겠지만, 여기가 원래 뚝섬과 연결되는 나루터여서 장사치들로 늘 북적댔전 곳이야. 그러다 보니, 객주집이 많을 수밖에. 무려 삼백여 호나 됐다는구먼. 예나 지금이나 술집에는 으레 기생이나 작부들이 있기 마련이구.”“ 대단했겠습니다. ”“내 얘기는 그런 게 아니구... 그때 장승업이 화원으로 내려와서는 자신의 본 분은 내팽개치고, 이집 저집 작부집을 돌며 주야를 술로 보냈다는 게야.” “그 사람이 원래 술과 여자 없이는 붓을 들지 못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으니, 그 럴 만도 했겠습니다.” “결국, 사옹원에서 그 꼴을 보다 못해 한양에다 상소를 올렸다지 뭔가.” “상소 내용이 뭐였을까요?” “그야 뻔하지.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야 가마에 넣을 텐데, 이건 밤낮 주색에 빠져 있으니 작업이 진행돼야지. 그 러니, 쫓아 버릴 수 밖에.” “하긴, 왕의 명을 어기고 궁중을 빠져나간 사람이 었으니까요.” “더 흥미로운 얘기는 그 사람이 사옹원의 상소 때문에 한양으로 불려간 것이 아니라, 실은 스스로 도망쳤다는 얘기도 있어.” “왜 도망을 쳤을 까요?” “원래 한 여자한테 정착을 못했던 그 사람이 명씨 성을 가진 계집한테 만은 폭 빠졌던 게야. 그러다 보니 그 계집이 아이를 배지않았겠어.” “그래서 요?” “여자가 아이를 배면 으레 앙탈이 있기 마련이거든. 그래서 그길로 줄행 랑을 쳤다는 얘기지.” “그게 사실일까요?” “글쎄...?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 이 아닐 수도 있지. 그러나, 말이란 근거 없이 떠도는 법이 없어.” “그럼, 사실 이라는 말씀이군요, 당연히 그 자손도 있을 테구요.” “자손?아암, 있구말구.” “네?어르신. 지금 하신 말씀이 사실입니까? 알고 계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장승업의 계보를 찾기 위해 몇 년을 헤매고 있는 중입니 다 그런데, 그 자손이 있다니요...” “장지연의 일사유사에는 장승업을 대원 장 씨라 했고, 또 누구는 태원 장씨라고도 했어.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나, 어 쨌든 장씨 본관에는 대원도 없구 태원도 없어. 그러니 장승업의 족보를 못 찾을 밖에. 똑똑한 후손이라도 있으면 장씨 가문 어느 쪽에서든 껴 붙였을 테지만, 그 럴 위인이 있어야지.” “ 그 후손이 있다고, 조금 전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 “...그게 확실치 않아. 자칭 후손인걸. 그걸 누가 믿어.” “어르신께서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는 있지만, 원래 횡설수설 잘 하 는 반미치광이야.” “어르신.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습니까. 아시면 말씀해 주십 시오.” “...만나 보려구?” “물론입니다.” “미치광이라니까.” “미치광이라 도 좋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몹시 흥분했다. 내가 이곳 분원리에 온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는 장승업의 계보를 찾아 낼 길이 있을까 해서였따. 그는 출생과 사망이 분명치 않 은 비운의 화가였다. 그에 대한 각종 논문에 의하면 장승업은 1843년에 출생하 여 1897년에 졸한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계보가 없는 그의 출생인들 어찌 믿을 수 있겠으며, 누구도 그의 죽음을 확인한 바 없어 그가 사람들 시선에서 홀연히 사라진 때를 생의 마감으로 어림잡았으니만큼, 그저 활자화 됐을 뿐 신 빙성은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일설에 의하면 광주 어느 곳에 장씨 집성춘이 있다는 말을 얼핏 들었다. 그들 중에 혹시 대원이나 태원 장씨가 있을지도 모른 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여기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장씨 집성촌이 있음 을 아는 사람은 없다는 얘기다. 이런 마당에 장승업의 후손이 생존해 있다니, 신 빙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미치광 이면 어떻고 반송장이면 어떤가. 나한테는 생존 그 자체가 중요할 따름이었다. “어르신. 어디로 가면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까.” “가르쳐 줘도 만나지는 못할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요?” “...사람 만나기를 꺼리거든. 정신이 온전 치 못해서 그러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러는지는 알 수가 없어. 그 사람이 거 처하는 곳에 사람들이 접근하면 돌을 던져 쫓아 보내거든. 그러니, 어찌 만나겠 어.” “왜 사람들을 기피하는 걸까요?” “낸들 아나? 그러니까 미치광이랄 수 밖에.” “어쨋든, 부닥쳐 보겠습니다. 있는 곳이나 말씀해 주십시오.” “...여기 분원리 오기 전에, 금사리라는 곳이 있어. 거기 가서 ‘토굴나으리’가 사는 곳 이 어디냐고 물어 봐.”“...토굴나으리라고 하셨습니까?” “가마터가 있던 곳에 다 굴을 파 놓고 살면서, 자칭 ‘나으리’라 해서 붙여진 별호야.” “그럼, 그 사람이 스스로 장승업의 후손이라고 했다는 말씀인가요?” “내가 직접 들은 바 는 없고, 그 마을의 어떤 영감이 언뜻 들었다는구먼. 믿을 만한 얘기가 못 돼.” “글쎄요...?” 이튿날 나는 금사리로 가기 위해 광주행 버스에 다시 올랐다. 어제 내린 눈으 로 바람이 다소 쌀쌀하지만 하늘은 청명했다. 마을은 바로 코앞에 팔당저수지를 눕혀 놓고 뒤로느 산을 병풍처럼 둘러 옴팍하게 들어앉아 온종일 따사로운 햇빛 을 받을 것 같았따. 나는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따라 십여 분쯤 걸어 들어갔다. 이미 얘기 들은 대로 이곳에도 역시 가마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어째서 우리한 테는 문화유적을 보존해야겠다는 의식이 없는지 또 한번 안타까웠다. 이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내 나이 또래의 사내가 농기구로 짐작되는 물 건을 겨드랑이에 낀 채 오고 있었다. 나는 그가 가까이 다가서기를 기다렸다. 그 도 내가 낯선 사람임을 알고 흘끔흘끔 곁눈질하였다. 나는 그에게 바싹 다가서 며 이 마을에 사느냐고 물었다. “그렇습니다.”“그럼, 토굴나으리라는 사람의 거처를 알고 계시겠군요.” “...실례지만, 어디서 오셨습니까? ”나는 그에게까지 명함을 건에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잠시 우물쭈물하였다. 그러자 그가 “그 사람을 잘 아십니까?”하고 물었다. “실은, 분원리 박응서라는 노인의 말씀을 듣고 찾아온 겁니다. 제가 뭘 좀 연구하는 게 있어서요.”“글쎄요...? 아마, 만나기 어려울 겁니다. 마을 사람 들조차 피하는 사람이까요.” “저도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쨌든, 위치만 가르쳐 주십시요. 일단 시도는 해 봐야지요.” 그제서야 그가 손을 들어 왼쪽 산 등성을 가리켰따. 그 산등성 너머 큰 바위 하나를 끼고 돌면 그의 거처를 바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조심하라는 충고를 덧붙였다. “돌팔매질을 조심 하라는 말씀이겠군요.” “정신이상자니까요.”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그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는 고개를 갸우뚱대며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갔다. 나는 비로소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잠시 후의 일이 난감했다. 그가 사람을 기피하는데다가 광인이 틀림없 다면 예측할 수 없는 봉변을 당할 수도 있겠다 싶어 두려웠다.나는 잠시 회의에 빠져들었따. 뜻밖의 변을 당하면서까지 그를 만날 값어치가 과연 있는지 출발할 때의 의욕이 조금씩 오그라들고 있었다. 그러나 어렵사리 얻은 정보가 아닌가. 어디에서도 찾을 길도 없었던 장승업의 계보를 그가 가지고 있는 마당에 아찌 그냥 돌아설 수 있겠는가. 젠장. 아무리 미친 놈이라도, 설마 죽이기야 할라구. 나는 배에 힘을 넣어 구석구석으로 숨어든 용기를 모두 끌어모았따. 그리곤 주먹을 단단히 쥐고 산등성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갔다. 그런데도 긴장과 두려움 이 여전히 등짐처럼 어깨를 짓눌러 산등성에 미처 다다르지도 않아 전신이 땀으 로 흠뻑 젖어 버렸다. 등성이를 넘자 갑자기 개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사정없이 짖어대는 울림이 산 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토굴나으리’가 사람들의 접근을 막으려고 기르는 개로 짐작되었다. 나는 또 두려웠다. 주인처럼 미친 개가 아닐까 하고 공포에 떨 기 시작했다. 개한테 먼저 물리는 수모를 상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나 개 가 짖기만 했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풀어 놓지는 않았다 싶어 다소 안심이 되었다. 숨을 죽인 채 조심조심 등성이를 넘자 마치 승용차 한대가 꼴 사납게 처박힌 모습으로 큰 바윗덩어리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사내가 일러 준 대로 옳게 찾 아온 것 같았다. 개는 끊임없이 짖어댔다. 주먹을 잔뜩 움켜쥔 나는 도둑처럼 살 그머니 바위를 끼고 돌았다. 순간 “왠놈이냐!”하는 일감과 함께 꼭 쑥대강이처 럼 머리칼이 뒤엉킨 늙은이가 사납게 부릅뜬 눈으로 몽둥이를 쳐들고 서 있었 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자지러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개도 주인따라 곧 목줄을 끊을 듯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댔다. “뭘 훔치러 왔어?” 그가 몽둥이를 쳐 든 채 한발 한발 다가섰다. 여차하면 내리칠 기세였다. 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도둑이 아니라, 영감님을 뵈러 왔습니다.”를 침을 흘리듯이 간신히 뱉어 냈 다. 그러자 그가 눈을 부릅떠 “영감님이라니. 나으리라고 불러.”하였다. “...네, 나으리.” “...나는 너한테 볼일이 없으니까, 어서 가. 그렇지 않으면 이걸 던질 테니까.” 그가 몽둥이를 팽개치더니 느닷없이 맷돌짝만한을 번쩍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그걸로 나를 내리치겠다는 위협이었다. “제가 찾아온 사연을 말씀드 릴 테니, 제발 그것 좀 내려놓으십시오.”“사연은 무슨 얼어 죽을 사연. 잔말 말고 어서 가. 이 개까지 풀어 놔야 가겠어?” 그가 이번에는 돌을 내던지고 개 목줄을 움켜잡았다. 순간 나는 그의 눈빛을 보았다. 얼굴은 마른 대추처럼 쪼글 쪼글하나 광기 서린 눈빛과 늙은이 답지 않게 붉은 입술에서 결코 범상한 인물 이 아님을 읽었다. 나의 감상주의가 발동했는지는 몰라도 순간적인 판단이 그랬 다. 게다가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오로지 경계로 가득 찬 것만은 아니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어쩌면 자기를 찾아온 내 심증을 알아챈 것 같은 단정을 멋대 로 내렸다. “저는 나으리한테 해코지하러 온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 고 정하시고 제 말을 좀 들어 주세요.” “네까짓 놈한테 들을 얘기가 뭐 있겠어. 잔말 말고 어서 가.” “그럼, 딱 한 말씀만 여쭙겠습니다.” “한 말씀만? 그게 뭔데?” 그제서야 그가 개를 진정시키고 자세를 고쳐 꼿꼿이 섰다. 얼마나 늙은 나이 인지쉬 가늠할 수는 없으나 서 있는 자세를 보아서는 정정했다. 제법 기골도 있 어 보이고 젊어서 힘깨나 썼을 체구였따. 나는 글로 묘사된 장승업의 몸피를 재 빨리 떠올렸다. 이 노인이 정말 장승업의 후손이라면 관계를 이해하는 데 별 무 리가 없을 듯싶었다. “빨리 여쭙지 않고 뭘 꾸물거려?” “나으리가 장승업 화가의 후손이라는 소 문을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누가 그래?” “나으리가 그렇게 말씀하셨 다는데요.”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어.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그가 갑자기 등을 돌려 움막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확실히 그가 자신을 슴기 는 것이 있음을 거니챌 수 있었다. 순간 그의 발목을 잡아야한다고 생각했다. “ 나으리는 틀림없이 그분의 후손입니다. 저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다른 놈들 은 안 믿는데, 너 혼자 뭘 확신한다는 거야? 별 미친 놈 다 보겠네.”“나으리는 사실을 숨기고 계신 겁니다.” 이때 그가 다시 등을 돌리더니 “담배 있어?”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따. 나는 손끝을 떨며 담배를 갑째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 는 마치 빼앗듯이 담배를 채뜨렸다. “너는 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뭔데 나를 만나러 왔어?”“나으리가 장승업 화가의 후손이라는 애기를 듣고 뵈러 왔습니 다.” “왜?” “제가 그분의 생애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학자야?” 그가 담 배를 깊숙하게 빨아들이고는 나를 잔뜩 노려보았다. 나는 그가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의심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명함 든 내 손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게 뭐야?” “제 명함입니다.” 비로소 그가 명함을 받아 들었다. 나는 활자를 읽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갑자기 명함을 내던지며 “훈장이로군.” 하였따. “무엇 때문에 내 조부를 연구하지?”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분이 유명한 화가 인데다가 생애가 흥미로워서요.” “흥미롭다...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분이 정말 나으리 조부 되십니까?”“사실이라면 믿겠어?” “...네” “정 말, 믿겠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럼, 따라 들어와.” 그의 어조가 여전히 무뚝뚝한 명령투여서 나는 다시 경계심에 묶여 산뜻 발을 떼지 못하였다. 그러자 그가 뒤를 돌아보며 “뭐 하구 있어? 따라오라니까... 싫 으면 가.”하고 눈을 부라렸다. 나는 점점 그가 무서웠다. 나를 토굴로 끌어들여 감당키 어려운 행패를 부릴까 싶어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미 덜미를 잡힌 처지라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가 하는 대로 널빤지 문을 밀고 발을 들여놓자 안은 턱밑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새카맣게 어두웠다. 뿐만 아니라 판별할 수 없는 악취가 몰려와 호흡이 곤 란할 지경이었다. 깊숙한 곳에서 잠시 부시럭대는 소리가 나더니 불이 희미하게 밝혀졌다. 물론 전등을 켠 것은 아니고 남포등을 밝힌 것이었다. 비로소 토굴의 규모와 이것저 것 잡동사니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거지 살림었따. 그 래도 굴이라 그런지 겨울 외풍을 별로 느낄 수가 없었고 거저 위에 질그릇 화로 까지 있어 불씨를 품고 잇었다. 벽에서 남루한 옷가지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고 안쪽 한구석에 석유곤로와 냄비와 식기가 꼭 개 밥그릇처럼 더러운 꼴로 놓여 있었다. 내가 허리를 구부린 채 어정쩡하게 서 있자 “앉어.”하고 턱을 흔들었 다. 당장이라도 여기저기서 벌레들이 기어나올 것만 같아 선뜻 앉지를 못했다. 그러자 그가 먼저 털썩 주저앉았다. 비로소 나도 그와 거리를 두고 쪼그려앉았 다. “그래, 내 조부에 대해서 뭘 알고 싶어?” “궁금한 게 많습니다만, 우선 그 분의 본관이 어디인지 확실치가 않습니다. 몇몇 기록에 대원 장씨라고도 했고, 태원 장씨라고도 해서요. ‘한국성씨대관’에는 그분이 태원 장씨로 올라 있긴 합니다만...” “지금의 충주를 태원으로 불렀던 적이 있어서 그렇게 기록했겠지. ” “그럼, 본관이 잘못 전해졌다는 말씀인가요?”“우리 시조는 원래 중국 사 람이었거든. 중국 산시성의 타이위안이란 곳이야. 그게 바로 태원이지. 그런데도 일부에서 대원 장씨라는 말이 전해지는 것은 조부가 마침 황해도 안악 어디쯤인 가 대원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셨어. 그러나 자기가 태어난 곳을 관향으로 정 할 수는 없잖겠어. 일부에서 조부를 대원 장씨라 한 것은 그분이 황해도 대원이 라는 곳에서 태어난 것을 그렇게 오해한 것이고, 태원 장씨로 알고 있었던 사람 들은 시조의 본향을 생각해서 그렇게 단정했던 거지. 그러나 조부는 자신이 무 슨 장씨든 개의치 않으셨던 거야. 조실부모한 당신께서도 자손을 남길 생각이 없었으니 양반들처럼 본관 따위에 마음을 쓰지 않으셨던 거야. 족보라는 것은 자손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거지, 자기 한 몸만 달랑 살다가 죽을 사람이 본관 은 가져서 뭐 하겠어. 안 그래?” “...그렇다면, 나으리가 그분의 후손이라는 증 거가 있나요?” “이눔아. 속일 것이 따로 있지, 아무나 대고 조상으로 섬겨?” “혹시, 그분의 유품이라도...” “뙤놈처럼 의심은 많아 가지구...” 그가 나를 조소하는 듯한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갑자기 구석진 곳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 다. 그리곤 낡은 모포가 덮인 사과궤짝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나는 바싹 긴장하 여 마른침을 자주 넘겼다. 그 속에서 과연 어떠한 유품이 나올지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미치광이라고들 하지. 그러나 나는 미치지 않았거든. 다만 미친 척하는 거지.” “왜죠?” “귀찮거든. 내가 장승업의 후손 이라는 걸 믿지 않으면서도 혹시 그분의 그림이라도 한 폭 가지고 있을까, 그걸 노리거든. 나를 찾아온 사람이 많았었어. 그때마다 내가 미치광이로 구니까, 줄 행랑을 치지 뭐야. 그런 놈들 모두가 장승업을 팔아 공을 세우거나, 한몫 잡자는 수작이거든.” “저한테는 왜 모질게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관상을 보니까, 얕은 수작은 부리지 않겠어.” “옳게 보셨습니다. 저는 장승업 화가를 제대로 알리고 싶을 뿐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쓴 글을 보니까, 모두가 멋대로 추리한 것 뿐이라서 신빙성이 없습니다. 나으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 역시 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글을 썼을 겁니다.” “그랬다면, 네놈도 사기꾼 학자지. 가만 있 자... 이제부터는 놈자를 쓰지 말아야 되겠군. 그냥 선생이 좋겠어. 내가 선생을 믿고 이것들을 보여 주는 건 그분의 생애를 바르게 남기라는 뜻이야. 나는 글재 주도 없을 뿐더러, 설령 있다고 해도 어느 놈이 내 말을 믿어 주겠어. 그래서 마지막으로 선생의 발목을 잡은 것이고.” “저를 믿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들어야 해.” “그러데, 무슨 이유로 이렇게 숨어 사시는지 궁금하군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 나는 숨 어 산다고 생각 한 해. 이젠 늙어서 일할 힘도 없고,가진 게 없으니 거처할 곳도 마땅치 않고, 그러니, 이 꼴로 살 수밖에 더 있어?” “...그러셨군요.” “내가 어떻게 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훌륭하지만 쓸쓸하게 살다 가신 조부의 생애 를 누구에겐가 옳게 전해 주고 가면 됐지 뭐. 마침, 선생과 같은 사람을 만났으 니 다행이고. 어젯밤에 누군가 나를 찾아온 꿈을 꿨어. 지금 생각하니, 그 사람 이 바로 선생이었나봐. 신통한 꿈이지.”“정말 저를 그렇게 보셨습니까? ” “ 그랬으니까 이 자리에 앉아 있지.” 그리고는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광기라고는 티끌만큼도 들어 있지 않았다. 비로소 나는 그에 대한 경계심과 의 구심을 말짱하게 걷어 버릴 수 있었다. 오히려 그의 품에 파고들고 싶을만큼 신 뢰감이 깊이 드는 것이었다. “자아, 이것들을 봐. 그래야 선생이 내 말을 믿을 테니까.” 그가 피우던 담배를 눌러 끄고는 궤짝에서 천이나 마대 따위로 싼 것 들을 꺼내 나란히 늘어놓았다. 모두 대여섯 개가 되었다. “이게 다 뭡니까?” “그분이 쓰시던 것들이지.” 그가 천을 풀자 거기엔 벼루, 먹, 연적, 붓, 석간주, 낙관용 도장, 담배쌈지, 주머니칼, 심지어 날고 때가 꾀죄한 허리끈까지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보며 벌린 입을 오랫동안 다물지 못하였다. 그것들에 어떠한 표 시도 없어 과연 장승업의 유품들인지는 확인할 길은 없겠으나 그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을 그의 감정에 우선은 편승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누가 물려주셨습니까? ” “그야 내 부친이 물려주셨지.” “그럼, 부 친 께서도 이것들을 손수 챙기셨던거야?” “웬겔. 조모께서 보관하고 계셨어.” “그럼, 나으리는 다음에 이걸 누구한테 물려주실 건가요?” “없어.” “...없다 니요? 자손이 없으시다는 말씀인가요?” “그래 여태 혼자 사셨다는 말씀인가 요?”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다 그렇게 사셨으니까.” “그래도, 오원 선생께 서는 후손을 남기셨잖습니까.” “남기고 싶어 남겼나? 실수로 남긴 거지. 결국, 내 아버지나 나나 조부처럼 살라는 팔자를 타고난 거야. 사실 말이지, 조모도 근 본이 없는 여자였고 어머니 역시 근본이 없어 이리저리 떠도는 여자였다니까, 그럴 만도 하지. 다행히도 조부가 쓰서던 물건을 조모꼐서 버리지 못하고 있었 으니까, 오늘까지 이것들이 남아 있는 거야.” “그렇군요.그럼, 오원 선생이 생 을 마친 때가언젠지 알고 계십니까? 기록에는 천팔백구십칠년으로 돼 있지만... ” “그건 누구도 몰라. 조부의 죽음을 본 사람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속세에서 자취를 감춘 날이 곧 돌아가신 날이라는 설이 맞을지도 몰라. 어쨌든 기인으로 살다가 가신 분이야.” “그러한 오원 선생의 삶을 존경하십니까?” “멋있는 인생이었는데, 어떻게 존경을 안 해?” “나으리는 그분의 재주를 물려받지 못 하셨나요?” “글쎄...? 있다고 해야 할지... 그러나 전쟁 직후, 극장 간판이나 그려 주는 어설픈 재주라서 그만뒀어. 조부의 명예나 더럽히겠다 싶어 아예 등 을 돌렸지.” “혹시, 오원 선생의 그림은 없습니까?” “...딱 한 장 있어. 보여 줄까? 그래야 내가 장승업 후손이라는걸 확실하게 믿을 테니까.” “보여주십시 오.” 그가 다시 무릎으로 기어가 역시 천으로 싼 막대 같은 것을 들고 왔다. 천을 풀자 옛날에 졸업장 따위를 보관하기 위해 쓰였던 둥근통이 나오고, 뚜껑을 열 자 색이 바랜 신문지가 말린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숨을 죽이자 지켜보는 동안 그는 귀퉁이가 녹슨 양철처럼 보서지는 신문지를 조심스럽게 펴고는 누렇게 뜬 화선지를 바닥에 다 펼쳐 놓았다. 나는 남포동을 그림 가까이 끌어다 놓고 자세 히 들여야보았다. 소재는 화로와 주전자, 그리고 꽃이 있는 나무가지가 배열된 것이었다. “아하. 이건 기명절지도로군요.” “여기를 봐. 오원이라고 쓴 밑에 낙관이 선명하잖아.” “다만, 화제만 없을 뿐이군요.” “아버지 말씀으로는, 할 머니 기생 시절에 조부가 화대로 대신 그려 준 거려. 그분이 당신 이름 석 자 말고는 글을 모르셨으니, 화제가 없을 수밖에.” “어쨌든, 이걸 보관하고 계시 다니...” “이 정도면 내가 누구라는 걸 믿겠어?” “...네.” “어째, 대답이 시 원찮아. 그래도 의심이 남았어?” “그런 게 아닙니다. 가슴이 벅차서 그럽니 다... 오원 선생의 부친께서 무반이었다는데, 그건 사실입니까?” “나도 아버지 한테 그런 얘기를 듣긴 들었는데, 확실치가 않아. 아버지도 조모한테 들은 얘기 였으니까. 조모 또한 귀동냥으로 안 것이라 신빙성이 있어야지. 내가 그분을 할 머니라고는 하지만, 두 분이 정식 부부로 지낸 것도 아니고, 술 좋아하는 양반이 잠시 정을 붙여 머물다가 조부가 자신도 모르게 덜렁 씨앗 하나 남긴 관계뿐이 라... 어쨌든, 조부에 대한 일화는 아버지한테 들은 것만도 꽤많아.” 그가 말을 끊고는 쇳소리가 나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얼른 담배를 뽑아 그에게 건네고 불을 달아 주었다. 1 함박눈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는 한낮의 저잣거리. 행인들의 발걸음 마치 눈 발에 쫓겨가듯 몹시 바쁘고, 미처 장을 보지 못한 사내들이나 아낙들은 차일을 쳐 놓은 노점상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길 건너 맞은편 국밥집에는 남정네들이 포렴을 젖히고 수도 없이 드나들고, 그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나뭇단을 잔뜩 실 은 달구지가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채 느럭느럭 지나갔다. 소년은 봉두난발을 해 가지고 국밥집 처마 밑에 꼭 망태 모양으로 옹크리고 앉아서 드나드는 사내들을 올려보며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쏟아지는 눈을 피해 비스듬히 비껴 앉은 소년의 어깨에도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이때 구정물을 길 에 뿌리고 들어가던 국밥집 주모가 소년을 발견하고는 분풀이하듯 냅다 욕을 퍼 부었다. “어이구. 저눔으 아새끼래 여태 있구만기래. 기리키 밤낮없이 쪼그리고 앉아 있으믄 누구래 밥 주간? 썩 꺼리라우. 재수 없어야.” 주모가 구정물 통을 소년 의 머리에 씌울 듯이 높이 쳐들었다. 그래도 소년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 도 하지 않았다. “정말 못 가갔어?”“아주마이. 길디 말구 뼈다구락두 한 개 주시라요.” “머시 이드래? 뼈다구? 야 말하는 것 좀 보라우.” “기럼, 재강이 락두 주시라요. 어제부터 굶었시요.” “굶어 죽은 사람 천지야. 니 배만 곯은 줄 아네? 어서 가라우 씨양. 구정물 뒤딥어쓰기 전에.” “재강이락두 얻어먹기 전에는 안 가갔시요.” “뭐이 어드래? 안 가갔다?” 주모가 소년 앞에다 코를 팽 풀어 놓고는 서둘러 들어가더니 이내 통을 들고 다시 나왔다. “당장 가갔어, 아니믄 이 구정물을 뒤딥어쓰갔어. 날래 말하라우.” 주모가 물통을 이리저리 흔 들며 여차하면 소년한테 쏟아부을 기세였따. 주모의 험악한 표정에 잠깐 움찔하 던 소년이 “맘대루 하시라요.” 하더니 눈발에 질척해진 땅바닥에 벌렁 누워 버리는 것이었다. 글러자 주모가 호공에다 실소를 떠뜨리며 소년을 향해 물통을 거꾸로 세웠따. 누비옷도 아닌 소년의 무명옷이 흠뻑 젖어 몸에 착달라붙었다. 그런데도 소년은 입으로 스며든 구정물만 퉤퉤거릴 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마치 국밥집으로 들어가려던 괴나리봇짐의 한 사내가 이 광경을 목겨하고는 주모로부터 물통을 거칠게 빼앗아 동댕이치고는 냅다 걷어찼다. 행색은 비록 깨 끗하지 못해도 범상치 않은 용모가 양반축에 드는 것은 틀림없었다. “인심 한 번 고약한 여편넬세그려. 동냥은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말랬다는 말도 모르구 사 슈? 아이한테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오. 이것이 황해도 하고도, 안악 인심이오? ” 사내의 일갈이 어찌나 우렁찼던지 주모가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사 내는 주모가 어찌 됐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소년의 손목을 낚아채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사내는 소년을 곧장 아궁이 쪽으로 밀어 놓고는 옷을 말리게 하였다. 소년이 몸을 달달달 떨며 젖은 옷을 벗자 속옷 하나 없이 이내 알몸이 나왔다. 이를 지켜보고 섰던 중년의 남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혼자말로 한참을 구시렁 댔다. 행색으로 보아 국밥집 주인이 틀림없었다. “이 집 주인장이슈?” 사내가 묻자 그는“기렇습네다만...?”하고 볼멘소리를 구슬처럼 뱉어 냈다. “이 아이한테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슈.” “...돈은 나으리 가 내시갔시요?” 주인이 사내와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며 의심쩍은 듯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소년이 주인을 올려보며 “날래 국밥이나 주오.” 하고 의기양양 하게 재촉했다. 그러자 주인이 소년을 걷어찰 듯한 자세를 취하다가 사내와 눈 이 마주치자 멈칫하였다. “이 새끼래 밥값은 꼭 나으리가 내시라요.” “말 많 기로는 과부집 종년이라더니, 웬 말이 그리도 많소. 여기도 술 한 대접하고 국밥 하나 말아 오슈.” 사내가 주인을 흘끔 노려보고는 마루 한쪽에 걸터 앉았다. 잠 시 후 주인이 국밥 두 그릇을 들고 와 하나를 부뚜막에다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날래 처먹고 가라우.” 하고 꼬리를 달았다. 소년은 채 마르지도 않 은 옷을 대충 걸치고 부뚜막으로 냉큼 다가앉았다. 그리고는 삽질하듯이 정신없 이 입에 퍼 넣기 시작했다. “야 이놈아. 사타구니에 불 붙겠다. 불알까지 구워 먹을 셈이냐?” 소년의 하는 양을 내내 지켜보던 사내가 측은해서 못 견뎌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소년은 듣지 못한 듯 먹은 일에 온통 정신을 쏟고 있었다. 마 파람에 게눈 감추듯 그릇을 깨끗이 비운 소년이 혀로 입술을 핥으면서 아궁이를 향해 엉덩이를 돌려 앉았다. “배가 어지간히 찼느냐?” 사내가 빙긋이 웃으면 서 묻자 소년이 사내 앞으로 냉큼 달려와 앉았다. “나으리한테 청이 하나 더 있시요.” “그래도 청이 더 있다? 그 청이란 게 뭐냐.” “이왕 동냥하시는 김 에, 주인한테 재강 한 사발만 얻어 주시라요.” “...술재강을?” “네, 나으리.” “이 염치없는 놈아. 그래도 배가 안 찼단 말이냐?” “배가 찰라믄 아직 멀었 습네다. 밥은 염치가 없으니까니, 재강이나 한 사발 더 먹개 해 주시라요.” 고 개를 끄덕이던 사내가 탁주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주인 남자를 다시 불렀다. “ 이 녀석이 배가 아직 안 찬 모양이나, 거어 재강 있으면 한 그릇 내오구려. 값은 내가 쳐 주리다.” “이눔으 아새끼래 염치두 좋구만. 어른한테 감히... 나으리. 이 새끼래 재강을 처먹으믄 십중팔구는 중정합네다. 마시라요.” “주정을? 거어 재미있겠스다. 어디 한번 먹여 봅시다. 어린 놈이 어떻게 주정하는지, 구경 한번 합시다.” 사내 말이 떨어지자 주인이 소년의 머리를 냅다 쥐어박고는 광쪽으로 사라졌 따. 그러자 꾀죄한 소년의 얼굴이 활짝 피면서 누런이를 짐승처럼 드러냇다. 잠 시 후 주인이 사발에다 재강을 소족하게 담아 왔다. 소년의 입이 금세 개구리만 큼이나 찢어졌다. “네 아비 어미는 있느냐?” “...옛날에 죽었시요.” “일가붙 이는?” “아무도 없시요.” “족보두 없는 상놈이로구나. 네놈 성이나 알고 있 어?” “장씨야요.” “장씨라... 그럼, 본은?” “아주 옛날에 혼자 됐으니까니, 그런 것 잘 모르갔시요. 얼마 전에 이웃 할아범한테 들었습네다. 나한테 대원인 지 태원인지, 여하튼 그런 장씨라고 일러 줬시요.” “허긴, 거렁뱅이한테 본관 은 있어서 뭣에 쓰겠냐만... 몇 살이냐?” “열두 살이야요.” “그 나이치고는 뼈대가 제법 실허구나. 그 허우대에 노비짓도 못 할 팔자라니, 굶어 죽기 십상이 다.” “나으리는 한양에서 오셨습네까?” 소년의 입은 제강을씹느냐고 지저분 하기가 꼭 여물 씹는 소 꼴인데다가 이미 눈마저 충혈돼 사내가 낯을 찡그려 소 년을 얼른 외면하였다. “오는 길이 아니라, 가는 길이다.” “한양헤는 어드런 사람이 삽네까? 한양에두 거지가 있시요?” “조선 천지에 거지 없는 곳이 어디 있더냐.왜? 네놈두 한야 가서 거렁뱅이 하려구?” “여게처럼 인심이 야박하지 는 않갔지요?” “이놈아. 한양이라는 곳이 별건 대낮에도 코를 싹뚝 베어 간다 는 얘기두 못 들었어?” “정말입네까? 정말, 사람 코를 베어 갑네까?” “이놈 아, 그만 지껄이고 어서 그릇이나 비워. 주인한테 얻어맞지말고.” 그러자 소년 이 마치 떠날 차비를 서두르는 것처럼 남은 재강을 쉬지도 않고 마구 퍼 넣었 다. 그러고는 소매로 입을 문질렀다. “나으리. 저두 나으리를 따라너서믄 안 됩 네까?” “뭣이 어째?” “제발 떼꾸 가시라요. 나으리를 귀찮게는 안 하갔시요. ” 소년이 갑자기 마루를 내려서더닌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리곤 연해 애소 하였다. 사내가 소년을 물끄러미 내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물에 빠진 놈 건 져 냈더니, 보따리 내놓으리는 격이로구나. 이놈아. 꼴이 하도 측은해서 허기 면 케 해 줬더니...뭐어, 나를 따라나서? 예끼, 염치라고는 때만큼도 없는 자식. 내 앞에서 썩 사라져라.” 지금까찌 내내 온화한 표정이던 사내가 갑자기 무서운 얼굴로 태도를 바꿔 언성을 있는 대로 높였다. 소년이 당장 기절할 듯이 눈을 하얗게 뒤집었다. “잘못했습니다요, 나으리. 용서해 주시라요.” “시끄럽ㅅ다. 거렁뱅이 꼴에 감히 누구를 따라나서.” 사내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주인을 불러 밥값을 셈하고는 휑하니 나가 버렸다. 그러자 기회는 이때다 싶어 주인 남 자가 소년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아무리 거렁뱅이락두 염치를 알아 야디. 그 꼴에 감히 한양을 입에 올리다니, 말이 되갔어? 날래 꺼디라우. 니 새 끼래 있으믄 손님이 끊어져야.” 그리고는 소년을 또 한 차례 걷어찼따. 그제서 야 소년은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면서 밥집을 재빨리 빠져나갔다. 눈은 여전히 폭설로 쏟아지고 있었다. 소년이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그 사내가 빠른 걸음으로 가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소년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사 내가 가는 방향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사내를 겨우 따라붙은 소년이 그의 앞 을 딱 가로막고는 “나으리.”를 불러 놓고 눈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웬놈이 냐?” “나으리.” “아니, 네놈이...?” “저를 나으리 댁 머슴으로 삼아 주시라 요.” “어허, 이런 억지가 있나. 이놈아. 내가 너를 어찌 알고 머슴으로 쓴단 말 이냐. 당치않은 소리 그만 하고, 길을 터라.” 그래도 소년은 물러서지 않고 눈 을 내리는 대로 다 맞고 엎드려 있었다. 그러자 사내가 “이 염치없는 놈아.”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소년을 곧 걷어찰 기세로 다가섰다. 소년은 죽기살기로 사 내의 다리 한 짝을 끌어안았다. “나으리. 제발, 저를 버리지 마시라요. 여게서 는 굶어 죽습네다.”“이놈아. 한양에 가면 누가 거저 먹여 준다든?” “그러니 까니, 나으리 댁에 머슴을 하갔습네다. 제발, 받아 주시라요. 무슨 일이락두 하갔 시요.” “이놈아. 내 갈길이 바쁜 몸이다. 어서 물렀거라.” “차라리 저를 죽이 고 가시라요. 어차피 여게서는 굶어 죽습네다.” 소년이 아예 사내의 다리 둘을 안아 버렸다. 그 바람에 사내가 중심을 잃고 잠시 비틀대더니 종내는 눈밭에 넘 어지고 말았다. “이런 고얀 놈을 봤냐. 거렁뱅이 주제에 감히 양반을 넘어뜨려? 네놈이 혼이 나도 단단히 나야 되겠구나.” 사내가 낭패스런 낯으로 일어나 눈 을 털자 소년이 이마를 땅에 대고 납작하게 엎드렸다. “나으리. 죽을죄르 지었 습네다.” “네놈이 다른 양반을 만났으면 주리를 틀었을 게다. 나 같은 사람 만 난 것을 천행으로 생각해라.” “네, 나으리. 기래도 저를 떼어 놓지는 마시라요.” “답답한 노릇이다. 내 비록 양반이기는 하나 가세가 보잘것없는 데다가, 정처 없이 떠돌기를 좋아하는 몸이라, 네놈을 데리고 있을수가 없어.” “...기러시면, 한양까지 곁에 있도록만 허락해 주시라 요.” “그건 어렵지 않다만... 도대체, 네까짓 놈이 한양에는 가서 뭐하게?” “ 비럭질을 해도 한양에 가서 하갔습네다.” “네놈이 한양병이 단단히 들었구나. 그러나저러나, 이 엄동설한에 입성이 그래 자기구서야 어찌 견디겠느냐. 얼어 죽 기 딱 알맞구나.” “염려 없습네다. 밤에는 남의 집 굴뚝에 등짝을 대고, 낮에 는 살을 서로 부비면서 뛰어댕기믄 추위를 이길 수 있습네다.” “거지 꼴에 꾀 는 있는 모양이구나. 그래, 글은 좀 깨쳤느냐?” “배운 적이 없습네다.” “...어 쩌면, 네가 더 편한 인생일지도 모른다. 아무데서나 먹고자고, 게다가 식자우환 도 없을 테니 말이다.” “기렇지만 나으리. 저처머 배운 것이 없는 놈은 평생을 천대만 받고 산다고 들었습네다.” “꼬라지와는 다른 구석이 있구나. 네놈이 천 민인, 천대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제 분수를 알아야지.” “기렇지만 나으 리. 양반도 천민도 다 같은 사람 아닙네까. 출신이 천민이라고 해서, 같은 사람 한테 짐승 취급을 받는 것은 좀 억울하지 않습네까.”“이놈이...? 누구한테 들은 소리더냐, 아니면 네놈 생각이더냐.” “...제 생각입네다.” “네놈 생각이라... 한 양 가서 머슴 하겠다는 놈이 양반한테 맞아 죽을 생각만 하는구나. 한양에 가서 는 입을 조심해야 한다. 알겠느냐?” “...네,나으리.” “숨은 내쉬고 말은 내지 말라고 했다. 말은 입 밖에 내기를 조심하라는 뜻이야. 네놈이 천대를 많이 받은 모양이다만, 양반도 입성이 반듯하지 못하고 행동거지가 바르지 못하면 천대받 기는 마찬가지야. 무슨 말인고 허니, 행동거지를 바르게 가지면 남이 함부로 하 지 못한다는 뜻이다.” “네,나으리.” “네놈한테 똑똑한 구석이 있는 듯도 한 데, 글을 익히지 못했다니 아쉽구나.” “양반이 아니면 글을 배워도 소용이 없 다고 들었습네다.” “이놈아. 글을 익힘이 꼭 입신양명하기 위해서만 한다더냐. 사람이 살면서 지켜야 할 도리를 깨닫기 위해서 하는 것이야.” “...네, 나으리. ” 쑥대강이같이 흐트러진 머리에다 거무칙칙한 무명 저고리와 바지만 달랑 걸 친 소년의 모양새를 꺼림칙하고 측은한 눈길로 내려보고 있던 사내가 갑자기 한 숨을 내쉬었따. 왠지 비럭질로 썩기는 아까운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따. 어린 나 이에 배운 것도 없는 놈이 생각하는 것은 철 안 든 어른보다 낫다느 ㄴ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네놈은 재강만 먹으면 주정을 한다지 않았더냐. 그런데, 어째서 그리 멀쩡하지? 술이 벌써 깨 버렸느냐?” “기런 게 아닙네다. 재강을 먹고 나면 갑자기 어지럽고, 저도 모르게 노래가 나와서 기럽네다.” “ 날씨도 춥고 노정이 지루하니, 노래나 불러 보렴.” “잘 못합네다.” “못해도 괜찮다.” “꾸중하시믄 안 됩네다, 나으리.” “알았다니까 그러는구나.” “기 럼...” 소년이 갑자기 허리춤을 올리며 목을 길게 뽑았다. 그 모양이 재미있는 듯 사내가 웃음을 참지 못해 슬그머니 외면을 하였다. 정방산성 초목이 무성한데 밤에나 울 닭이 대낮에 운다 에~에헤에 에헤요 어림마 둥둥 내 사랑아 슬슬 동풍에 궂은비 오고 시화나 연풍에 임 섞여 노자 에~에헤에 에헤요 어림마 둥둥 내 사랑아 사면십리 느러진 능파 속에 님 찾아갈 길이 망연이로다 에~에헤에 에헤요 이림마 둥둥 내 사랑아 소년은 제법 중모리 장단을 흉내내면서 재강 힘인 듯 목청을 있는 대로 뽑아 젖혔다. 구성진 데가 있었다. 두 사람 외에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외진 산길에 눈은 퍼붓고, 마침 아이가 낭낭하게 뽑아 내는 가락이 나느네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는 듯하고 기하고 기특하여 거지라는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 다. “이놈아. 그건 <긴난봉가>가 아니더냐.” “황해도 사람이 많이 부릅네다.” “누구한태 배웠길래, 그토록 빠진 곳 없이 부를 수 있더냐?” “...그냥, 몇 번 듣고 불렀습네다.” “제법이구나.” “또 있습네다.” “그 녀석 참... 어디, 더 들어 보자꾸나.” 소년이 갑자기 곰배팔이와 다리병신 흉내를 내더니 <병신난봉 가>를 뽑기 시작하였다. 영락없이 병신에다가 바짓가랑이까지 우습게 걷어올린 것이 시장바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지패 중의 하나였다. 병신의 종자가 또 따로 있나 한 다리 한 팔 못 쓰면 병신이지 에~에헤여 어거야 어야어야 디야 네가 내 사랑아 능라도 수양버들 휘어휘어 잡고서 가지나 말라고 생야단만 친다 에~에헤여 어거야 어야어야 디야 네가 내 사랑아 십오야 큰 달아 말 물어 보자 우리 임 계신 곳 비추어나 주렴 에~에헤여 어거야 어야어야 디야 네가 내 사랑아 “그것도 귀동냥으로 배운 것이냐?” “네, 나으리. 꾸중은 안 하시갔지요?” “그 녀석 참...” 사내는 소년의 눈썰미와 밝은 귀에 새삼 놀라고 있었다. 무식 한 천민 출신이 분명한 듯한데 겨우 열두 살 사이에 그만한 가사를 빠뜨림 없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사내는 소년이 새삼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정말 천민 출신인지 아니면 무슨 곡절이 있는 가문의 후손인지 아리송하였다. “얘야, 뭣 좀 물어 보자꾸나.” “네, 나으리.” “네가 몇 살 때 아비를 잃었더 냐? 숨김없이 말하거라.” “...여섯 살 때 돌아가셨습네다.” “네 어머니는?” “제가 아홉 살 먹었을 때 병을 앓다가...” 그 대목에서 소년은 말을 잇지 못하 고 고개를 죽은 닭처럼 맥없이 떨어뜨리며 소매로 눈을 문질렀다. 사내는 자신 도 모르게 소년 어깨에 팔을 올렸다. “안됐구나. 혹시, 아비한테 너희가 양반 의 가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으냐?” “아바지는 비장이댔시요. 오마니한테 들었습네다.” “그렇다면, 무반이구나. 어쩐지...” 사내는 소년의 얼굴을 다시 한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그러면 그렇지...”를 되뇌었 다. 몸을 씻기고 입성만 깨끗하게 갈아입히면 총명함이 저절로 드러날 얼굴임을 비로소 깨달았따. “나으리, 무반은 양반과 무엇이 다릅네까?” “양반은 양반으 로되, 문반에게 하대를 받느니라.” “기럼, 제가 천민이 아니라는 말씀입네까? ”“천민은 아니다만, 비장이 원체 말직에다가 가세가 빈곤했던 탓에 양반 대접 을 받지 못했을 게다. 하지만 분명 천민은 아니니, 차후로 행동거지를 천하게 드 러내지 말아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네, 나으리. 까막눈이 양반 행세는 해서 뭐 하갔습네까.” “ 네 아비가 자식한테 글을 배우게 하지 않는 것이 이상허구 나.” “오마니가 못하게 했시요.” “어미가? 왜 그랬다너냐?” “과거를 보지 못할 바에야, 무식한 것이 낫다고 했습네다.” “어허. 네 어미가 무식했구나.” “오마니 말이 맞습네다. 거렁뱅이가 어드렇게 글을 배우갔습네까. 나으리께서도 식자우환이라고 하셨으니까니, 차라리 잘됐지 뭡네까.” “이 녀석, 말은 뻔지르 하구나. 그러나 독학도 있느니라.” “...머슴 일 하믄서, 배나 곯지 않으면 좋갔 습네다.” “내가 비록 양반이기는 해도 밑이 빠지게 가난하니, 네 뒤를 돌봐 줄 수가 없구나.” “아닙네다, 나으리. 한양까지만 데려다 주시믄, 혼자 살 수 있습 네다.” “기특한 생각이다.” 조금 전만 해도 한낮이었던 시간이 그만 눈 속에 파묻힌 듯 사방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눈발은 약해졌으나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바람이 살을 에는 것처럼 매웠다. 사내는 봇짐을 풀어 소년에게 젖은 버 선을 갈아신기고 짚신도 한 켤레 선뜻 내주었다. 소년이 황송해서 마다하는 것 을 눈을 부릅떠 억지로 신게 하였다. “어둡기 전에 저 등성이를 넘어야 되겠다.” “산을 넘으믄 인가가 있습네까? ” “주막이 하나 있느니라.”“나으리.” “왜 그러느냐.” “...나으리는 예삿분 이 아닙네다.” “녀석...아첨할 줄도 아는구나.” “아닙네다. 저 같은 거렁뱅이 를 천대하지 않으시는 것이 기렇습네다. 다른 사람은 저를 꼭 짐승처럼 박대를 하잖습네까. 양반집 아이들은 물론이고, 같은 천민인데고 아바지 오마니가 있다 고 그 아 새끼덜까지 업신여깁네다. 그런데 나으리께서는...” 소년은 목이 맺힌 듯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는 사내를 하늘이 맺어 준 은인 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인 놈을 불쌍히 여기는 온정이 한 없이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을 물어 보지 않았구나. 성은 장가라 했는데...” “승 업이라 합네다.” “이름자는 쓸 줄 아느냐?” “...모릅네다. 오마니가 기러는데, 베풀 장에 이을 승과 업 업자를 쓴다고 했습네다.”“음... 네가 기억력은 좋은 모양이구나.”“무엇이든 한번 들은 것이나 본 것은 까먹디 않습네다.”“그래? 그러면, 네 이름을 써 줄 테니 익히겠느냐?” “네, 나으리.” 사내가 나뭇가지 를 꺽어 눈밭에다 소년의 이름 ‘장승업’크게 써 주었다. 그러자 소년이 제 이 름자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쓸 수 있겠느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ㅏ. “어디, 한번 써 보렴.” 사내가 글자에 눈을 덮어 버렸다. 그리고는 나뭇가 지를 소년에게 넘겨 주었다. 소년은 한자 한자 써 나갔다. 비록 조악하기 이를 데 없지만 신통하게도 획을 하나도 빠뜨리고 않고 이름 석 자를 그려 놓았다. “음...정말, 놀랍구나.” 사내는 소년 승업이 더 기특하고 대견하여 눈에 젖은 그의 더벅머리를 움켜잡아 마구 흔들었다. “네 이름 석 자만은 절대 잊지 말아 야 한다.” “네, 나으리.” “갈 길이 멀다. 서두리자꾸나.” 사내는 뜻 모르게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눈밭을 헤치며 성큼성큼 앞장섰다. 그 뒤를 소년이 강아지처럼 따라붙었다. 2 조선시대에는 동지가 지난 후 제3의 미일을 납일로 정하여 조정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큰 제사를 지냈다. 여기서 미일이란 지지, 즉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 술.해 중에서 미의 날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납일은 사냥하는 날로서, 천지만 물의 덕에 감사하기 위하여 산짐승을 사냥하여 여러 신에게 고하는 제사 때 제 물로 썼으며, 그 고기로는 주로 산돼지와 산토끼를 썼다. 경기도 산간의 군에서 는 특히 산돼지를 제물로 많이 썼기 때문에 그곳 수령은 산돼지를 수색하기 위 해 온 군민은 물론이고 서울 장안의 포수까지 동원하였다. 그리고 각 가정에서는 참새를 잡아 어린아이한테 먹이면 속칭 천연두라 불리 던 마마를 깨긋하게 한다 하여, 이날에 그물을 쳐서 참새를 많이 잡았다. 또한 납일에 내린 눈을 녹여 그 물을 약용으로 쓰기도 하였고, 그 물에 물건을 적셔 두면 구더기가 생기지 않아 눈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오늘이 바로 그 납일이어서 각 고을의 산과 골짜기마다 산돼지를 몰기 위해 동원된 장정들이 내지르는 함성으로 여기저기서 마치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것처 럼 요란했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참새를 잡기 위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또한 야단법석이었다. 이른 아침, 용문산을 끼고 경기도 양평에 들어서고 있던 사내와 소년 장승업 은 죽자사자 산돼지를 쫓고 있는 군민들을 목격하고 둘이서 한참을 구경하였다. 뿐만 아니라 마을 한가운데로 들어오자 참새를 잡으려고 아이들이 이리 뛰고 저 리 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승업은 갈 길이 바쁜 것도 깜빡 잊고 아이들 노는 모습이 재미있어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사내가 길을 재촉하며 여러 차례 불렀는데도 듣지를 못하였다. “ 야 이놈아. 한가하게 구경만 하고 있을 테냐? 서둘러 가도, 오늘 중으로 한양에 닿을 둥 말 둥하다니까 그러는구나.” “헤헤. 저놈들, 새 잡는 솜씨 하고는...” 승업이 새를 쫓아 우왕좌왕하는 아이들을 보며 연신 실소를 떠뜨렸다. “그러는 네놈은 뾰족한 수가 있을 성싶으냐? 어서 가자.” 이때 승업이 갑자기 사내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사내가 귀찮아 하는데도 승업은 소매를 놓지 않았다. “ 대체, 왜 그러느냐?” “나으리. 시장한데 새나 잡아 구워 먹으믄 어떻갔시요?” “...나는 새를 무슨 수로 잡는단 말이냐?” 그러자 승업이 “붙들어 맬 끈이 있 어야디...?”하고 중얼대더니 갑자기 사내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눈빛를 반짝이며 훑어내리는 것이었다. 사내가 영문을 몰라 승업을 멀뚱하게 내려보았다. “나으 리. 죄송하지만 그 술띠 좀 빌려 주시라요.” “뭣이 어째? 띠를 빌리자니? 이놈 아. 남의 중치막에 두른 띠를 달라면 나는 어찌하고?” “새끼라도 있으믄 되갔 는데... 잠시만 빌리면 됩네다.” “이놈이...? 대체, 띠는 무엇에 쓰려는냐?”“새 를 잡으려고 그럽네다.” 그리고는 마치 허락이라도 얻어 낸 것처럼 사내한테 손을 불쑬 내밀었다. 사내는 승업의 행동이 하도 당돌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비 척비척 뒷걸을질을 쳤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술띠는 이미 풀려 승업의 손으로 넘어갔다. 사내는 “어허, 어허...” 하면서 승업의 손에 넘어간 띠를 잡으려고 팔만 마구 흔들어 댔다. 승업은 사내의 술띠를 재빨리 자기 허리에 두르고는 제 허리띠를 풀렀다. 그 리고는 돌 한개를 골라 끝으로 단단히 묶었다. 그래도 제 딴에는 양반의 술띠로 차마 돌을 묶을 수가 없어 사내의 띠를 자기가 두른 것이었다. 승업이 사내를 세워 둔 채 참새가 많이 앉아 있는 나무를 골라 살금살금 다가 가면서 돌을 매단 띠를 쥐불놀이 하듯 빙빙 돌리는 것이었다. 사내가 보기에 놈 이 많이 해 본 짓이었다. 결국 사내도 승업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았다. 나뭇가지에 참새 대여섯 마리가 눈치도 없이 마냥 앉아 있었다. 어느덧 사내 도 긴장하여 가슴을 졸였다. 그 순간, 연처럼 꼬리를 달고 승업의 손을 떠난 돌 이 참새 한 마리를 정통으로 맞혀 여지없이 떨어뜨렸다. 사내는 놈의 재주에 감 탄한 나머지 양반의 체통도 잊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 바람에 띠를 잃은 중치막이 바람에 빨래처럼 날렸다. “야 이놈아. 띠를 냉큼 가져오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승업은 들은 척도 하 지 않았다. “내 띠 내놔, 이놈아.” “네, 나으리. 세 마리만 더 잡고 드리갔습 네다. 잠시만 참으시라요.” 승업은 얼굴조차 돌리지 않고 또 다른 나무를 향해 걸음을 날렸다. 잽싸기가 꼭 다람쥐 같았다. 사내는 볼멘소리로 “양반 체통이 말이 아니구나.”를 구두덜대며 꼭 누가 보는 것 같아서 발만 구르고 있었다. 한 참 만에 승업이 돌아왔다. 결구 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아주 의기양양했다. 새를 자그만치 다섯 마리나 잡았다. “나으리. 이것으로 요기는 되갔지요?” “ 네 이놈. 띠를 냉큼 내놓지 못할까. 천하에 불상놈 같으니.” 사내는 승업의 재 주가 신통하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썼다. 승업이 그제서야 생 각이 난 듯 재빨리 띠를 벗어 사내에게 돌려주었다. “잘못했습네다, 나으리. 너 무 배가 고파서 기랬습네다. 용서하시라요.” “못된 놈 같으니라고...” “나으 리. 주막에 가서 맛있게 구워 드리갔습네다.” “시끄럽다. 네놈이라 실컷 처먹 거라.” “...노여움을 푸시라요, 나으리. 다시는 안 기러갔습네다.” “내가 띠 를 또 풀어 줄 것 같더냐?”“나으리. 제 솜씨가 어떻습네까?” “그게 무슨 자 랑이라구... 팔매질은 누구한테 배웠느냐?”“혼자서 익혔습네다. 고무줄 총이 있 으며 수도 없이 잡습네다.”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마침 오늘이 납일이니, 네 놈이나 구워 먹어라. 그래야 마마를 곱게 하니니라.” “노여움을 푸셨으니, 다 행있네다.” “어서 가자. 네놈 때문에 많이 지체했다.” 사내는 승업의 행동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결코 밉상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 았다. 승업을 참새를 짚으로 솜씨 있게 엮어 허리춤에 차고는 망아지처럼 쫄래 쪼래 따라붙었다. 날이 저물 무렵에서야 한양에 겨우 당도했다. 무슨 연유인지 사내는 오는 길 을 항상 재촉하였다. 꼭 주막에 들러야 하는 일 빼고는 쉬는 법이 없었다. 승업 이 숨이 가빠 잠시 쉬자고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애써 잡은 참새를 구워 먹을 새도 없이 길을 재촉하였다. 걷는 힘으로는 장사였다. 마치 걷는 일에 이골 이 난 사람 같았다. “나으리. 한양에 왔으니까니, 이자는 저를 버리십네까?” 갑자기 불안해진 승 업이 힘없이 물었다. 그러나 사내는 묵묵히 걷기만 하였다. 승업이 사내의 소매 를 슬그머리 잡았다. “그렇게 약조하지 않았더냐?” “...네, 나으리.”“그렇게 알고, 이제부터는 네 갈 길응 찾거라.” “나으리.”“왜 그러느냐?”“한양에서 머슴을 살라믄 어떻게 합네까? 기것만 가르쳐 주시라요.” “그 또한 네가 찾을 일이다.” “나으리...” “어허, 이놈아... 정녕, 머슴을 할 테냐?” “네,나으리.” 사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갸웃하였다. 승업을 맡길 만한 마땅한 곳을 궁리하는 듯싶 었다. “헷걸음 삼아 한번 가 보기나 하자.” 사내가 더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 갔다. 승업은 낯선 곳에서 그를 잃어버릴까 봐 더욱 바싹 따라붙었다. “나으리. 저를 데리고 가시는 거디요?” “말이 많구나. 이제부터는 행동거지를 천하게 하면 안 되느니라.” “네,나으리.” “그 댁에서 너를 받아 줄지 모르겠구나.” “일만 열심히 하믄 밥은 배불리 먹갔디요?” “낸들 알겠느냐? 밥을 줄지, 거 름을 줄지.”“헤헤, 나으리도... 설마, 똥이야 먹이갔습네까?” “밥을 안 주면 거름이라도 먹어야지, 네놈이 별수 있겠느냐?” “설마...” 승업은 한양의 양반 인심이 은근히 두렵고 궁금하면서도 “설마,설마...”를 중 얼거리며 축 처진 어깨로 사내를 따라갔다. 창경궁을 지나 안국동으로 접어들었 따. 그러자 대궐같이 큰 기와집들이 곳곳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 단박에 눈에 들 어왔다. 그 위세에 눌린 승업은 벌린 입을 오랫동안 다물지 못했다. 귀동냥으로 만 들었던 한양의 양반댁이 이처럼 으리으리할 것으로는 차마 상상하지 못했다. 마치 별천지에 온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황해도 안악에서도 또 몇십 리 를 들어간 오지에서 태어난 승업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는 동안 사내는 승업을 아랑곳하지 않고 어디론가 바삐 걷기만 하였다. 승업이 숨을 헐떡거리며 사내를 뒤따랐다. “나으리. 이렇게 큰 집에는 어떤 양 반들이 삽네까?” “너 같은 놈한테는 일러 줘도 모르니니라. 워낙 지체 높은 양반들이니까.” “...나으리도 양반이니까니, 집이 저마큼 크갔습네다.” “헛소 리 그만하고, 어서 따라오너라. 내가 이 무슨 짓이냐.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느닷없이 거렁뱅이를 혹으로 달고 다니다니.” 사내는 승업이 갑자기 귀찮아진 듯 짜증 섞인 어투로 말했다. 승업은 금세 주눅이 들어 입을 딱 봉해 버렸다. 비 로소 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양반 체통에 거지를 마다 않고 거둬 준 은 혜를 잠시 잊고 버릇없이 굴었던 순간순간들이 몹시 송구스러웠다. 승업은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귀찮은 나머지 혹시 길거리에다 그냥 버릴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다고 해도 사내를 원망할 수는 없음을 승업은 잘 알 고 있었다. 자신의 몰골을 새삼 살펴본 승업은 사내와 조금씩 간격을 두고 따라갔다. 양 반의 체통을 생각해서도 그와 나란히 걷는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고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라고 판단했다. 사내가 큰길에서 골목을 두 번 꺾어 돌더니 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옷매무새를 고치는 시늉을 하였다. 그리곤 한 기와집 앞으로 성큼 다가서는 것이었다. 솟을 대문이 아니고 빌고 평대문이긴 하지만 눈어림으로 규모가 꽤 큰 집이었다. 사 내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승업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불안한 가 운데에도 가슴 한편으로는 흥분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이 집 주인 양반이 과 연 자신을 머슴으로 써 줄는지 점점 자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미 머슴이 되 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 한량없이 기뻤다. 사내가 안에 대고 “이리 오너라.”를 외치자 잠시 후 문이 삐그르 열리며 머 슴이 틀림없을 중늙은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어둑어둑한 시야에서 방 문객을 확인하느라 목을 거위처럼 늘였다. “날세.”“어이구, 진사 어른.어서 오 십쇼.” “집안은 무고한가? 대감마님이랑 내당마님께서도 평안하시고?” “네, 진사 어른. 모두 무고하십니다요. 대감마님께서는 마침 저녁 진지를 들고 계십니 다.” 이때 승업은 재빨리 “진사 어른...?”을 되뇌이며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 다.비로소 그가 진사 양반임을 깨달았다. “시장하던 차에 때를 잘 맞춰 왔구 만.” 머슴이 허리를 낫처럼 구부려 사내에게 길을 터 주자 그가 안으로 들어가 다 말고 승업을 가리키며 “저놈한테 밥 한 덩이 주게.” “...누굽니까요?” “ 그냥 밥이나 한술 먹이게.” “그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머슴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 진사와 승업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승업의 몰골을 파악한 그는 기가 막힌 듯 한동안 멀뚱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승업은 고개를 숙인 채 그 의 처분만 기다릴 뿐이었다. “어여 들어와, 이눔아. 꼬락서니 하구, 원...” 머슴 이 얼굴을 오만상으로 찌푸리며 승업을 안으로 들게 하였다. 잔뜩 주눅이 든 승 업이 게걸음으로 비치적거리자 행동을 빨리 하라며 눈을 부라렸다. 머슴은 승업 을 행랑채 툇마루에 남겨 두고는 말없이 사라졌다. 잠시 후 머슴이 다시 나타나 승업에게 바가지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바가지 에는 찬밥과 김치 두어 쪽이 담겨 있었다. 승업은 바가지를 받자마자 허리춤에 매달린 주머니를 열어 동간난 숟가락을 꺼내 들었다. “도대체 웬놈이냐? 웬놈인데 감히 진사 어른을 따라다니는겨?” 눈알이 불거 지도록 밥을 꾸역꾸역 퍼 넣고 있는 승업을 내려보며 머슴이 물었다. 그러자 승 업이 목을 뽑아 밥을 목구멍으로 급히 넘겼다. “저를 한양으로 데려가 달라고, 나으리한테 부탁했시요.” “한양에는 왜?” “...머슴살이 하러 왔시요.” “우 리 대감댁에?” “그건 잘 모르갔시요. 나으리께서 정해 주시믄 있을 생각입네 다.” “글쎄다. 내당마님이 네 꼴을 보시고, 과연 허락하실지...” “밥만 먹여 주시믄, 무슨 일이든지 다 하갔시요.” “그건 내당마님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승업이 머슴이 내뱉은 말에 다시금 불안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이 집에서 머슴으로써 주지 않는다면 당장 정처가 없어 걱정이었다. 진사 양반한테 더는 매달릴 염치가 없어 낯선 한양 땅을 떠도는 신세가 될 판이었다. 대감 내외한테 문안인사를 마친 이 진사는 사랑채로 건너와 독상을 받아 허기 부터 채웠다. 이때 문이 스르르 열리며 내당마님이 들어섰따. 그녀는 좌참찬 김 우근대감의 부인이며 이 진사 용후한테는 누님이 된다. 김우근 대감은 당시 영 의정에 올라 있는 김좌근과는 사촌간이라 안동 김씨 세도에 편승하여 장안에서 는 세도 있는 집안이었다. “밥숟가락을 보니, 몹시 시장했던 모양이네.” “어서 드십시오,누님.” 이용 후가 밥을 뜨다 말고 송구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가 혀를 차며 동생에게 별로 곱지 않은 눈길을 내려놓았다. “마저 자시게. 그래, 이번에는 또 어디를 유람했나?” “...금강산에좀 다녀왔습니다.” “벼슬자리도 마다하고, 그렇게 유람이나 다녀서 어쩌겠다는 게야?” “입에 거미줄만 안 치 면 되지요, 뭐.” “저렇게 속 편한 사람이 조선 천지에 또 있을는지 원...” “ 그건 그렇고, 누님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청이라니?” “...어쩌다가 어아 한 놈을 달고 왔는데, 머슴으로 두면 어떨까 싶습니다. 생긴 건 거지 꼴이지만 제법 총명한 구석이 있는 놈입니다.”“그 아이가 누군데 달고 왔다는 게야?” “황해도 지방에서 주운 놈입니다.” 이용후는 승업과 연을 맺게 된 사연과 그 의 면면을 소상사게 얘기했다. 그러나 그녀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근본이 없는 아이를 집에 들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근본이 아주 없는 것이 같지는 않습니다. 무반의 자식인 듯한데, 워낙 조실부모한 탓에 거지 꼴이 된 것뿐입니 다. 제 형편이 웬만하면 데리고 있겠지만 누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자네 그 모양새도 거지나 별반 다를 게 없으니, 둘이서 붙어다녔다면 볼 만했겠네. 제발, 양반 체통 좀 지키게. 방금 전에 대감께서도 자네를 외면하시지 않던가. 대감 뵙 기가 민망해서 혼났네.” 그녀는 초라한 동생의 몰골부터 못마땅해 하던 차에 거지까지 데리고 다녔다는 말에 가슴에서 열방망이가 뛰는 것 같았다. 마음 같 아서는 몰인정하게 당장 내쫓고 싶어 안달이 솟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저도 되도록 누님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저놈한테 코를 꿰는 바람에...” “자네, 참으로 못났네그려.” 그녀는 동생으로부터 아예 돌아앉았다. 이용후는 누님의 성미를 잘 아는지라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웬만해서는 노여움 을 갖지 않는 성격이지만 일단 감정이 뒤틀렸다 하면 그것이 풀리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정이 많은 여자이면서도 동생의 생활 태도가 양반스럽지 못한 점이 항상 불만이었다. 이릴 때부터 워낙 총명한데다가 문장이 훌륭해 진 사까지 됐으면서도 관직에 들어가기를 싫어했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에선지 그 저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동생의 역마살이 가뜩이나 안타깝고 못마땅한 판 에 왠 거지까지 달고 와서 머슴으로 쓰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미운 벌레가 모로 간다더니, 자네가 꼭 그 짝일세. ”“...미운 놈한테 떡 하 나 더 준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그만두게. 어차피 늦었으니 오늘은 예서 묵 도록 하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행여, 대감 눈에 띄지 않도록 하게. 대감이 아시면 자네 얼굴에 미운 털만 더 박힐 테니까.” “누님 뜻이 정 그러시다면, 분부대로 행하겠습니다.” 이용후는 그녀가 자리를 뜨자마 자 곧장 행랑채로 향했다. 승업이 방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툇마루에 앉아 몸을 달달 떨고 있었다. 그가 측은하다는 생각에 갑자기 머슴들이 괘씸하였다. “박 서방, 안에 있는가?” 비로소 문이 열리며 아까 그 중늙은이 머슴이 얼굴을 내 밀었다. 그가 이용후를 보자 당황해서 마당으로 황망히 내려섰다. “진사 어른께 서 이 누추한 곳에 어인 일이십니까.”“이 아이를 밤새 여기에 둘 텐가. 저러다 얼어 죽기라고 하면 어쩌려고... 윗목에라도 재우게.” “꼴이 하도 저 모양이라 고 그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내당마님께서 저 아이를 머슴으로 쓰시겠다고 하셨습니까? ” “...오늘 밤만 묵도록 하셨네. 형편이 되거든 저 아이한테 헌 솜 옷 한 벌 입히게. 저꼴로는 얼어 죽기 십상 아니겠나.” “글쎄요...? 마땅한 옷 이 있을느지 모르겠습니다요.”“누더기라도 좋을 것이니, 찾아보게. 그리고, 주 먹밥도 네댓개 준비하게.”“주먹밥은 무엇에 쓰시게요?” “그건 알 필요 없으 니, 준비나 하게.” “...알았습니다요.” 그제서야 승업은 방에 들어갈 수 있었 다. 몇날 며칠을 한데서만 지내던 그가 방에 몸을 넣는 순간 꽁꽁 얼었던 몸이 귀뿌리부터 녹기 시작하더니 얼굴 전체가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박 서방은 이용후한테 뜻하지 않은 무안을 당해 승업이 가뜩이나 미운데다가 꼴이 너무 더러워 윗목 구석에다 그를 처박다시피 하였다. 아랫목에는 박 서방 말고도 젊은 머슴 넷이 더 누워서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고 있었다. “이눔아. 내가 뭐라고 했냐. 마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을 거라고 했지? 원래 입 은 거지는 얻어먹어도, 벗은 거지는 못 얻어먹는다고 했어. 꼴이 그래 가지구서 야 누가 너를 거두겠냐. 애비 에미도 없이, 땅에서 솟은 거지 같구나.” “옛날 에는 이렇지 않았댔시요.” “애비 에미가 너를 버린 거냐?” “...일찍 죽었시 요.” “머슴보다 더 서러운 놈이구나. 앞으로 어쩔 셈이냐?” “모르갔시요.... 어드렇게 하믄 머슴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좀 가르쳐 주시라요. 밥만 먹여 주믄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시요.” “이눔아. 머슴한테 고작 밥이지, 바랄 것이 더 있는 줄 알아? 어린 놈이 염치두 좋지. 방법이 있다면, 딱 한 가지뿐이다.” “ 기거이 뭡네까?” “믿을 건 아니지만, 지체 높은 양반댁 문전에다 몇 달이고 자라=ㅣ 깔고 눕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인정 많은 양반 눈에 띄면 거둘지도 모르니까. 운이 좋아야지.” “운이 좋아야 한다니까. 그렇게 해서, 밥은 굶지 않 은 놈이 더러있어.” “가르쳐 줘서 고맙습네다. 기런데, 누구래 지체 높은 양반 입네까?” 승업은 박 서방이 일러 준 말에 귀가 번쩍 열려 흥분을 감추지 못하 였다. 그 방법을 철석같이 믿는 것 같았다. 눈치로 보아 이 집에서 머슴 노릇 하 기는 틀린 성싶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결국 이 진사하고도 헤어져야 할 운명이 었다. 그런 판에 박 서방 말은 매우 그럴 듯하였다. “누구 누구 지체 높다고 하 면 네놈이 알겠냐? 문패를 달아 놓은 것도 아닌데.” “기럼, 어떻게 압네까?” “무작정 대궐 같은 집을 골라 떼를 써야지.” “알겠습네다.” “그러다가, 죽 도록 매만 맞고 쫓겨나는 수도있다는 것도 알아야해.” “...설마, 죽이기야 하갔 습네까.” “녀석, 말하는 것 좀 보게.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것도 몰라?” 자칫 매맞고 쫓겨나는 수가 있다는 말에 승업은 다시금 불안해지면서 금세 눈앞에 캄 캄했다. 엄동설한에 문 밖에다 자리 깔고 눕는 일도 두렵고 막막한 일인데 게다 가 매까지 맞을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처럼 불어났다. 이튿날 동이 트자 박 서방이 뭇국에 더운밥 한 사발을 내와 승업은 그걸 샅샅 이 핥아먹고 이용후를 다시 따라나섰다. 이용후 분부대로 박 서방이 솜을 넣어 꽤 두툼한 옷가지를 내놓아 눈물이 쑥 빠질 만큼 따뜻했다. 게다가 주먹밥까지 안겨 주는 바람에 승업은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 모두가 이 진사의 배려임을 잘 알고 있어 그에게 장차 은혜 갚을 날이 과연 있을까 생각하였다. “승업아. 내 갈 길도 바쁜데다가 더 이상 너를 데리고 갈 수가 없으니, 여기 서 헤어지자꾸나, 산 입에 설마 거미줄 치겠느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잃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고 했으니, 꾀를 내어 살아가도록 해라. 나무라도 해다 팔면 굶어 죽지는 않을 게다. 알았느냐?” “...네.” 승업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 이 주르르 흘렸다. 그와 헤어진다는 서운함과 다시 혼자가 된다는 서러움이 치 밀어오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거 받아라. 몇 닢 안 되지만 나중 에 요기나 하거라.” 이용후가 중치막을 젖혀 엽전 몇 개를 꺼내 승업이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는 말 없이 서둘러 길을 떠났다. “나으리. 안녕히 가시라요. ” 승업은 이용후의 뒷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보며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그가 갑자기 야속하고 서러웠다. 염치 팽개치고 다시 그를 따라붙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 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가슴을 압박하였다. 안녕히 가시라요. 승업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멀리 사라지고 있는 이용후를 향해 무릎 꿇어 큰절을 올렸다. 3 철종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년째 되는 해 갑인년(1854)제석. 제석은 곧 섣달 그믐날 밤을 말한다. 이날에 사대부 집에서는 사당에 가서 조상에게 참례를 하 고, 각 가장에서는 연소자들이 친척 어른들을 찾아가 묵은 세배를 한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초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이들 세배객들이 밝힌 등불이 줄을 이어 끊 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대궐 안에서는 연종포라 하여 제석 전날 대포를 쏘았다. 지금의 불꽃 놀이처럼 불화살을 하늘 높이 쏘아올리며 징과 북을 울렸다. 이는 대나, 즉 궁중 에 있는 모든 악귀를 쫓기 위한 행사였다. 전통적으로 설날 같은 명절에는 으레 고기를 많이 쓰기 때문에 삳달 그믐에 당연히 소나 돼지를 잡았다. 그러나 철종 5년인 그해 12월, 소를 일절 잡지 못하 도록 조정에서 영을 내렸다. 이는 오랜 흉년으로 전국적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호구책으로 밀도살이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제석 하루 이틀 전부터 소를 일절 잡지 못하게 했다가도 슬그머니 완화해서 정초에 백성들로 하여금 쇠고기를 실컷 먹게 하는 위무정책을 쓰기도 했으나, 워낙 밀 도살이 많아 아예 금지를 시켰다. 그래도 사대부 집이나 웬만한 중인 집에서는 쇠고기를 비밀리 사들여, 예나 지금이나 법령에 묶인 계층은 오직 서민뿐으로서 한동안 명절에도 고기맛을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절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즐거운 날이었다. 각 가정마다 다락.부엌.마루.방에다 등잔불을 밝혔다. 흰 사기접시 하나에다 실을 여러 겹으로 꼬아 심지를 만들고 기름을 부어 외양간이나 변소에까지 환하게 불 을 밝혀 집집마다 대낮 같았다. 그리고는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았다. 이를 경신 수세라 하였다. 이는 바로 12월 경신일에는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지켜야 복을 얻는다는 도교적 풍속이었다. 제야에 잠을 자면 두 눈썹이 모두 센다는 속담이 정말 밤을 꼬박 새우는 아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간혹 자는 아이가 있으면 밀가 루나 분을 발라 이튿날 거울을 보게 하여 놀려먹곤 하였다. 승업과 헤어진 이용후는 그날로 동대문 밖 그의 초옥에 당도하여 칩거하였다. 그의 집은 당시 놀이터로 유명한 흥인문외양유(동대문 밖 버드나무골) 너머 지 봉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집이래야 삐딱하게 기울어진 세 칸 방 촉옥이고, 허물어진 돌각담에 얼기설기 엮은 삽짝문이 전부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한데다가 문장이 좋아 진사과에 급제했으면서도 관직에 들어갈 마음이 없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으로 살고 있었다. 승업이한테 말한 것처럼 밑이 빠지게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래도 끼니를 굶지 않는 것은 동냥하 듯 얻어 오는 부인의 삯바느질에다가 안국동 누님이 동생 모르게 간간이 쌀말이 나 보내 주기 때문이었다. 이용후는 그러한 사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 다. 그런 형편에도 나 몰라라 하고 태연했다. 어떻게 입에 밥술이 들어오는지 아내에게 묻는 법도 없고 관심도 없는 위인이었다. 그래도 그의 아내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누님의 도움으로 연명하고 있음을 뒤늦게라고 알았 다가는 그 길로 당장 자취를 감추거나 누님과 연을 끊을지도 모를 위인임을 알 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남편한테 비밀을 감추고 있기도 마음이 편치 않고 장래가 막막하 여 살 도리를 마련하기를 권하면, 그의 대답은 늘 “우산각을 머리맡에 두고 사 는 사람이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하고 발끈해서 돌아낮는 사람이었다. “또 그 우산각을 들먹이십니까?”“어허, 이 사람이 ...?” 이쯤을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었다. 조신한 양반의 아내가 더는 각삭하게 굴 수도 없거니와 남편의 성미 를 잘 아는 터라 입을 봉할 수 밖에 없었다. 세종대왕 시절 정승을 지내던 유관이라는 사람이 흥인문 밖에 살고 있었다. 원테 청빈했던 그는 비가 올 때마다 지붕이 새는 바람이 방에다 우산을 펴 비를 가리곤 했다. 그의 청빈함을 알고 있는 세종은 그의 부음을 듣고 사흘 동안 조 정의 업무를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철시령까지 내려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후에 그가 살던 집을 우산각이라 불러 청빈의 대명사로 남겼다. 선조 때 이 우산각에 유관의 외가 쪽 후손인 전주 이씨 이희검이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는 호조. 형조. 병조 3조판서를 두루 지냈을 만큼 높은 벼슬이었으면 서도 그 또한 청렴하여 “입성은 몸을 가리는 것으로 족하고, 음식은 창자만 채 우는 것으로 족하다.” 할 만큼 욕심이 없었다. 청빈이 그에 그치지 않고 그의 아들 이수광이 이 집을 물려받아 살았다. 이조판서를 지낸 지봉 이수광은 일찍이 개화사상을 가져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학을 도입했으며, ‘지봉유설’이라는 책을 지어 서양의 문물과 천주교 지식 을 소개한 장본인이다. 청빈이 가풍으로 이어진 집안이었다. 후에 우산각이 임 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자 이수광이 이를 복원하고 비우당이라는 당호를 달아 청 빈의 표본이 된 유관의 뜻을 기렸다. 이용후가 바로 이수광의 후손이다. 선조의 청빈사상을 추앙하고 있는 이용후 가 관직에 몸담지 않고 재물에 욕심이 없음을 당연한 것이었다. 그가 한양을 등 지고 굳이 동대문 밖 지봉길목에 초옥을 얻어 사는 것도 조상의 청빈사상이 숨 쉬고 있는 비우당을 한시라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가세가 빈곤하여 가장으로서 처자식에게 옷가지를 따뜻하게 입히지 못하고 음 식을 배불리 먹이지는 못해도 양반의 체통은 절대 잃지 않도록 하였다. 뿐만 아 니라 어린 자식들로 하여금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엄한 교육을 시켰다. 그 가 비록 낭인처럼 외지를 떠돌아도 집을 나설 때는 반드시 어린 남매에게 <동 몽선습><동몽집요>나 <소학> 따위를 숙제를 안겨 철저히 익히도록 하였다. 그 만큼 가난과 사람의 본분은 구분하도록 교육하였던 것이다. “내일이 설이라는 건 알고 계십니까?” 이용후가 입을 딱 봉한 채 서책만 들 여다보고 있는 것이 답답하기도 하고 야속하여 그의 아내가 입을 삐쭉거리며 물 었다. “오늘이 섣달 그믐이니, 내일이 설임은 당연하지 않소.” “어린것들한테 설빔 한 벌을 제대로 해 준 적이 없어 민망해서 그럽니다. 체통을 중히 여기는 양반 집안에서 어린것들 대하기가 부끄러워서 원...” 그의 아내가 방골이 꺼져 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이용후가 아내의 바느질을 곁눈질하며 빙긋이 웃었 다. “왜 웃으세요?” “꼭 흥부 마누라처럼 푸념하니까, 내 웃을 수밖에. 빨아 입힐 옷가지도 없는 흥부네에 비하면 우리는 부자나 다름이 없소. 우리한테는 입던 옷가지 있으니, 부인의 훌륭한 바느질 솜씨로 지금 하듯 깨끗하게 다듬으 면 되지 않소. 아이들한테도 우리 살림이 결코 가난하지만을 않다는 걸 깨우쳐 야 하오. 그것이 자식을 가르치는 부모의 도리라는 말이오.” “입성은 그렇다 치고여, 매년 차례상은 또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상에 고깃국 한 번 올리지 못하 니, 조상한테 면목이 없어서 그럽니다.” “면목이 없기는 내가 더하오. 그러나 어쩌겠소. 재물 모으는 능력도 없는데다가 물려받은 재산이 없으니, 형편에 맞추 어 정성이나 다하는 수밖에. 우산각 어르신들을 생각하신다면, 부모님께서도 우 리를 그리 탓하시는 않을 것이오. 그러니, 너무 부끄럽게 생각지 마시오. 부인의 품삯으로 올린 차례상이니, 이해하실 떼니까.”“아전인수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런 말씀을...” 아내는 아픈 마음을 찔릴 때마다 일부러 벽창호 노릇을 하는 남편이 어처구니가 없어 그저 한숨이나 내쉴 뿐이었다. 밤이 이슥한데도 남매 경과 원이 잠을 자지 않고 연신 방을 들락날락하였다. 왜 자지 않느냐고 이용후가 묻자 눈썹이 셀까 봐 밤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이 용후는 어린것들이 귀여우면서도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것이 갑자기 애처로워 슬그머니 눈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사람 사는 일에 서러운 것이 이것저것 많겠지만 배고픈 서러움을 따를 만한 것이 또 있겠는가. 어미 젖도 제대로 빨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가장으로서 염치없는 중에도 아내와 아들놈 경한테는 늘 고 마웠다. 다행히 경이 태어나 대를 끊기지 않게 되었으니 조상한테는 일단 면목 이 선 셈이었다. 게다가 경이 총명해서 아비의 가르침을 잘 따를 것이 틀림없어 마음이 놓였다. 순간, 승업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비록 거렁뱅이 꼴이 더럽기 그지없는 아이었으나 하는 짓이 밉지 않았고 제법 총명한 구석까지 있어, 아쉬운 마음이 자꾸 드는 것이었다. 한양까지 오는 동안 미운 정까지 들어 버려 간간이 놈이 그립고, 안국동 누님 집에 눌러앉히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삳달 그믐 날 밤을 어디서 어떻게 보내고 있을지 궁금하고 안타까웠다. 이 엄동설한에 얼 어 죽거나 굶어 죽지는 않았는지... 당장 눈앞에 있는 어린 남매보다 놈이 더 애 처로웠다. 평소에 누님한테 밉상만 주지 않았어도 놈 하나쯤 머슴으로 떠맡길 수도 있었음을 생각하니, 이용후는 자신의 처지가 갑자기 한심스럽기도 하였다. “녀석이 굶어 죽지는 말아야 하는데...” 승업의 몰골을 계속 마음에 잡아놓고 있던 이용후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 섞인 말로 내뱉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남 편의 얼굴을 멀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도 잘 모르는 놈이오.” “잘 모르신다면서, 남 굶어 죽는 건 왜 걱정하십 니까?” “어찌 된 사연인고 하니...” 이용후는 비로소 며칠 전에 있었떤 승업 과의 인연을 아내한테 대충 설명하였다. 그러자 그녀가 대뜸 혀부터 찼다. 집안 식구들 걱정은 않고 웬 거렁뱅이 걱정이나 하고 앉았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참으로 딱한 양반이십니다. 지금, 여기저거서 굶어 죽은 사람이 쌓여 산을 이 루고 있다는데, 그 아이가 뭐 그리 대단합니까. 우리 아이들 꼴도 그 아이와 별 반 다를 것이 없는 처지인 줄 모르고 계셨습니까?” 아내가 드디어 악으라도 쓰 지 않고는 못 견뎌 하는 어조로 가쁜 숨을 삼키느라 안달을 하였다. 이용후는 아내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천장만 망연히 바라보았다. “우리 아이들한테는 부 모가 있고, 눈비 가릴 만한 집도 있고, 끼니도 거르지 않는데, 무엇이 걱정이오. 그 아이가 비록 밥은 빌어먹어도 무반의 자식인데다가 총명하니, 더욱 안됐다는 말이오. 그놈이 좋은 가문에서만 태어났어도 장차 인재가 될 법한데... 아니지, 놈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요. 그리하여 장차 세상 사람을 놀라게 할지도 모르 지.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범상치 않은 놈이거든.” “그런 아이라면 걱 정할 일이 없겠습니다. 장차 큰 인물이 될 터이니.”“...우리가 궁색히도, 그 아 이를 데리고 올 것을 내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소.” 이용후는 안타까운 마음을 차마 버리지 못해 끝내 후회하고 있었다. 옆에서 하는 야을 지켜보고 있는 그의 아내는 남펴니 갈수록 미웠다. 자신의 코가 석자나 빠져 있는 주제에 웬 거렁뱅 이 걱정에 묻혀 있는 모양이 한심스러워 애간장이 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 쉬워하실 걸 왜 떼어 버리고 오셨는지, 저도 안타깝군요.” “그렇게 비양거리지 마시오. 고목생화라는 말도 있지 않소. 메마른 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말이니, 보 잘것 없는 집안에서도 인물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오.” “허긴, 백옥이 진흙에 묻히고, 개똥밭에서도 인물이 난다고 했으니, 누가 압니까마는...” “<사기열전> 에 <자루 속의 송곳>이라는 고사가 있소. 춘추전국 시대 조나라에 재상으로 있 던 평원군이 식객 수천 명을 두었는데, 마침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지 평원 군이 초나라에 구원을 청하러 가는 사신으로 발탁이 됐소. 그래서 식객 중에 문무가 뛰어난 자 이십 명을 뽑아 데리고 가려는데 마땅한 자 한 명이 부족했어 요. 그러자 모수라는 자가 자진해서 나섰지. 평원군은 그를 눈여겨보지 낳았던 터라 잠시 망설이다가 생각난 것이, 원래 쓸 만한 인물이라 흡사 송곳이 자루 속에 들어 있는 것과 같아서, 그 끝이 곧 나타나는 법임을 깨달았대요. 그래도 평원군은 모르는 체하고 모수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내 집에 삼년이나 있으면서 내 눈에 뜨인 적이 한 번도 없지 않느냐 했지. 그랬더니 모수가 대답하기를, 저 를 자루 속에 넣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지 않았겠소. 평원군은 모수의 말이 자기 생각과 일치한 고로 그를 수행하게 됐지. 결국 모수는 초나라에 가서 외교적으로 큰 공을 세웠다는 말이오. 이처럼, 사람들 중에는 비범한 재주를 가 진 자가 있기 마련이오. 단지 그 기회를 잡지 못하여 재주를 사장시키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지.” “그럼, 그 승업이라는 아이가 모수와 같은 재목감이 란 말씀입니까?” “내가 보기엔 그렇소.” “그렇다면, 역시 우리가 걱정할 일 이 아닐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이오?” “그 아이도 평원군의 식객처럼 어느 집엔가 들어가, 모수 같은 인물로 재주를 인정받게 될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천만다행이지만...” “아무렴요. 그 염려가 어련하시겠습니 까.” 그의 아내는 남편의 쓸데없는 걱정이 밉기는 하면서도, 사람을 함부로 천 대하지 않는 바른 마음과 사람을 보는 그 안 목을 높이 보고 더는 비웃지 않았다. 정월 초하루. 조정의 의정부대신(행정부 최고기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이정)은 모든 관원을 대동하고 대궐에 나가 새해 문안인사를 드리고는, 신년을 하례하는 내용의 한문 서체인 전문과 시골에서 짠 거친 무명이나 명주 등의 소박한 정성을 전하는 표 리를 바친다. 그런 다음 왕이 있는 정전의 뜰로 가서 임금한테 하례를 올린다. 신년하례는 이들 의정부대신들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8도의 관찰사, 병마절도 사와 수군절도사, 각 주와 목사(지방 행정관리)들도 전물과 방물(지방 특산물)을 바쳤다. 또한 각 관처의 아전과 종들, 그리고 병여의 교졸(장교와 사병)등은 고을의 관 원이나 선생에게 종이를 접어 만든 명함을 들어간다. 그러면 그 집에서는 대문 안에 쟁반을 놓아 두고 명함만 받아들인다. 주인이 다른 곳에 하례가서 집에 없 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주인이 없는 집에 인사하러 갔을 경우, 선물과 명 함을 두고 가거나 방명록에 이름을 적어 놓고 나오는 것과 같다. 일반 가정에서는 여자들이 신년 벽두에 나들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대개는 하녀를 서로 보내 새해 문안인사를 나누었다. 이때의 하녀를 문안비라고 했다. 특히 사돈간의 하례에 이들 문안비를 잘 보냈다. 그 당시에는 모두가 민간신앙에 의존하여 새해 소망을 기원하거나 악귀를 쫓 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특히 신년 초에는 그러한 풍습이 필수적이었다. 새해 신 수를 점치는 것으로는 오행점(나무에다 금.목.수.화.토를 새겨 장기알처럼 만든 다음, 그것을 일시에 던져 얻는 점괘)을 많이 봤다. 그리고 악귀난 병마를 예방하는 방법으로는 벽에다 닭과 호랑이 그림을 붙여 액이 오지 못하도록 빌었는가 하면, 남녀가 일년간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상자에 넣어 두었다가 설날 황혼을 기다려 문 밖에서 태움으로써 나쁜 병 을 무리치는 방법도 썼다. 속담에 야광이라는 귀신은 설날 밤 인가에 내려와 아이들의 신을 두루 신어 보고는 발에 맞으면 곧 신고 갔다고 한다. 그러면 신을 잃은 아이는 그해가 불 길하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집집마다 아이들이 신을 깊이 감추고는 체를 마루 벽이나 뜰에다 걸어 두고 잠을 잤다. 그러면 야광신이 와서 체의 구멍을 세느라 고 신을 훔칠 생각을 잊게 되고, 그러다가 닭이 울면 귀신이 허둥지둥 도망가 버린다고 믿었다. 초이튿날. 이용후는 남산골에 사는 장인 장모한테 세배하러 일찍 집을 나섰다. 마음으로 는 아내도 친정 부모가 보고 싶겠지만 정초에 양반집 부녀자가 거리에 나서는 법이 없는지라 세배는 늘 이용후 혼자 갔다. 장인 박 생원은 학문도 있고 의기도 있으나 안동 김씨 세도 편승할 기회를 얻 지 못해 평생을 무벼슬로 지내는 전형적인 샌님이었다. 무남독녀 딸 하나 있는 것을 이씨 가문으로 출가시키고는 내외만 남아 매우 궁색하게 사는 중이었다. 정초에 사위가 세배를 와도 씨암탉 한 마리 잡아 줄 수 없는 살림이라 이용후는 갈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위랍시고 생선 한 마리 사 들고 갈 형편이 못 되는 마음이 천근 만근이었다. 그의 아내도 남편의 마음을 알아 차례상에 올랐 던 전 몇 쪽이라도 인편에 보내고 싶지만 그걸 사내한테 들게 할 수가 없어 그 저 한숨만 폭폭 내쉬고 말았다. 동재문 안으로 들어선 이용후는 남산골로 빠지는 길로 가지 않고 청계천으로 휘었다. 청계천 양 둑에 조성된 모래산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개천 또는 청풍계천으로 불리었던 청계천은 서울의 복판을 동서로 흘 렀다. 이 하천은 동대문과 광화문 사이에 만들어 놓은 오간수문(쇠창살로 다섯 개의 구멍을 만들어 그 사이로 물이 흐르도록 한 문)을 지나 중랑천에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렀다. 영조 때 이 청계천을 준설하기 위해 인부 20만여 명이 동원되 었고, 이때 퍼낸 모래를 하천 양 둑에 산더미처럼 쌓아 인공산이 되는 바람에 가산이라 불렀다. 조선 초기부터 한양 거지들이 여기 가산에다 땅굴을 만들어 집단으로 거주하 였는데, 이들을 일명 땅꾼으로 불렀다. 이들 거지들은 사대부나 부잣집에 경조사 에 으레 나타나 잡배들의 행패를 막아 주기도 했고, 상여가 나 갈 때는 온갖 궂 은 일을 도맡아 그 대가를 챙겼다. 이용후는 승업이 혹시 이들 거지 소굴에 들어가지는 않았을까 해서 그 꼴을 볼 겸 나선 것이다. 설사 그가 거지패에 들어 있다고 해서 당장 구제해 줄 방책 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오직 궁금하여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수백 명에 이르는 거지들 틈에서 승업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 거지들은 대개가 전과자로서 법도 두려워하지 않는 개망나니들로 누구한테 도 안하무인으로 대하였다. 때문에 이용후도 그들 소굴을 함부로 기웃거릴 수가 없었다. 섣불리 말을 붙였다가는 망신당하기 십상이었다. “말 좀 묻겠소이다. ” 이요후는 한 늙은 거지한테 다가가 조심시럽게 말을 걸었다. 양반 체면으로 는 “...묻겠네.”로 하대를 해야 옳지만 차마 말을 놓지 못하였다. 그러자 거지 가 대뜸 눈을 치뜨더니 이용후를 시답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행색으로 보아 상대방을 보잘것 없는 중인쯤으로 단정하는 눈치였다. “물어 봐.” 오히려 거지 가 하대를 하였다. 이용후는 금세 욕지기 가 올라올 지경으로 불쾌했으나 차마 시바를 걸 수가 없었따. 이미 늙은이 주위에 험상궂은 젊은 거지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겁이 덜컥 솟으면서 볼에 닭살이 돋는 것이 느꼈다. “여 기에 혹시, 황해도 말씨를 쓰는 아이가 왔는가 해서 왔소이다. 성이 장가에다가 승자 업자를 쓰는 아이오만.” “황해도 말씨를 쓴다...? 애들이. 그런 놈 본 적 있어? ” 늙은이가 얼굴을 돌려 주위 거지에게 묻자 “못 봤어요.” 하고 일제 히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왔다고 누가 그래?” “혹시나 해서 온 것이오.”“ 그놈을 왜 찾아? 애비 되남?” “아니오, 잠시 만난 적이 있을 뿐이오.” “그런 게 아니오. 잠시 인연을 맺은 터라, 행방이 궁금할 뿐이오.” “인연을 맺었다... 그럼, 놈이 이리로 오믄 어떻게 해? 누구를 찾아가라고 해 ? 보아하니, 세도 있 는 양반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됐소. 연이 닿으면 또 만나겠지.” 이요후는 거지들과 더는 대거리하기 실허 서둘러 소굴을 빠져나왔다. 잠깐 머 물렀던 시간이 마치 며칠을 보낸 것만큼이나 고역스러웠다. 보잘것없는 양반임 을 알고 집단으로 행패를 부릴까 싶어 내내 긴장했었다. 말 붙인 상대가 늙은이 라 그만 했지. 만약 우두머리 격인 “꼭지딴”이었으면 상황은 훨씬 달랐을 것 이다. 그들 세계에서 꼭지딴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로 하여금 거지들의 기강을 잡게 하는 지휘권을 줄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특권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장안 의 내의원이나 지금의 진료소 격인 혜민원에서 약재로 쓰는 뱀, 지네, 두더지, 두꺼비 따위를 잡아다 주고 보수를 받거나, 심지어는 세도가들이 정적의 행동을 염탐할 필요가 있을 경우 이들 꼬지딴을 시켰으므로 일조의 사설탐정 노릇도 하 였다. 뿐만 아니라 미꾸라지를 잡아 추어탕을 끌혀 팔도록 하는 이권까지 따내 이들 의 추어탕은 한때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이용후는 승업의 행방이 그래도 궁금하여 이번에는 광화문에서 무악재 사이로 즐비한 나무시장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승업과 헤어질 때 그에게 나무라도 해 다 팔면 굶기는 면할 수 있다는 말을 해 준 기억이 났던 것이다. 아직 머슴 일 도 못하고 거지 소굴에도 없다면, 천상 나무를 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승업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 나무시장은 상권을 따낸 한 부호가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개인이 끼여들 수가 없었 다. 그랬다가는 부화와 밀착돼 있는 꼭지딴한테 봉변을 당하기 일쑤였다. 만에 하나 승업이 거기에 끼여있다면 하역이나 돕고 몇 푼 얻어 내는 것이 고작일 것 이다. 당장 승업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은 이용후는 남산골로 맥없이 발길 을 돌렸다. 황해도에서 한양으로 오는 도중<긴난봉가>와 <병신난봉가>를 신나 게 부르던 승업의 능청스런 모습이 갑자기 눈에 삼삼해 콧등이 저려 왔다. 부모 를 일찍 잃어 날마다 춥고 배고픈 생활을 하면서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어떻 게든 살아남을 궁리만 짜고 있는 어린 소견이 마냥 대견하였고, 그에게 마음을 더 썼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이놈이 대체, 어디에 처박혔는지 원... 4 막 동이 트려는 시각에 박 서방은 대감 내외가 거처하는 침방과 사랑방에 이 미 군불을 넣고는 부리나케 행랑채로 내려와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 머슴들을 흔들어 깨웠다. 늘 새벽잠이 아쉬운 머슴들이라 입만 쩝쩝거릴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박 서방이 내처 볼기를 찰싹찰싹 때리는데도 한결같이 요지부동이었다. “이놈들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줄 몰라?” 박 서방이 돌아가며 코를 냅다 비 틀었다. 그제서야 오만상으로 하나 둘씩 허리를 세웠다. “해가 워디 떴다구 그 려유? 아적 동두 안 텄구만. 노인네가 잠이 없으니까 괜히 우리덜만 들볶는구먼. ” “누가 아니래.” “잠 좀 실컷 자 봤으믄 원이 없겠네.” 머슴들이 저마다 입을 대짜로 내밀어 툴툴거렸다. 그러자 박 서방이 비를 들어 등짝을 한 대씩 후려쳤다. “이놈들아. 대감마님 기침하신 지 한참 됐어. 마님 납시기 전에 집 안팎으로 비질하는 거, 몰라서 그려? 어여들 냉큼 일어나. 만득이는 부엌에 물 길어다 붓고, 덕쇠는 장작 날려야 혀. 영구는 서둘러 되련님들 방에 군불 때구, 손님방에두 장작 몇 개비 넣어. 칠성이는 대문 밖 쓸고, 말끔허게 쓸어야 혀. 낭 중에 집사헌티 혼쭐나지 말구.”“식객덜이 뭔 손님이래유? 빈대도 콧등이 있다 고, 인간덜이 염치가 있어야지. 허구헌 날 늘러붙어서 밥이나 축내구 있으니 원...” 덕쇠가 공연히 나서서 제 밥 축내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씰룩거렸다. 그 러자 만득이가 눈을 부릅떴다. “그 사람덜이 네놈 밥을 축냈어? 으쨌그나 다 양반들이니께, 조둥이 함부로 놀리지 말어. 말이 새서, 대감마님 귀에라도 닿는 날이믄 네놈은 그날로 뒈지는 줄 알어.” “쳇. 양반두 양반 나름이지. 벼슬 없 고, 재산 없으믄 말짱 헛 거여.” “저눔이 그래도...? 그라믄, 이 진사 어른하테 두 그딴 소리 할껴?” “그 어르신이야 저 사람덜이랑 엄청 다른 분이지유.” “입들 다물어. 꼭두새벽부텀 웬 휜소리여?” 박 서방이 듣다 못해 소리를 지르 고서야 머슴들이 하품을 해 대며 버선을 신는다, 볼끼를 동여맨다 하며 한동안 부산 떨었다. “젠장, 왜 이렇게 춥다? 이 방에다 새벽 군불을 때야 허는디.” 제일 나이가 어린 영구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구두덜거렸다. 그러자 만득이가 영구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이 빌어먹을 놈아. 이 방에 네놈보다 아랫 것이 있는지, 눙깔 좀 부릅떠 봐라. 진작에 일어나 되련님들 방에 군불을 넣었어 야 되잖아. 그리구서, 우리 방도 따습게 해야지. 곁머슴 주제에, 머시 으째? 밥이 나 웬만큼 처먹어야지.” “아자씨는 으째서 날 못 잡아먹어서 난리래우?” “ 어어ㅏ? 이 자석, 으른헌티 능깔 치뜨는 것 보래?” 만득이가 대뜸 주먹을 높이 쳐들자 영구가 삿대질만 빼고는 “내가 밥을 많이 먹으믄, 아자씨 밥 먹어우?” 하고 턱을 바싹 쳐들었다. “저눔 자석이 꼬바꼬박 말대꾸허내? 웬만큼 터먹어 야 말을 않지. 뱃속에 거지가 몇이나 들앉았는지 원... 일이나 잘허믄 밉지나 않 지.”그러자 박 서방이 손바닥으로 만득이 잔등을 냅다 갈겼다. “똑같여, 똑같 여. 니잇살이나 먹은 놈이 눈꼽두 안 띠구서 아랫것들이랑 입씨름이나 허구...” “영감님두 그러시는 거 아녀우. 이왕이믄 아랫것을 혼내야지, 왜 저만 가지구 야단친대유?” “시끄러워. 어여들 나가. 헐 일이 태산 같은디, 마냥 이러구 있 을껴? 영구부텀 싸게 나가. 되련님들 고뿔 드시게 않게 해야 혀.” 비로소 머슴 들이 “어이구 춰, 어이구 춰.”하며 하나 둘 방을 빠져나갔다. 새벽마다 치러야 하는 행랑방 소란이었다. 잠시 후 박 서방 귀에 큰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웬일로 칠성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눈을 흰자위로 가득 씌우고는 “아 자씨,아짜시.”만 되풀이할 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이놈이 웬 방정야? 하 라는 비질은 않구.” “큰일났시유.” “...큰일났다니, 뭐가?” “저를 따라와 보 세유. 대문 밖에..” 칠성이가 자초지종은 빼 놓고 박 서방 소매만 막무가내로 잡아 끌었다. 박 서방은 박 서방대로 의구심이 들어 선뜻 따라가지 못하고 엉덩 이를 뺐다. “도깨비헌티 불벼락을 맞었나, 웬 지랄여? 이 팔 놓지 못혀?” “바 깥에 사람이 죽어 있시유.” “뭣이 으째? 사람이 죽어?” 그제서야 박 서방도 칠서이 뒤를 쫓아 걸음을 날렸다. 사람이 죽어 있다는 말에 바싹 긴장하였다. 근 간에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사람이 많다는 소문에다가 개중에는 세도 있는 사대 부 집 앞에서 죽는 사람이 종종 있다는 얘기까지 들어 온 차에 겁이 덜컥 났다. 더구나 대감 등청길을 가로 막는다 싶어 걱정이 금세 태산처럼 커 갔다. “에 그... 하필 대감댁 앞에서, 이게 뭔 흉칙헌 일이라냐?” 칠성이 말대로 웬놈이 거 적에 둘둘 말린 채로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박 서방이 엉덩이를 잔뜩 빼고 는 발끝으로 거적을 툭툭 쳤다. 정말 죽은 놈이로구 나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거적은 미동은 하지 않았다. “죽은 것이 틀림없다닝께 유.” “몸피가 으른 같기도 허구, 애들 같기두 허구... 죽었는지, 확인은 혀봐야 되겄지?” “가마니를 열어 보세유.” 박 서방은 비로소 거적 끝을 겨우 잡아 살며시 열었다. 그러자 그 안은 어른은 아닌 것 같은 걸인이 잔뜨기 웅크린 채 꼼짝오 않고 있었다. “...죽었이쥬?” “가만...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다.” “ 그려유?” 박 서방이 주의 깊게 들여다보니 숨이 아직 끊어진 것은 아닌 듯 간 간간이 어깨를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틀림없이 오랜 굶주림에다 얼어 죽기 직 전인 것 같았다. 박 서방이 재빨리 몸을 낮춰 걸인의 코에다 귀를 갖다 댔다. 숨 소리가 아주 가냘프게 새나오고 있었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 칠성아, 너는 어 여 행랑태 뒷방에다 불 좀 지펴라.”“이런 거지를 들이게요?” “잔말 말고, 어 여 들어가 불이나 지피라니께.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어야 헌다. 내당마 님 모르시게 해야 돼.” 박 서방은 서둘러 걸인을 들러메고 다른 사람 눈에 띄 지 않도록 살그머니 행랑 뒤채로 숨어들었다. 봉두난발이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는데다가 황망해서 웬놈인지 미처 확인할 새가 없었다. 그가 누구인자 알아 내는 것보다 우선 목숨부터 살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 다. 놈은 오래도록 깨어나지 않았다. 몸에 박힌 얼음이 빠져나가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박 서방은 놈의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쓸어올리고 얼굴을 자세히 뜯 어보았다. 아니, 이놈이...? 뜻밖에 그는 얼마 전 이 진사를 따라왔던 바로 그 거 지였다. 박 서방은 놀란 가운데 갑자기 난감했다. 놈이 머슴자리를 구하지 못해 여태 떠돌다가 다시 찾아왔는가 싶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서 떼를 쓰려고 온 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하자 갑자기 부담스러웠다. 승업은 조금씩 의식이 들면서 자신이 전혀 낯선 곳에 누워 잇음을 서서히 깨 닫기 시작했다. 더구나 어느 집 처마 밑도 아니고 굴뚝 곁도 아닌, 어엿한 방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고는 화들짝 놀라 등짝을 세웠다. “...내가 어드렇게 여게 와 있시요?” 승업은 자신이 뜨거운 방에 누워 이불까지 덮고 있었음을 새삼 깨 닫고는 송구스러워 안절부절못하였다. “이제야 정신이 드는 모양이구먼. 네놈이 아예 죽을라구 작심을 했던겨. 이놈아. 이 엄동설한에. 거적때기 하나로 견딜 줄 알았어?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거적송장이나 다름 없었단 말여. 사람 눈에 띄었 으니까 망정이지...” 박 서방은 승업의 입술에 마른 딱지가 하얗게 덮인 것을 보고 머리맡에 놓아 둔 물대접을 승업한테 내밀었다. 승업이 대접을 받아들자 물에 환장한 사람처럼 들이켰다. “...아저씨. 고맙습네다. 너무 추워서, 내가 살 았는지 둑었는지, 까맣게 몰랐댔시요.”“죽어 가는 마당에, 네노이 그걸 알었겄 어? 대체, 여긴 왜 또 온겨?” “...너무 춥고 배가 고파서, 나도 모르게 왔시요. ” “굶어 죽거나 얼어 죽기 십상이구나.” “어리신. 미안하디만 찬밥 한 덩이 만 주시라요. 벌써 사흘을 굶었시요.” “이딴 세상에0, 차라이 죽는 게 나을지 모르지... 잠시 기다려라. 이 사람 저 사람 눈이 많은 집이니께, 내 눈치껏 얻어 오마.” “고맙습네다, 어르신.” “그 대신, 죽은 듯이 있어야 되는겨. 알았냐? 행여, 내당에서 알었다가는 내가 경을 치게 되니께.” “염려 놓으시라요. 그딴 눈치는 있습네다.” 박 서방이 서둘러 방을 나가자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칠성이 가 발소리를 죽여 들어왓다. 그리고는 다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승업을 내려보 녀 “이 자석이 여태 죽었나?” 하며 발로 승업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승업이 능청을 부려 살며시 눈을 떴다. “...살았구나. 임마. 너는 나 아니었으믄 이 댁 대문 밖에서 꼼짝없이 얼어 죽었을 거다.” “기럼, 형님이 처음 봤댔시요?” “ 그래, 임마. 처음엔 송장인 줄 알구서, 을매나 놀랬는지 알어? 으쨌든, 박 서방 아자씨가 아니었으믄 너는 저 세상으루 갔을 거다.” “살려 줘서, 모두 고맙습 네다. 형님은 이 딥 머슴이야요?” 승업은 자기보다 몇 살 위인 것으로 보이는 칠성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마른침을 자주 넘겼다. 마치 이마에 벼슬을 붙이고 있는 것처럼 칠성이를 우러러보았다. “나도 너처럼 거렁뱅이짓을 하다 가, 이 댁 머슴으루 들어왔어.” “거렁뱅이 하다가, 어들렇게 머슴으로 들어갑 네까? 재수가 좋았습네다.” 승업은 칠성이처럼 재수 좋은 운수를 가지지 못한 팔자가 한스럽기도 하였다. 팔자라는 것은 원래 타고난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어 왔지만 어째서 칠성이와 같은 팔자를 업고 태어나지 못했는지 갑자기 억울 하였다. “너 몇 살이냐?” “열세 살 됐시요.” “나보다 네 살이나 아래구나. ”“내래 형님으루 삼갔시요.” “그래봤자 소용없어. 이 댁에서 너를 머슴으로 써 주셔야 말이지.” “이 댁에서는 머슴이 더 필요하디 않습네까?” “그걸 내 가 어떻게 알겠니. 내당마님이 정하실 일인데. 나도 사실은 박 서방은 아자씨가 데리구 온 거야.” “기럼, 그 영감님한테 잘 보이믄 머슴이 되는 겁네까?” “ 그런 게 아니라, 마침 잔심부름할 아이가 필요했던 거야. 그때 마침 내가 눈에 뜨인 거지.” “...기랬구만요, 나는 거저 방에서 잠자고, 밥이나 실컷 먹었으믄 원이 없갔시요.” “거지 노릇 할 때는 누구나 그렇지. 나도 그랬으니까 뭐... 젠장헐, 대갓집에서 밥이 지천인데, 굶어 죽는 사람이 많다니...” “굶어 죽은 사람, 숱하게 봤시요. 그때마다 무서워서 혼났시요.”“그러니께, 천민으루 태어 나믄 말짱 헛거여. 대갓집 개만도 못하니께.” “형님 말이 맞아요. 며칠 굶을 때는 개밥이라도 훔쳐먹구 싶었댔시요. 그렇디만, 개가 가만 있어야디요.” “하 긴...” 박 서방이 다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바가지가 들려 있었다. 그가 바가지를 내밀자 승업이 발딱 일어나 바가지를 빼 앗듯이 껴안았다. “칠성이는 여기서 뭐 하는겨? 되련님 세숫물 들여놓지 않구 서.” “이놈이 살아났는지 보려구 왔다가, 그만 깜빡했구먼유.” “이런 경을 칠 놈이 있나. 냉큼 나가 봐.” 칠성이가 물살처럼 방을 빠져나가자 박 서방은 밥을 허검지겁 먹고 있는 승업에게 눈길을 내려놓았다. 부엌 여자들이 별다른 눈친 못 채게 시래깃국에다 찬밥을 가득 말아서 고양이 걸음으로 품고 왔다. 승업은 밥을 먹는다기보다 차라리 삽으로 퍼 넣는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았 다. 자칫 볼이 터지고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이놈아. 뺏어 먹을 사람 없으니께, 천천히 먹어. 체하면 약까지 줄 형편이 아니니께.” 그런데 도 승업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정신없이 쑤셔 넣었다. 박 서방 보기에 저러다 체하기 십상이다 싶어, 바가지를 잠시 빼앗을까도 생각했으나 오죽 배가 고팠으 면 저럴까 해서 망연히 발보기만 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바가지 가득한 걸 홀랑 먹어 치웠다. 그리고도 부족해 서 혀를 내밀어 얼굴을 바가지에 처박았다. “이자 좀 살 것 같습네다.” 승업이 바가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비로소 이를 드러냈다. 박 서방은 잠시 초점 잃은 눈 길로 승업을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배고팠던 시절이 떠오르면서 눈물 을 글썽거렸다. “...배고픈 서러움을 무엇에다 비하겄냐. 그 서러움이라니...” “ 살려 주셔서, 정말 고맙습네다.”“그건 그렇구, 이젠 어쩔 셈여? 네놈을 더 둘 수가 없단 말여.” “...이 딥에선 머슴이 더 필요 없습네까?”“답답허긴... 접때 이 진사 어른헌티 말씀 못 들었어? 내당마님이 한번 안 된다고 하시면, 절대 안 되는겨.” “기렇다믄 할 수 없구만요.” 승업이 금세 낙심하여 비틀린 닭 모가 지처럼 고개를 떨어뜨렸다. 불쌍한 마음 같아서는 내당마님한테 청을 넣고 싶지 만 원체 지엄한 어른이라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늙은 몸을 데리고 있는 것 만도 감지덕지한 판에 남 불쌍한 형편을 말할 염치가 없었다. 더구나 친동생이 넣은 청을 거절한 사람이 일개 머슴의 말을 들어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내당마 님이 인정 많기로는 하늘도 알고 있지만, 반면에 사람을 쓰고 부리는 일에는 엄 격하기가 칼날 같고 때로는 얼음장처럼 냉정했다. 하인을 다스리는 사대부 집 안방마님들이 대개 그렇지만 특히 이 댁 마님은 공과 사과 분명했다. “네놈헌 테는 안됐지만, 날이 더 밝기 전에 여기를 떠나야 되겠구나. 더 있다가는 내가 처신하기 어려워. 내 말뜻을 알아듣겄냐?” “...네.” “물이나 마저 마시고, 곧 장 떠나거라.” “한 가지 물어 보갔시요.” “...뭘?” “지난번 그 진사 어른을 어디로 가믄 뵐 수 있습네까?” “왜? 그분이 너를 거둬 주실까 해서?” “꼭 기래서는 아닙네다. 거저, 뵙고 싶어서 기럽네다.”“네놈 뜻은 알겄다만, 그분 마음을 약허게 해서는 안 돼. 네가 몰라서 그런다만, 살림 궁색하기가 이를 데 없는 분이시다. 그런 댁에 네가 나타나믄 그분 마음이 을매나 아프시겄냐. 가뜩 이나 정이 많으신 분인데.”“ 거저 멀리서 어르신 얼굴이나 한번 뵈었으믄 좋 갔시요.” 승업이 내내 울먹울먹 하더니 기어이 눈물을 쏟아 놓았다. 어린 것이 얼마나 인정이 그리웠으면 저럴까 싶어 박 서방도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 네 마음은 안다만,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게다.” “절대루 그분을 귀찮게 하지 않을 기야요. 맹세하갔시요. 거저 멀리서 얼굴만 뵙구서 곧장 떠나갔시요. 제가 굶어 죽거나 얼어 죽으믄, 그분을 다시는 뵙지 못하잖습네까. 저한테는 하늘 같 으신 어른이대서 기래요.” 승업은 박 서방한테 바싹 다가가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애처롭게 간청하였다. 마음 약한 박 서방이 한참 망설이다가 몇 번이 고 다짐을 받아 낸 후에야 이 진사가 사는 곳을 일러 주었다. “정말이지, 그 어 른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 그분이 당신 식솔한테는 무심하셔도, 남 불쌍한 꼴 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신 분이니께 허는 말여. 한동안 네놈을 끔찍하게 생 각허신 분 같아서, 내가 걱정이 되는겨.” “염려 마시라요. 절대, 앞에 가서 인 사하지 않을 기야요.”“꼭 그래야 한다. ” 박 서방은 승업을 내몰다시피 하여 대문 밖으로 끌어내고는 그 사이에 헌 솜 버선 한 켤레와 휘양(머리와 얼굴 일부를 가리는 쓰개)을 준비하여 박 서방이 억지로 품에 넣어 주었다. 그러자 승업이 고개를 숙여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 렸다. “쫓아낸다고 서운해 하지 말어. 내 처지가 그러니께.”“아닙네다. 너무 고마워서 기래요. 정말 고맙습네다. 이 은혜는 평생 잊디 않갔시요.”“내 마음 을 알아주니 다행이다. 어여 가거라.” “...기럼, 안녕히 계시라요.” 승업이 갑 가지 무릎을 꿇더니 박 서방한테 큰절을 올렸다. 박 서방은 황망히 승업을 세워 등을 밀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보지 않고 재빨리 문을 닫아 걸었다. 박 서방이 일러 준 대로 승업이 서둘러 동대문 길로 들어섰다. 먼발치에서나 마 이 진사를 꼭 보고 싶었다. 그와 헤어진 이후 하루하루가 여삼추로 느껴질 만큼 고생스러웠고, 그때마다 인정 많던 이 진사 그리웠다. 죽은 어머니보다 그 의 얼굴이 더 자주 떠오르는 것이었다. 머슴으로 들어가기란 생각보다 휠씬 어려웠다. 어느 집이든 문전 박대만 할 뿐 승업의 사정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툭하면 걷어차거나 물벼락이었다. 제 놈들도 고작 하인인 주제에 마치 주인이나 되는 양 거드름을 피우며 냉대하였 다. 거적을 둘둘 말아 등에 지고, 쪽 떨어진 바가지와 숟가락 하나를 허리춤을 매달고 다니는 꼴이라 굳이 대접받을 생각도 없었다. 그렇더라도 있는 집에서 찬밥이라도 한 덩이 던져 주면 고맙겠는데 발길질이 고작이었다. 그런 박대는 시장 국밥집도 마찬가지고 주막도 똑같앗다. 승업이 나타나면 마치 문둥이 대하 듯 몰인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아직 굶어 죽지 않았던 것은 때때로 국밥집 과 주막에 물을 길어다 주고 밥 한술 얻어먹은 힘으로 버텼기 때문이었다. 그렇 게 서러움을 당할 때마다 이 진사가 으레 부처님 얼굴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와 같은 따스한 인정은 어디에서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어찌 그립지 않겠 는가. 이 엄동설한에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를 운명이라 죽기 전에 어떻게 든 이 진사를 꼭 만나야 했다. 동대문으로 가는 길을 종로로 빠질 것을 잘못 들어서 청계천을 끼고 가는 바 람에 더 많이 걸었다. 청계천 둑 곳곳에 말로만 듣던 가산이 거대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이 모래산에 장안 거지가 다 모여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승업 은 그 앞을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이곳 거지들이 텃세가 심해서 눈에 거슬리면 무조건 잡아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린다는 소문을 들었다. 차라리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망정 놈들한테 개 꼴로 죽기는 싫었다. 이때, 둑 저만치에게 거지 한 패거리가 장타령을 부르며 다가오는 것이 눈길 에 잡혔다. 승업은 겁이 스르르 나기 시작했다. 순간, 길을 잘못 들어섰구나 싶 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다른 길로 꺾을 수도 없었다. 승업은 재빨리 둑 아래로 내려가 몸을 납작하게 숨겼다. 그들 눈에 띄지 않으 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 요행은 승업을 지켜 주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패거 리가 걸음을 멈추더니 그 중 하나가 돌을 냅다 던졌다. 그래도 승업이 죽은 듯 이 엎드려 있자 “이 새끼야. 냉큼 올라오지 못해?”하고 돌을 또 던지는 것이 었다. 승업이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그들을 올려보았다. 눈어림으로 열 명은 될 것 같았다 결국 여기서 죽는구나 싶었다. “...나 말이야요?” 승업이 짐짓 주위 를 둘러보며 능청을 떨었다. 그러자 한 놈이 뜻 모를 욕을 퍼부으면서 또 돌을 던졌다. 더 버틸 수가 없어 승업은 거적을 둘러멘 채 둑으로 올라갔다. “이거, 어디서 굴러온 개뼉따구지...? 야. 너 어디서 왔어?” “...집이 없시요.” “물론 집이 없겠지. 내 말은 어디서 빌어먹다가 왔냐, 이거지.” “...기냥, 여게적 떠돌 아다녔시요.” “그래? 여긴 왜 왔어?” “동대문으로 가는 길이야요.” “거기 에 누가 있는데?” “...동대문 밖에 사는 이 진사 댁에 가는 길이야요.” “이 진사가 뭐 말라 비틀어진 놈인데?” “기냥 아는 사람이야요.” “거렁뱅이 주 제에, 제법 양반을 만나러 간다..?” 그러자 그 중에 나이가 제일 어려 보이는 놈이 나서더니 “가만...”하고 승업을 돌려 세워 위 아래르 ㄹ자세히 훑었다. 그 리고는 느닷없이 고향을 물었다. 황해도라고 하자, 갑자기 그가 반색을 하는 것 이었다. “형님, 혹시 지난번 그 중치막 입은 사람이 찾던 놈 아닐까요?” “중 치막 입은 사람이라니?” “며칠 전, 황해도 말씨 쓰는 아이를 찾는다는 사람 있었잖아요.” “...있었지.” “이 새끼가 바로 황해도 놈이잖아요.” “말을 들 어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야, 네 이름이 뭐냐?” “장승업이야요.” “틀림 없구나. 그때, 그 사람도 장 무엇이라고 했어... 그 사람이 너한테 뭐가 되냐? 혹 시, 애비 아니냐?” “아니야요. 우리 아바지는 죽었시요.”“그럼, 친척이냐?” “그 사람, 양반야?” “...진사 어른이야요.” “진사람년, 양반은 양반이로구나. 양반 꼴이 어째 그 모양이지? 그 꼴에 정말 양반이라면, 끈 없는 갓이나 마찬가 지지.” 거지 주제에 양반을 비웃고 있는 놈들이 우스웠으나 승업은 내색하지 않고 가만 있었다. 잠시 그들끼리 무엇인가 귓속말을 나누더니 갑자기 승업의 덜미를 움켜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왔던 길로 승업을 끌고 갔다. “놔 주시라 요.” “잔말 말고 따라와. 네놈 써먹을 일이 생겼어.”“내래 잘못한 거 없시요. 놔 주시라요.” “입 봉해. 확 찢어 놓기 전에.” 덜미를 잡고 있던 놈이 느닷 없이 승업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승업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자 다 른 한 놈이 엉덩이를 찼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때리냐고 항변하자 승업이 차고 있던 바가지를 빼앗아 머리를 강타했다. 그 바람에 바가지 박살이 나 조각 조각 흩어졌다. 5 남산골을 빠져나온 이용후는 곧장 명례방 가는 길로 들어섰다. 명례방을 임진 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북달재’혹은 ‘북고개’라고 불렀다. 이곳에다 북을 매달아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조정에 직언할 사람이 있으면 이 북을 두드려 자 신들의 뜻을 상달하던 곳이라 해서 그렇게 불렀다. 그러다가 후에 종현으로 불 리었다. 이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북달재에다 진을 치면서 남대문에 걸 려 있던 종을 이곳에다 옮겨 단 후부터 이름이 바뀌었다. 이용후는 종현을 지나서 둔덕 아래 한 폐가를 바라보며 잠시 걸음을 멈추었 다. 그 집은 정조 때 역관으로 있으면서 열렬한 천주교 신자였던 김범우가 살던 집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벽과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3형제와 권일신 등 수십 명의 신자들을 모아 놓고 천주교 교리를 설교하며 예배를 보던 곳이었 다. 결국 관헌에 발각되어 모두 잡혀갔다. 이때 양반과 명문 출신은 감히 문초하 지 못하고 방면했으나, 중인 계급이었던 김범우만 혹독한 고문을 받고 단양 지 방으로 유배당해 죽고 말았다. 이때부터 조정에서 천주교를 사학으로 몰아 활동 을 금지시켰고 박해가 시작되었다. 결국 김범우는 조선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그의 집 역시 조선 최초의 천주교 교회가 된 셈이어서, 명동성당도 이러한 뜻을 받들어 현재 위치에 세워진 것이었다. 이용후는 한숨을 내쉬며 김범우 집을 망연히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려 언덕을 올라갔다. 둔덕 중간중간에 하나같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가옥이 폐가의 모습으 로 들어앉아 있었다. 그런 집에 사람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 로 낡고 허물어져 밤에는 결국 귀신이나 들락거릴 것이 틀림없다는 단정을 내리 는 데 부족함이 없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런 집에 남산골 샌님처럼 벼슬 없이 지내는 청렴한 선비들이 살고 있음을 생각하면 결코 경멸해서는 안 될 집들이었 다. 우산각에 살았던 유 관이나 이수광, 그리고 한때 남산골에서 살았던 고산 윤 선도의 누옥을 생각하면 감히 고개를 세우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이용후는 그 들의 삶을 생각할 때마다 늘 과분하고 부끄러웠다. 이용후는 둔덕 너머 울타리도 없는 초가에 닿자마자 헛기침 한 번으로 대뜸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년 내내 햇빛이 닿지 않을 음지에 박혀 있는 초옥이었 다. 방 안에는 이미 남정네 대여섯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의 입성 은 비록 초라한 꼴이지만 이용후를 보자 바르게 예의를 갖춰 맞이할 만큼 도리 에 어긋남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먼 길 다녀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별고는 없으셨는지요.” 그들 중 상좌에 앉아 있던 중노인 김후안이 이용후에게 아랫목을 내주며 물었 다. 이용후는 그에게 먼저 큰절로 예의를 갖추고는 한쪽으로 비켜 앉았다. 김후 안은 순교한 김범우의 후손으로서 열렬한 천주교 전도자 중 하나였다. “오는 길에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았을 뿐이지, 다른 고생이야 뭐...” “그래, 황해도 사정은 어떠하던가요?” “근간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완화됐다고는 해도, 제가 보기에는 교리에 대 해서 무지한 관원들이 많아 박해는 여전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천주님을 향한 마음은 모두가 일편단심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지요. 그래, 안 베드로 신부님은 만나 보셨습니까?” “웬걸요. 아직도 평안도에 머물고 계시답니다.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 이겠지요. 저도 더 지체할 수 없는 형편이라, 뜻만 남겨놓고 왔습니다.” “관원들의 감시가 여전한 모양이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뜻을 분명하게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신 부님이 당도하시는 대로 무슨 기별이 있을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기별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도리가 없겠군요. 그럼, 예 배를 시작하지요. 모두 묵상하십시다.” 상좌가 품에서 꺼낸 묵주를 목에 걸자 나머지도 그를 따라 하나 둘 묵주를 꺼 내 들고는 무릎을 꿇었다. 조선에 천주교가 전해진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사신으로 명나라를 자주 왕래했던 이수광이 그의 <지봉유설>을 통해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소개 한 데서 비롯된다. 이는 조선 초기부터 공리공론만 일삼던 주자학의 성행에 염 증을 느껴 오던 일부 학자들이 보다 현실적인 학문, 즉 실학의 필요성을 주장하 였다. 이수광이 바로 그 선구적 인물이었다. 그 후 천주교는 자연히 서학과 연결되면서 마침내 신봉운동으로 발전하여 권 철신, 권일신 형제와 정약전,정약종,정약용 3형제가 주동이 되었다. 이들은 교리 연구회를 열어 권철신 지도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권철신의 매 부인 이 벽과 정약전의 매부인 이승훈이 참가하였다. 이승훈은 교리를 깊이 연 구하기 위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세례까지 받아, 한국 최초의 세 례신자가 되었다. 그는 귀국 후에 이 벽과 권철신 형제에게 대세를 주었고, 이들 이 다시 정약전 3형제와 역관 김범우 등에게 대세를 주어, 김범우 집에서 주일 행사를 갖는 것을 계기로 조선 최초의 교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이교회는 관원들에게 곧 발각되어 해산되고, 이어 천주교에 대한 박해 가 근 백여 년간 계속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박해가 1801년 신유년에 있었던 신 유교난과 1829년에서 1841년에 있었던 기해교난, 그리고 1846년의 병오교난, 1866년에 있었던 병인교난이었다. 이같은 박해의 표면상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이 조상의 신주를 모시지 않을 뿐 아니라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이유는 정권 유지에 전전긍긍하던 무리들이 그 반대파를 제거하는 방법의 하나로 천주교 신자들부터 탄압했던 것이다. 신유교난 때에는 오가작통법을 써서 교인을 모조리 잡아들이 라는 임금의 교서를 전국에 내렸고, 이때 희생된 교인 수가 300명이 넘었다. 이러한 박해로 김대건 신부는 병오교난 때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효수되었고, 기해교난 때에는 외국 신부도 잡혀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와 같은 박해가 철종 시대에 잠시 보호를 받는 듯하다. 이는 철종이 즉위하 면서 수렴청정했던 김 대왕대비가 일찍이 천주교에 연루돼 처형된 철종의 조부 은언군 내외의 죄명문서를 지워버리면서부터였다. 지난해 말경, 이용후가 승업을 데리고 김우근 대감 집에 들렀을 때 그의 누님 한테는 금강산에 유람 갔었다고 했으나, 실은 평안도와 황해도 등지에서 선교사 업을 벌이고 있는 안경오 베드로 신부를 만나러 갔던 것이다. 세례 받기를 열망 하는 교우들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이용후가 그 임무를 맡았다. 김우근 대감은 물론 누님에게도 그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다. 그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가는 발걸음을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김우근에게 자 칫 화가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후안 집을 나선 이용후는 그 길로 재동에 사는 이종 형 한흥주 집으로 향했 다. 한흥주는 이용후와 한날 진사과에 급제한 사람이다. 그가 비록 유생이기는 해도 급진적 사고를 가지고 있어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하루빨리 개혁해야 한다 고 주장하는 쪽이었다. 그리하여 천주교를 통해서 서학을 접하고 있는 이용후가 자연스럽게 마음이 통하였다. 그 역시 이용후처럼 관직을 기피할 만큼 청렴한 데다가 심성이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용후가 그를 깊이 존경하였다. 그러나 이용후처럼 궁색한 형편은 아니었다. 그는 성격이 호방하면서도 물려받 은 재산만큼은 함부로 축내지 않고 관리를 잘해 살림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 다. 그렇게 규모 있는 사람이면서도 매우 정의로워 옳고 그름의 경계가 언제나 분명하였다. 이용후가 하인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 한흥주가 매화나무를 보 며 무엇인가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형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반가운 손님이 오셨구먼. 어서 안으로 드시게.” 그가 활짝 웃는 얼굴로 이용후 손을 잡아 사랑채로 이끌었다. 마치 이용후의 내방을 기다렸던 것처럼 반가워했다. 이용후한테는 항상 다정하게 대하였다. “가내 별고 없으셨는지요.” 이용후가 예를 갖추어 신년하례를 넣자 그도 맞절로 받았다. 좌정한 두 사람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로 말문을 열고 있을 때 주안상이 들어왔다. “황해도에 다녀오겠다더니, 일은 잘 보시었나?” 한흥주가 이용후 잔에 술을 따르며 넌지시 물었다. “...대충 보고 왔습니다.”“이 엄동설한에, 고생이 많았겠구먼.”“집 떠나면 으 레 고생 아닙니까. 형님과는 너무 적조했던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어떻게 소일하 셨는지, 궁금하군요.”“나야 늘 그렇지 뭐. 그래, 아우는 새로운 소식 좀 가져오 셨나? 나는 집에만 처박혀 있는 몸이라, 바깥 소식은 캄캄 절벽이네.” 그가 말하는 바깥 소식이란 곧 서양의 문물에 대한 것임을 이용후는 잘 알고 있었다. 이용후 역시 서양 문물에 대해서 깊이 아는 바는 없지만 외국 선교사들 입에서 새나온 얘기들을 전해 들어, 마냥 칩거하고 있는 한흥주보다는 조금 더 아는 정도였다. “저 역시 주워들은 풍월인지라...”“그래도, 아우는 조선 팔도를 고루 다녀 본 사람 아닌가. 그러다 보면 이 사람 저 사람, 사람도 많이 만날 테고. 나야 집말 고는 도통 숙맥이니 하는 말일세. 이왕 온 김에 며칠 묵으면서, 안팎으로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들려주시게.” 그러면서 그가 이용후 술잔에 첨배를 하였다. 그가 외국의 문물에 대해서 얼 마나 궁금해하는지를 잘 아는 이용후는 말머리를 어떻게 꺼내야 좋을지 한참을 궁리하였다. 하긴 들려준 얘기를 반복한다 해도 그는 결코 지루해 하지 않을 사 람이었다. “글쎄요...?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두서는 가려서 뭐 하겠나. 생각나는 대로 얘기하시게.” 이용후는 술로 목을 더 축이고는 “서 양 사람들은...” 하고 말문을 열었다. 이용후가 알고 있는 서양 지식이란 것이 뻔하여서 결국은 했던 얘기를 다시 들려주는 데 지나지 않았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서양 사람들 생각 중에서 가장 으뜸은 만인이 평 등하다는 것입니다. 우선 남자와 여자가 하는 일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 것이 그 렇고, 남자 여자 구별 없이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 그렇고, 심지어 아이들 의 의견도 무시하지 않는 진보된 풍습이 배울 점인 것 같습니다. 여러 나라 중 에서도 미국이나 영길리(영국)와 같은 나라가 특히 그러하답니다. 새로운 문물이 발달한 것도 우리보다 앞섰지만, 제 생각에는 그 사람들의 평등사상을 배워야 될 것 같습니다. 미국이나 영길리에서는 노예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사람을 물건 처럼 팔고 사고 한다고 그럽니다만, 이러한 제도를 곧 없애는 방향으로 사람들 의 뜻이 모아지고 있답니다.” “조선의 한때 노비제도하고 다를 게 없구먼. 그 래도, 조선에서는 이미 순조 원년에 내수사(대궐에서 사용되는 곡물과 과일, 기 타 잡물 따위와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던 관청)과 각 관방(벼슬아치들 이 대궐에서 일을 보다가 숙직하던 곳)의 노비문서를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공 노비(관아에서 부리는 노비) 5만 명을 해방시켰잖은가. 이러한 점은 외국보다 한 걸음 앞서 정책이라 할 수 있겠구먼.”“그렇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 제는 반상 제도가 아니겠습니까. 한번 양반이 되면 신분적으로 특권을 누리게 되고, 그렇지 못한 상민이나 천민은 양반한테 멸시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 풍습 은 인본 이념에도 어긋나는 일이니, 하루빨리 없애야 할 줄 압니다. 하늘 아래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누구는 양반이 되어 평생 권세를 누리고, 누구는 천대 를 받아야 한다는 악습은 우선 천지의 이치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선 사 람들이 이러한 생각으로 빨리 깨쳐야 합니다. 그 지름길이 바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서학을 과감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천주학쟁이다운 말이로군. 아우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 그러나, 세도 있는 자들부터 정저지와(우물 안 개구리) 생각에서 벗어나야 해. 답답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림없는 일이지.”“ 그렇다고 이렇게 무지몽매한 채로 무한히 방관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 까. 형님 같으신 분이야말로 하루빨리 선각자 위치에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나 라의 문물이 나날이 발전하고, 백성들이 삶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겁니다. 언제 까지 쇄국적인 생각에만 머물러 있을 겁니까.”“어허. 그리 닦달하지 마시게. 중차대한 일이란 서둘러서는 아니되네. 개혁을 서두르다 보면 으레 부작용이 따 르기 마련이니까. 더구나 개혁을 몇몇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는가.” “그렇지만 형님, 개혁하는 일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외국의 선교사들이 효수를 당하면서까지 순교를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십시오. 그분들에 비하면 저 같은 사람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어허, 아우. 그런 식으로 자신을 비하하지 마시게. 아직때를 만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까. 순교하 지 않고도 교리를 전도할 방도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 더 많은 백성들에게 진리를 깨우칠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 아니겠나. 절대 서두르지 마시게. 아직도 시기적으로 좋은 때는 아니네. 조정에서 비록 박해를 완화했다고는 해도, 잠시 상감에 대한 위무책일 뿐이야. 지방에서는 아직도 악질 관원들이 있어서, 신부들 은 잡아들이지 않다도 대신 신자들을 잡아들여 뇌물을 받고 풀어준다지 않은가. ”“그런 경우는 한양에서도 종종 있는 일입니다.”“권세 잡은 자들의 마음이 언제 변할지도 모르는 일일세. 폭풍전야라고, 조용한 때일수록 정세 판단을 잘해 야 하네. 괜히, 경거망동하면 시작 아니 함만 못해.”“저도 각별히 조심하고 있 는 중입니다. 이러한 박해 중에도 우리 신도 수가 전국적으로 일만 명이 훨씬 넘어섰다고 합니다.”“민심이 곧 천심이니, 그럴밖에.”“외국에서 신부들이 속 속 들어오고 있으니, 앞으로는 기해교난이나 병오교난과 같은 박해는 절대 없을 것입니다.”“그렇지 않다니까 그러는구먼. 어쨌든, 조심하시게.” 두 사람은 밤 깊은 시각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나라 안팎의 일들을 얘기하였 다. 특히 불란서, 미국, 러시아 등 외국 선박들이 수시로 들어와 교역할 것을 요 구하는 작금의 정세로 보아, 조선도 결국 그들의 뜻을 받아들여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는 날이 머지않아 있을 것으로 예견하였다. 더구나 천주교 교리를 배 우는 과정에서 외국의 문물제도나 풍습들을 귀동냥하고 있는 신자들이 많아짐으 로써 새로운 조류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것임을 장담하였다. 그러면서 민심이 곧 천심임을 재삼 강조하였다. 한흥주는 이용후처럼 아직 천주교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리에 많은 관 심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이미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교우론> 그리고 지봉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을 접했을 만큼 서학에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었다. 이용후가 천주교에 입문하기를 권했으나 그것만은 사양하였다. 교리를 학 문으로 알고 싶을 뿐이지 신앙으로는 삼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그의 대쪽같은 성품을 알고 있는 이용후로서도 더는 권하지 않고 있었다. 그냥, 개혁 의지가 있는 동지애로 만족할 뿐이었다. 이용후는 한흥주 집에서 결국 사흘 밤을 새웠다. 그리고도 주인이 놓아 주지 않으려는 것을 간신히 뿌리치고 나왔다. 한흥주는 그만큼 얘기 상대가 그리웠던 것 같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이용후는 어둠이 짙게 깔리기 전에 집에 당도할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한흥주 집에서 사흘 밤낮을 술로 보 낸 탓에 속도 불편하고 걷기에도 몹시 힘이 들었다. 기온이 매우 낮아 손과 발 은 이미 무감각하게 얼어 버렸고 쌀쌀한 바람은 얼굴을 마치 칼로 긋는 것처럼 아팠다. 사립문을 열고 인기척을 내자 그의 아내가 방문을 삐긋이 열고 경계심이 잔뜩 밴 얼굴을 겨우 내밀었다. 남편임을 확인하자 비로소 문을 활짝 열었다. “별고 없었소?”“그렇게 걱정하시는 분이 신년 벽두부터 사나흘씩 집을 비우 십니까?”“어허, 당신이야말로 신년 벽두에 웬 바가지를 긁소?”“너무 야속해 서 그럽니다. 식솔 생각도 좀 하셔야지요.”“내가 잘했다고는 말하지 않을 테 니, 더는 무안 주지 마시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이 추위에, 객사하지 않 으신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그의 아내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끝내 거두지 않았다. 이용후는 그제서야 집안 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가 싶었다. 혹시, 그새 아이들이 병을 얻은 것은 아닐 까 하고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경이나 원이가 어디 아프기라도 했소?”“...아닙니다.”“그럼, 무슨 일이 있 었던 거요?”“어서 안으로 드시기나 하세요. 언제까지 그렇게 서 계실 겁니까? ” 그의 아내가 크게 마음이 놓이는 듯 불만이 다소 누그러진 듯한 어조로 힐난 하였다. 아내가 그럴수록 더욱 미안한 쪽은 이용후였다. 여자는 버릇 들이기에 달렸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왠지 이번만큼은 평소처럼 당당할 수가 없었다. 가정에 소홀했던 지난날들이 한꺼번에 면목이 없었다. 경과 원 남매는 마치 한밤중인 것처럼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아직 자고 있 을 시각이 아난데 오늘은 일찍 잠들어 있었다. 자는 모습을 들여다봤으나 특별 한 일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별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요?”“...세 식구가 무서워서 혼났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어깨를 바르르 떨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이었다. 순간, 그 사 이에 도둑이라도 들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긴장하였다. “무서웠다니? 산적이라도 왔었단 말이오?”“산적이 왔었으면 제가 무사했겠어 요? 벌써, 산 속으로 끌려갔겠지요.”“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여지껏 거지떼라고는 본 적이 없었는데, 어제 그제 이틀 동안 웬 거지들이 떼를 지어 다니면서 우리 집 주위를 배회하지 뭡니까.” 아내가 또 한번 몸서리를 쳤다. 단단히 혼이 났던 것은 틀림없었다. 웬만한 일 이 아니고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던 여자였다. “거지떼라니...? 거지들이 당신한테 행패라도 부렸다는 말이오?”“행패 부린 것이나 다를 게 없었습니다.”“정말, 당신한테 행패를 부렸다는 말이오?”“그 런 게 아니구요...갑자기, 웬 사람들이 집 앞에서 웅성대길래 나가 봤더니 글쎄, 거지 대여섯이 우리 집을 기웃거리지 않겠어요?”“그래서?”“처음에는 동냥하 러 온 줄 알고, 밥이 없다고 했지요. 우리 형편에 거지한테 줄 밥이 어디 있습니 까. 그런데도 가지 않고 마당을 기웃거리며 안 가는 겁니다. 어찌나 무서웠던 지...집안에 남자가 없는 줄 알고 그러는가 싶어 더욱 무섭지 뭡니까.”“굳이 우 리 집 앞에서만 그랬단 말이오?”“그렇다니까요.”“이상한 일도 다 있군. 하필 이면 왜 내 집에서 그랬을꼬?”“그뿐이 아닙니다. 어찌 된 사연인지, 나으리를 지목한 듯 이 진사, 이 진사를 중얼거리지 뭡니까. 꼭 나으리한테 행패를 부리러 온 사람들 같았다니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으리를 지목했으니 말입니다.” “거 참, 이상한 일이네. 거지들이 왜 나를 찾아왔을까...?”“그러게 말입니다. 혹시, 짐작 가는 데가 없으십니까?”“글쎄요...”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느닷없이 거지가 떼로 몰려와 자신을 지 목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 거지들한테 못할 짓을 한 적 도 없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면 필경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오지 않았소?”“나으리가 안 계신 것을 눈치챘는지 오늘은 오지 않았 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이랑 제가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얼마나 놀랬으면, 원이가 자다가 헛소리를 다 했겠습니까.”“그런 망할 놈들이 있나. 별 해괴한 일도 다 있군.”“혹시, 나으리께서 그 사람들한테 원한 살 일이라도 하신 거 아닙니까? ”“별소리를 다 하는구료. 내가 어디 그럴 사람이오?”“그러실 분은 아닙니다 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지 뭡니까.”“부인이 놀랄 만도 했겠구료. 내가 집을 비운 탓이니, 잘못은 나한테 있다고 할 수밖에요.” 이용후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닌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웬 거지들이 와서 소란을 피웠다니... 아무리 상상을 해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며칠 전 청계 천 가산에 가서 승업을 놈을 수소문한 적은 있었으나 당시 못할 짓은 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더구나 그들에게 집을 가르쳐 준 적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내 가 말한 거지떼들이 가산의 그들이 아님은 분명했다. 대체 어디서 온 작자들인 가? 순간순간 승업의 얼굴을 떠올리기는 했어도 놈이 일당을 몰고 올 처지는 어 림도 없는 일이었다. 우선 집을 모르는데 그가 어떻게 오겠는가. 상상할 수도 없 는 일이었다. 이튿날 이용후는 마음의 무장을 하고 집을 지키기로 했다. 놈들 이 이틀씩이나 왔었다면 또 나타날 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놈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장 급한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당분 간 집에 있기로 작정하였다.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이용후가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마당을 거닐 고 있는데 마침 거지 하나가 멀리서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눈길에 잡혔다. 뒤에 다른 놈이 따라붙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당을 이루어 나타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분명히 혼자였다. 그리고 어린 놈이었다. 이용후는 재빨리 몸을 숨겨 놈의 거동을 살폈다. 왠지 놈은 사방을 두리번거 리며 매우 긴장한 몸짓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승업일 수도 있다 판단이 섰 다. 숨을 죽이고 놈을 지켜보았다. 역시 승업이 틀림없었다. 녀석이 내 집을 어 떻게 알고...? 이용후는 혹 놈의 일당이 있어 뒤 숲 속에서 잠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 구심으로 승업의 주위를 샅샅이 훑었다. 그런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켜보았다. 역시 승업 혼자였다. 승업은 집 앞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 몸을 납작하게 웅크렸다. 그리고는 마치 망보는 임무를 띤 것처럼 이쪽에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왠일로 왔을까? 이용후는 숨겼던 몸을 세워 사립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데도 승업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쪽에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것으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용 후도 놈의 판단에 맞춰 딴청을 부리며 놈이 숨은 쪽으로 느릿느릿 다가섰다. 그 때까지도 놈은 꼼짝하지 않았ㄷ. 잔뜩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네 이놈. 냉큼 나오지 못할까.”이용후가 큰 소리로 호령하였다. 그러자 놈이 산짐승처럼 놀라며 숲 속으로 꽁지가 빠지게 내빼는 것이었다. 짐승보다 더 날랜 모습으로 달아났다. “승업이 이놈. 게 섰지 못하겠느냐.” 이용후는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서 재차 호령하였다. 놈이 달아나기를 멈춘 듯 숲 속이 고요했다. “이놈아. 어 서 나오너라. 내 눈에 띄었으니, 숨어도 소용없다.”이용후는 어조를 부드럽게 하여 넌지시 타일렀다. 그래도 놈은 꼼짝하지 않았다. 이용후가 재차 달랬다. 그 제서야 부시럭대는 소리가 들리며 놈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 고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게걸음으로 나왔다. “대체, 어찌 된 일이냐?” 그러 자 승업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으리. 죽을죄를 지었습네다.”하고는 이용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느냐?”“잘못했습네다, 나으리. 죽여 주시라요.”승업 이 이마를 땅에 박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용후는 겁먹었던 아내의 말이 떠 올라 놈이 괘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갑고 측은하였다.“누가 우리 집을 가르 쳐 주더냐. 아니면 네 놈이 내 뒤를 미행한 것이냐?”“...미행하지 않았습네다. ”“그럼, 누가 가르쳐 주었더란 말이냐?”“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네다.”“ 어느 놈인지는 모르나, 단단히 약조를 한 모양이구나.”“...기렇습네다.”“그건 그렇고, 여기는 왜 왔느냐?”“나으리를 뵙고 싶었습네다.” 그리고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용후가 울음을 그치라고 했는데도 한참을 울어댔다. 마치 잃었던 가 족을 만난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나를 만나서 어쩌려구? 내가 너를 거둘 줄 알았더냐?”“아닙네다. 거저, 나으리 모습만 잠깐 뵙고 가려구 했습네다. 정말 입네다.” 이용후는 놈이 얼마나 사람의 정이 그리웠으면 그랬으랴 싶어 기특하 기도 하고 더없이 측은하였다.“그만 일어나거라.” 이용후는 비로소 승업의 어 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더 서럽게 울었다. 꾀죄하기는 전과 다름이 없 었다. 오히려 더 야위어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다. 그래도 휘양까지 얻어 쓴 모 습이 다행스럽게 보였다. 얼어 죽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방도를 챙긴 것이 대견 하였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이용후 아내와 경과 원이 마루에 서서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경과 원은 승업을 보자 제 어미 뒤로 몸을 숨겼다. 이용후는 그들에 게 사정을 변명할 궁리에 빠져 한참을 서 있었다.“대체, 그 아이가 누구입니까? ”이용후 아내가 내내 괴이쩍은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이용후는 선뜻 대꾸를 못하고 승업을 짐짓 꺼림한 표정으로 내려보기만 하였다. “보아하니 걸인인 것 같은데, 어인 일로 집 안에 들이십니까?”“옳게 보았소. 걸인은 걸인인데...”“혹시, 일전에 말씀하신 황해도 아이가 아닐까 합 니다.”“그렇소, 이놈이 바로 승업이라는 녀석이오.”“어떻게 이곳까지 왔답니 까?”“나도 아직 묻지를 못했소. 우선, 밥이나 한술 먹입시다. 이 엄동설한에 굶기를 밥 먹듯 하였을 테니, 오죽 배가 고프겠소.” 이용후는 아내의 동의가 떨 어지기도 전에 승업의 등을 밀어 양지 쪽 툇마루에 앉혔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기가 찬 듯 또 한숨을 내쉬었다. “원, 별일도 다 봅니다. 집 안에 걸인까지 끌 어들이시다니...”“나도 뜻밖에 당한 일이오. 어서 밥이나 한술 내오구료.” 이 용후는 슬그머니 승업의 표정을 살폈다. 승업은 고개를 죽은 닭처럼 늘어뜨리고 있었다. 비록 어린아이지만 그의 귀가 열려 있는 자리에서 아내의 타박이 좀 과 하다 싶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제서야 그의 아내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 네놈이 나를 왜 찾아왔는지, 사실대로 말하여라.”“멀리서라도 잠시 뵙고 싶어 서 왔습네다. 믿어 주시라요.”“그래도 네놈이 사실을 말하지 않는구나.”“아 닙네다. 정말입네다.” 승업이 재빨리 바닥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 번지고 있었다. “며칠 전, 거지패들과 이곳에 온 적이 있느냐 없 느냐.” 그러자 승업이 눈을 내리깔고는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왜 대답을 못 하느냐? 사실이렷다?”“...기건 맞습네다.”“옳거니. 그럼, 네놈이 끌고 온 것들 이냐?”“기런 게 아닙니다. 청계천 거지들한테 붙들려 개지구 끌려왔습네다.” “그렇다면, 내 집을 일러 준 것이 바로 네놈 아니더냐.”“...처음에는 모른다고 했시오. 기러니까니, 저를 마구 두들고 팼시오. 기래도 끝까지 말하지 않았댔시 요.”“그럼, 너를 죽이려 했단 말이냐?”“...기렇습네다.”“그놈들이 어째서 네 놈을 끌고 이리로 왔더란 말이냐.”“나으리께서 저를 찾아오셨다구 했시오. 저 는 믿지 않았습네다. 나으리께서 왜 저를 찾으셨겠습니까.”“그래서?”“거짓말 이라구 했더니, 몽둥이로 사정없이 패디 뭡네까.”“놈들이 무슨 일로 나를 보자 고 했더란 말이냐.”“...나으리한테 구전을 뜯을라구 했을 겁네다.”“나한테 구 전을 뜯어?”“틀림없습네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날 승업을 그들의 소굴로 끌고 간 거지패들은 그를 이용후한테 데려다 주고 돈을 뜯어 낼 계획이었다. 보 잘것없는 거렁뱅이 한 놈을 찾으러 양반이 소굴에까지 왔었다면 필시 사연이 있 을 것으로 단정하였다. 이용후가 중요치 않은 것처럼 말하고 갔으나 웬만한 일 로는 양반이 직접 찾아 나설 리가 없다. 청계천 가산이라면 중인은 고사하고 천 민들조차 지나가기를 꺼리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지체가 높든 낮든 간에 양반 이 나타났다면 예사로운 관계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네놈이 내 집을 어떻게 알았느냐? 나를 미행하지 않고서는 알아 낼 방도가 없을 것이 다.”“미행하지 않았습네다.”“그럼, 누가 일러 줬는지 사실대로 고하거라.”“ 나으리, 기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네다. 용서하시라요.”“나만 알고 있을 것이니, 주저치 말고 고하여라.”“사실은...”이때 이용후 아내가 국밥이 든 바가지를 들 고 나왔다. 승업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바가지를 보자 눈이 뒤집혀 이용 후 질책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마른침만 거푸 삼켰다. 이용후는 그 모양이 하도 측은하여 추궁은 뒤로 미루기로 하였다. “나으리께서 정말 저를 찾아오셨댔습 네까?”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어 치운 승업이 혀로 입 언저리를 핥 으며 물었다. 포만감에 기분이 썩 좋은 표정이었다. “네까짓 놈을 찾아 뭘 하 게? 어림도 없다. 누가 내 집을 일러 줬는지나 어서 고하여라.”“사실은...” 승 업은 그제서야 김우근 대감 집에 갔던 사실과 문전에서 얼어죽었을 것을 머슴한 테 발견되어 살아난 것, 그리고 박 서방의 갖가지 배려 등을 고백하였다. 인정 많은 박 서방한테 고마운 것까지 사족으로 달았다. “정말, 나으리를 멀리서만 뵈올 생각이었습네다.”“그건 왜?”“그 영감님이 그러라고 했습네다. 절대루 나으리를 귀찮게 하디 말라구 했시요. 나으리, 그 영감님을 혼내지 마시라요. 영 감님이래 잘못이 없시요.” 승업이 다시 바닥에 꿇어 엎드려 두 손을 비볐다. 이 용후는 어린 소견이 기특하다 싶어 선뜻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승업을 맡길 만한 곳이 어 디 없을까 생각하였다. 배운 것이 전무한 아이치고는 영민한 구석이 많아 거지 로 마냥 떠돌게 하기가 안타까웠다. 각별한 배려는 못해도 가로지른 입에 풀칠 이라도 할 수 있도록 주선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았다. 6 1855년. 철종이 왕위에 오른 지 6년이 되는 해였다. 이해 5월. 영남지방의 유생 1만 432명이 장헌세자를 추존하자는 만인소를 올렸다. 만인소란 이조 때 유학자들이 연명으로 올렸던 상소를 말한다. 이조가 전제 군주국가였지만 왕의 정치이념이 옳지 않을 경우는 유생들이 상소하여 자신들 의 뜻을 내세울 수 있었다. 만인소라는 말이 생긴 것은 1823년에 유생 9,996명 이 서자와 그 자손들도 관직에 임용할 것을 상소한 데서 비롯되었다. 서출도 겉으로는 양반이었으나 가정에서부터 천대를 받았으며 상속권조차 없었다. 이조 시대는 대부분 혈통이나 결혼에 의한 인척관계로 출세가 보장됐으므로, 이들 서 출에게는 문과의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고 무과에 한해서만 허용되었다. 그나마 관직에는 임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갈수록 서출의 수가 많아지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선조 때 적서의 차별을 잠시 완화하여 지방의 수령등으로 봉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영조 때 에 와서 다시 적서 차별을 엄격히 하였고, 1894년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폐지되 었다. 이와 같은 신분적 제약으로 서출이 정치 쪽으로는 거의 진출하지 못하는 등의 냉대를 받자 전국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심지어 의적이 되어 사회 를 어지럽히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그러나 학문과 문예 쪽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자가 많아 어숙권의 <고사촬요>와 한치윤의 <해동역사>등이 대표적인 예 다. 사도세자는 1762년 5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은 비극 적 인물이었다. 영조한테는 정성왕후 서씨와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있었으나 소생이 없어 영빈 이씨에게서 효장세자와 사도세자를 얻었다. 마침 효장세자가 일찍 죽자 영조는 사도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케 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나쁜 병에 걸려 광기를 부리기 시작하더니 자연 학문을 멀리하게 되었고, 궁녀와 내 시들을 우롱하며 함부로 죽이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는 여승을 궁중에까지 불 러들여 희롱하였다. 게다가 영조 몰래 관서지방으로 유람까지 다녀오자 이를 못 마땅하게 여긴 조정 대신들이 왕세자의 체통 문제를 들고 나와 비행을 낱낱이 열거해서 영조한테 상소하기에 이른다. 이들 상소에 몹시 분노한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뒤주에 가둬 놓고 굶겨 죽였다. 임오년의 이 비극적 사건이 있자 당시 시파와 벽파간의 당파싸움이 일어났다. 이당쟁은 세자를 동정하는 파와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자신들의 상소를 합리 화시키려는 파들 간의 정치싸움이었다. 즉 세자를 동정하는 쪽을 시파라하여 그 들 대부분이 소론의 남인 계통이고, 그 반대파가 벽파로서 노론이었다. 이로써 사색당쟁이 더욱 깊어졌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자 아버지 장헌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슬퍼한 나 머지 자연 벽파를 멀리하고 시파를 측근에 두었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어린 순 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의 계비였던 벽파 계열 김씨가 섭정하게 됨에 따라 벽파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1801년 신유년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 사건이 겉으로는 천주교가 조선의 전통 적 유교사상에 해악이 된다하여 일어났지만, 실은 시파인 남인 계통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 내지는 천주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탄압이 더욱 심했던 것이다. 이러한 음모가 있었음을 알고 반기를 든 유생들이 사도세자를 추존하자는 만 인소를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철종은 이를 받이들이지 않았고 고종 때에 이르 러서야 비로소 장조라는 시호로 추존하였다. 사실 장헌세자 문제로 만인소를 올 렸던 유생들은 남인 후손들로서 서학에 심취한 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천주교에 연루돼 처형된 조부 은언군의 죄명을 지워 버리는 것을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잠시 수그러들었지만, 정권을 잡고 있었던 안동 김씨 일파는 천주교의 교리를 연구하고 있는 자들의 이 같은 만인소를 자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장헌세자의 추존을 묵살했던 것이다. 유생들의 이 같은 만인소에 이용후가 참여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매부 김우근이 노발대발한 것은 물론이었다. 이에 입장이 더욱 난처한 쪽은 아무래도 이용후 누님 이씨일 수밖에 없었다. 이씨는 동이 트자마자 머슴 박 서방을 보내 이용후를 불러들였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이용후는 박 서방을 보자 짐짓 시치미를 떼었다. "이른 아침부터 박 서방이 웬일인가?" "내당마님께서 급히 듭시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요." "누구를 말인가?" "진사 어른이십니다." "나를? 무슨 일인 것 같은가?" "쇤네가 어찌 알겠습니까요." "...내당마님께서 상이라도 주시려나?" "글쎄올습니다. 쇤네는 급히 모시고 오라는 분부만 받았을 뿐, 내당마님의 의중 은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요." "알겠네. 내당마님이 부르시니 아니 갈 수는 없는 일. 앞장서게." 이용후는 미처 아침도 뜨지 못한 채 단출하게 행장을 꾸려 집을 나섰다. 그러 자 그의 아내가 의구심이 가득한 낯으로 따라나서며 "무슨 일인 것 같습니까?"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남편이 이미 그 까닭을 알고 있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낸들 알겠소. 누님이 부르시는 일이니, 그저 갈 수밖에." "좀처럼 드문 일인 데, 전혀 짐작이 안 가십니까?" "그렇다니까요. 어쨌든, 다녀오리다. 설마, 동생 한테 곤장이야 치시겠소?" "원, 별 해괴한 말씀을..." "...누님이 상이라도 주실 는지 누가 아오?" 이용후는 자꾸 불안해 하는 아내 앞에서 마음을 위장하여 안심시켰다. 그녀는 남편이 만인소에 연루돼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어, 김우근 대감이 진노해 있다 는 사실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남편이 혹시 누님의 심기를 불편하 게 하지는 않았을까 하고 노심초사하였다. 심지는 굳은 사람이지만 다소 방만한 데가 있어, 평소 그의 누이가 항상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 었다. 그런 이유로 간혹 박 서방 편에 서찰을 보내 남편을 잘 단속하라고 당부 까지 하였다. 그렇다고 아녀자가 어찌 남편을 단속하랴 싶어 물가에 내놓은 자 식처럼 늘 걱정만 할 뿐이었다. 이런 중에 박 서방이 꼭두새벽에 들이닥쳤으니 그녀 심장이 콩알만하게 오그 라든 것은 당연하였다. 가뜩이나 미운 털이 박힌 동생한테 갑자기 상을 줄 리는 없고, 아무래도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는 단정 쪽으로 마음을 몰아가 고 있었다. 이용후 딴에는 한달음에 달려갔는데도 안국동에 당도하니 그새 사시(오전 9시 에서 11시)에 이르렀다. 박 서방은 내실 앞으로 바로 나서지 않고 내당마님 몸종 인 향원이를 조용히 불러 이 진사가 당도했음을 아뢰라고 지시한 것 같았다. 잠시 후 향원이가 나와 이용후를 내실로 안내하였다. 그의 누이 이씨는 이용후가 들어서는 모습을 비스듬히 노려보면서 대뜸 혀부 터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용후는 시치미를 뚝 떼고 "어인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저런... 정말 몰라서 묻는 겐가?"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 사람아. 그렇 게 능갈만 치면 대순가? 지금, 대감마님의 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나 할는 지 모르겠구먼." 그녀가 볼을 바르르 떠는 것으로 보아 화가 나도 단단히 났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용후는 그제서야 자세 가다듬는 시늉을 하였다. "대체, 그런 일에 뭐 하러 끼여든단 말인가. 자네가 지금 만인소 따위에 마음 쓸 처지인가? 장헌세자 추존은 거론할 일이 못 된다고 상감께서도 이미 전교(왕 의 명령)가 계시지 않았나. 대사간(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관직)에서 이번에 상소 를 낸 유생들을 엄중히 다스릴 것을 상감께 청한 사실을 알고나 있는 게야? 도 대체, 자네는 목숨이 몇 개길래 천둥벌거숭이로 날뛰는 겐가. 딱두 허지. 그러니 까 제 처자식 입에 풀칠도 못하는 형편이 아닌가." "누님. 어찌 그리 꾸중만 하 십니까?" "그럼, 칭찬이라도 들을 줄 알았나? 학문을 그만큼 했고, 사리판단이 있는 사람이 세상살이에 분별이 있어야 되잖는가. 이번 만인소에 자네 이름이 든 바람에 대감 입장이 이만저만 난처한 것이 아니란 말일세. 김좌근 영의정께 서도 자네 이름을 보시고 대감께 몹시 화를 내셨다 하네. 그러니, 내가 무슨 낯 으로 대감을 마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분별이 없기로서니, 일이 이 지경 에 이르게 될지 짐작을 못했단 말인가?" "대감마님과 누님께는 죄송하게 됐습 니다. 그러나..." "...뭔가? 변명할 말이 있는 게야?" "이번 만인소는 명분이 없 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정의 당파싸움에 희생되신 세자를 추존하는 일은 하늘 의 뜻이라 여겨집니다. 선왕이신 영조께서도 세자의 죽음을 애통하게 생각하시 어, 사도 시호를 내리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아닙니까." "설사 그렇더라도, 자네까지 나설 필요는 없잖은가 말일세. 자네만 도리를 찾아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면, 대감은 어디 가서 도리를 찾는가. 자네 매부께서 김좌는 대감과 인 척간임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자네가 연루됨으로써 대감 입장이 어떠하리 라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럼에도 관여했다면, 이는 미친 척하고 떡판에 엎어진 격 아닌가." "...그런 생각이야 했겠습니까. 실은, 저도 어느 정도 염려는 했습니다. 그러나, 만인소가 명분 있는 일이라 생각되어 상감께서도 마땅히 윤허가 계실 줄 믿었습니다." "매부더러 일가 권속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고, 김좌는 대감의 노하심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네." "영의정께 서도 그렇지요. 상감께서도 불문에 붙이신 일을 가지고 그토록 마음 쓰는 까닭 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자리에 오르다 보면, 이것저것 대소사를 일일이 단속하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네. 이 사람아. 누울 자릴 보고 다리 뻗으랬어. 그 러니, 차후 경거망동하지 말고 사리분별을 잘하시게. 대감께는 내 단단히 훈계했 다고 말씀드릴 테니, 당분간 근신하는 것이 좋을 걸세." 이용후는 누이의 힐책이 이쯤으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여, 점심이나 먹 고 가라는 것도 마다하고 도망치듯 서둘러 빠져나왔다. 그러자 박 서방이 숨이 턱에 차 가지고 따라왔다. "나으리. 웬 걸음이 그리도 빠르십니까? 쇤네 가랭이 찢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요." "무슨 일인가?" "내당마님께서 이걸 전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작은 보에 둘둘 말린 것을 이용후한테 내밀었다. 속에 무엇이 들었 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뭐라고 하시던가?" "나으리께서 진지도 안 드시고 가셨다면서, 전 해 드리라 하셨습니다요." "그럼, 주먹밥이라도 들었단 말인가?" "쇤네가 보기 에,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요. 저엉 궁금하시면, 가시다가 끌러 보시지요. 그 럼, 쇤네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요." 박 서방이 왠지 이용후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며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이용후 는 어쩐지 꽁무니를 빼는 것처럼 보이는 박 서방의 뒷모습과 보에 싼 것을 번갈 아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대체, 뭐가 들었길래...? 이용후는 비로소 보를 끌렀다. 뜻밖에도 돈이었다. 얼추 스무 냥은 되는 듯싶었다. 누님이 어인 일로 돈을...? 혹시, 내 마음을 돌려 놓을 심산인가? 이용후는 누이의 저의를 가늠하느라 선 채로 생각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나 딱히 무엇이라 단정할 수가 없었다. 순간, "진지도 안 드시고..." 운운하던 박 서 방의 말이 떠올랐다. 누님의 마음이 그러하셨구나. 동생을 꾸짖어 놓고 밥도 먹여 보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누이의 깊은 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용후는 콧등이 저리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실은 누이 앞에서 이번 만인소의 마땅함을 역설하고 싶은 오기가 은근히 발동 했었으나 고작 안방이나 지키고 있는 여자한테는 의미 없는 일이다 싶어 그만두 었다. 더구나 누이가 안동 김씨 한가운데 들어가 있는 남편이 더 높은 벼슬에 오르기만을 고대하는 여자임에야, 소한테 경 읽어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 각하였다. 이용후는 만인소 일로 누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자신의 소행이 잠시 후회 가 되었다. 이용후한테 마치 미운 털이라도 박힌 것처럼 누이가 겉으로는 홀대 를 해도 속으로는 친정 동생이 구차하게 사는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음 을 알고 있었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동기간의 정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용후는 경황이 없던 차에 비로소 시장기를 느꼈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꼭 두새벽에 박 서방을 따라나섰던 것이 벌써 미시(오후 1시에서 3시) 한가운데 와 있을 시간이 되었다. 서둘러 요기부터 해야 했다. 누이가 이럴 경우를 다 헤아렸 던가 싶어 또 콧등이 저렸다. 그는 곧장 피마골로 발길을 돌렸다. 피마골은 말이 피해 다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종로는 옛날부터 고관대작들이 많이 통행하던 길이었다. 고관이 지 나갈 때마다 서민들은 땅에 엎드려 있어야 했다. 중인이나 장사치들이 말을 타 고 가다가도 고관이 지나가면 얼른 말에서 내려 신분상의 예의를 갖추었다. 그 러다 보니 서민들은 걷는 시간보다 엎드려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종로 대로변에 들어앉은 가옥 뒤쪽으로 겨우 말 한 마리 지나다닐 만한 골목길을 만들었다. 지금의 종로 뒷골목이다. 서민들이 종로 대로를 가다가 멀리서 고관의 행차가 있다 싶으면 얼른 말 머리를 이 골목 으로 돌려 번거로움을 피하곤 하였다. 이 골목은 자연 서민들의 길이 되었고, 따라서 이들을 상대로 한 상점이나 선 술집, 국밥집과 같은 음식점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종로3가 쪽으로는 음식점뿐만 아니라 색주가(술도 팔고 매음도 하는 술집)도 있어 여자들이 나와 호객 행위도 하였다. 이용후는 무엇을 먹을까 하고, 음식점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선술집에서 풍 겨나오는 너비아니와 누름적이나 산적, 생선 따위를 굽는 비릿한 냄새와 국밥집 의 국 끓는 냄새들이 코를 후비고 들어와서는 뱃속을 온통 휘젓고 다녔다. 오랜 공복으로 이것저것 다 먹고 싶었다. 오랜만에 기름진 너비아니도 먹고 싶고, 생 선도 먹고 싶고, 누름적도 먹고 싶었다. 그는 선술집 앞에 서서 산적과 생선을 굽고 있는 중노미의 손놀림을 한참 구 경하였다. 공복도 채우고 술 안주로도 일품이겠다 싶어 연신 침을 삼켰다. 순간,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뜬 경과 원이 도깨비 방망이처럼 다가섰다. 이용후는 한숨을 내쉬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린 자식들이 눈에 밟혀 차마 사 먹을 수 가 없었다. 이때, 뒤에서 "이 진사가 아니신가." 하고 어깨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이용후 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홍 생원께서 어떻게 여기를...?" "그러는 이 진사는 여기서 무얼 하 시오?" "그저 지나는 길이었소만, 홍 생원께서는 웬일이시오?" "마침 시장하던 참에 요기나 할까 해서요. 웬만하시면 저랑 함께 들어가십시다." "저야 뭐..." 그러자 홍 생원이 선술집을 가리키며 이용후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들이 들어 서자 중노미가 젓가락을 빼들고는 "무엇으로 구울깝쇼?" 하고 물었다. 홍 생원이 목판 앞으로 다가가 산적과 생선 따위를 가리켰다. 중노미가 그것들을 집어 석 쇠에다 올려놓았다. 이어서 주모가 소반에다 술병과 술국을 받쳐 들고 나타났다. "그래. 이 진사께서는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야 늘 그렇습니다만, 홍 생원께서는 근황이 어떠신지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반건달이지요. 허허 허..." "학문이 있으신데, 건달이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외다." "원, 과찬의 말씀을... 학문이 있으면, 이러고 있겠습니까? 벌써 벼슬길에 올랐지요. 허긴, 우 리네야 하늘의 별을 따는 일이겠지만요." 벼슬하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일이라고 말한 것은 안동 김씨 권세를 등에 업 지 않으면 벼슬하기 어렵다는 비유였다. 생원 홍경무는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안동 김씨 의 배경이 없이는 벼슬길에 오르기 힘든 사회 풍조를 일찍 깨닫고 있었기 때문 이다. 이용후가 홍경무를 알게 된 것은 생원시때 만난 인연이었고, 김씨 세도와 사회제도에 대한 인식과 견해가 비슷한 처지였다. 중노미가 산적과 생선 구운 것을 소반에 내려놓고 갔다. 술 한 잔씩을 비우는 동안 잠시 얘기가 중단되었다. 이용후는 누이 집을 나와서부터 마음이 답답하던 차에 뜻밖에 홍경무를 만나, 회포를 풀 수 있을까하여 공연히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사람은 시류를 잘 타야 출세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그래서 드리는 말씀 이외다. 김씨 성 가진 놈 아니고는 어디 얼굴을 내밀 수 있습니까. 그래도, 이 진사께서는 나보다야 좋은 조건이잖소이까. 매부가 영의정과 가까운 인척이신데 다가 이미 좌참찬에 올라 계시니, 이 진사께서 뜻만 있으시면..." 홍경무는 이용후를 눈앞에 두고 어찌 들으면 비아냥대는 것도 같고 진정 부러 워하는 것도 같은 어조로 말했다. 두 가지 뜻을 다 내포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 다. 어쨌든 이용후가 듣기에는 매우 거북한 말이었다. "듣기 민망하외다. 나는 그저 이용후일 뿐이지, 매부와 연관짓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소이다." 이용후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어색한 표정을 짓자 홍경무가 금세 낯빛을 고쳐 말을 돌렸다. "이르다 뿐입니까. 이 진사가 출세에 뜻이 있는 분이셨다면, 이번 만인소에 참 여하셨겠습니까." "아니...? 홍 생원께서 그걸 어찌 아셨소?" "허허. 제가 당나 귀 귀를 갖지 않았습니까. 웬만한 사람은 만인소임을 다 알고 있지요. 이 진사 용기는 정말 대단하시오. 누이의 처지를 생각해서도 선뜻 실행 못할 일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누이한 테 잔뜩 꾸중을 듣고, 근신하라는 엄명까지 받고 오는 길입니다." "내당에서는 당연히 그러실 테지요. 저 같아도 그랬겠습니다. 어쨌든, 일이 이쯤 해서 마무리 되었으니 다행 아닙니까. 조정에서 문제삼기로 작정했더라면 이 진사께서도 곤 욕을 치를 뻔하지 않았습니까." "글쎄올시다...? 과연, 다행으로 여겨야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한 진사께서도 안녕하신지요. 뵈온 지 하두 오래 돼서..." 그가 말한 한 진사는 곧 이용후 이종 형인 한흥주를 말한다. 그와 한흥주가 서로 알게 된 것은 역시 생원시 응시 때 인사를 나누고부터였다. 세 사람이 학 문의 깊이도 같거니와 나이 또한 비슷하여 호형호제하여도 서로 섭섭할 것이 없 었다. 게다가 세상을 보는 시각에도 별 차이가 없어, 가끔이긴 하지만 서로 만나 면 반가운 낯으로 대하곤 하였다. "연초에 인사를 갔었습니다." "어찌 소일하고 계시던가요? 워낙 출입이 없으 신 분이라... 우리네처럼 바깥 출입도 가끔 하셔야 덜 적적하실 텐데요." "형님 이야 오로지 책만 벗하시는 분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제가 가면 좀처럼 놓아 주 질 않습니다. 이번에도 사흘이나 묵었지 뭡니까." "이 진사가 워낙 반가운 인척 인데다가, 외로우셔서 그럴 겁니다. 그래, 이번에 가셔서는 두 분이 무슨 얘기를 나누셨는지요? 사흘씩이나 묵으셨으니, 꽤 많은 얘기가 오갔겠습니다." "뭐, 별 얘기 있었겠습니까. 그저, 세상 돌아가는 얘기였지요." 그러자 홍경무가 갑자기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그분도 천주학에 관 심이 많으시다고 하셨던가요?" 하고 물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깊이 들어갈 생각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혹시, 홍 생원께 서도 천주교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서양 문물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하 다 보니까, 자연 그쪽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리를 깊이 연구할 기회가 생기면, 서양 문물에 대해서도 그 이치를 자연히 깨닫게 될 것입 니다. 홍 생원께서도 그럴 생각이 있으신지요?" "글쎄요...? 아직은 엄두가 나 질 않습니다. 때가 오면, 그때 가서 이 진사께 도움을 청하겠소이다." "그러실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군요." 이용후는 홍경무가 뜻밖에 천주교에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 몹시 반가워 그의 손을 끌어다 힘주어 잡았다. 그리곤 눈을 감아 '천주님이시여...' 하며 바로 앞에 서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동안 중얼거렸다. "이 진사께서는 이 자리를 뜨시면 곧장 어디로 가시렵니까?" "마침 집으로 가려던 참이라, 특별히 마음에 둔 곳은 없습니다만...?" 그러자 홍경무가 갑자기 반가운 낯을 하며 안면에 웃음을 가득 싣는 것이었 다. 순간, 그에게 꿍꿍이속이 따로 있음을 눈치챘다. "그럼, 오늘은 저와 회포를 푸는 것이 어떠신지요? 그 동안 너무 적조해서 드 리는 말씀이외다." "회포라니요?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잘 모르겠군요." "그야 허락만 하신다면 제가 안내할 것 아니겠소." "글쎄올시다. 갑작스러운 제 안이라..." "그럼, 저를 따라나서십시오." 홍경무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둘러 음식값을 치르고는 마치 급한 용무가 있 는 것처럼 휑하니 선술집을 나섰다. 이용후는 그의 속셈을 짐작할 수가 없어 주 뼛주뼛 따라붙었다. 홍경무가 술이 거나하면 음담패설도 서슴지 않는데다가 때 로는 한량기를 드러내기도 하여, 이용후는 대뜸 그의 객기부터 떠올렸다. 지기를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방금 마신 술이 낮술치고는 조금 과 한 듯하여, 그의 의식이 조금씩 산란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 역시 한흥주 처럼 가세가 곤궁치 않은 집안이라 기방 출입을 자주 하는 눈치였다. 이용후 형 편으로는 감히 실행하지 못할 일이었다. 요즘 기생들이란 돈에 닳아 빠진 여자 들뿐이어서, 어설프게 사내의 멋 따위엔 눈길을 주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화대 나 챙기는 일에 혈안이 돼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으나 홍경무는 벌써부터 신바람이 나는 듯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피마골을 따라 경쾌하게 걸어갔다. 한량들의 걸음이 대개 그렇듯 그는 걸음도 매우 빨라 이용후 걸음으로는 따라잡기조차 힘이 들었다. "홍 생원. 대체 어디를 가시려고 이리 서두르십니까?" "...제가 단골로 가는 곳이 있으니, 이 진사께서는 염려 놓으시고 따라오시지요." 그리고는 마치 이용후를 곤경에 몰아넣을 음모라도 꾸미는 사람처럼 호탕하게 웃어 넘기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이용후는 자꾸 의구심만 들었다. 회포를 풀자고 했으니, 제가 갈 곳이 기생집밖에 더 있겠는가. 원님 덕에 나팔이나 불어 보지. 이용후가 예상한 대로 홍경무가 걸음을 멈춘 곳은 기방이었다. 그는 누구를 부르는 법도 없이 대뜸 문을 열고 들어가 정원 한가운데에 우뚝 섰다. 그러자 하인인 듯한 어린 계집이 놀란 얼굴로 그에게 쪼르르 달려와 공손하게 조아렸 다. "어서 오십시오, 나으리." "연홍이 안에 있느냐?" "네, 나으리." "어서 안내 하렸다. 오늘은 매우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으니, 연홍이한테 그리 이르거라." 계집을 부리는 어투가 아주 당당했다. 계집이 홍경무 앞에서 몸둘 바를 몰라 쩔쩔매는 것으로 미루어 그가 단골로 드나드는 집이 틀림없어 보였다. "네, 나으리. 안으로 듭시지요." 계집이 여전히 머리를 조아린 채 종종걸음으로 앞장섰다. 이용후가 언뜻 보기 에 여느 기생집과 다를 바가 없는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별채로 안내되었다. 이용후가 홍경무를 따라 마루로 막 올라서는데, 머슴으로 보이는 사내가 그르듯 달려오더니 벗어 놓은 신을 가지런하게 모아 놓 는 것이었다. 놈은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내내 허리를 구부린 채 있었다. 이용후가 곁눈질로 놈을 힐끔 내려보는 순간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 하였다. 천만 뜻밖에도 놈은 승업이 아닌가. 저 녀석이 어떻게 이곳에 와 있을까...? 이용후는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얼른 고개를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도 이용후는 가슴이 한참 두근거렸다. 마치 보아서는 안 될 사람을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것처럼 심장이 굳어 버렸다. 잠시 후 홍경무가 찾던 연홍이라는 기생이 들어왔다. 그녀는 홍경무를 홍조 띤 얼굴로 다가와 대뜸 큰절을 올렸다. 그 자태도 고우려니와 첫눈에 미색이었 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나으리. 별고 없으셨는지요?" "그 동안 적조했지? 그 래서, 마침 귀한 분을 만나 내 한달음에 달려오지 않았겠느냐. 어서 인사 올리거 라. 이 진사 어른이시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일어나 이용후한테도 큰절을 올렸다. "저것이 술 따르는 계집치고는 문자를 제법 쓰는 아이올시다. 시문으로 화답할 수 있으면 술딸개로는 쓸 만하지 않습니까." 홍경무가 연홍이를 추켜올리려고 애쓰는 마음이 역력하게 보였다. 그렇게하여 여자를 보는 자신의 안목을 은근히 과시하려는가 싶어 이용후는 튀어나오는 웃 음을 겨우 참았다. 잠시 후 술상이 들으오면서 기녀 하나가 더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옥수라 소개하면서, 연홍이보다 더 수줍은 티를 내었다. 홍조 띤 얼굴이 몹시 앳 되게 보여 몇 살이냐고 물었더니 열일곱이라 하였다. 그러자 홍경무가 대뜸 "연 홍이보다 세 살이나 아래로구나." 하며 다소 부러운 눈길로 넌지시 바라보았다. 연홍이가 금세 무안해 하였다. 눈치챈 홍경무가 다시 "연홍아. 나는 너만한 나이 가 좋으니, 서운해 하지 말거라." 하고 그녀를 위로하였으나, 기녀로서 나이 든 서러움이 있는 듯 한동안 얼굴을 펴지 못하였다. 술이 몇 순배 오갔다. 술이 어느 정도 오른 홍경무가 연홍이와 음담을 주고받 으며 수작을 붙이는 동안 이용후는 내내 승업이 생각을 하였다. 배 곯지 않는 길을 찾은 것은 퍽 다행한 일이나 오리가 홰(새나 닭이 앉도록 가로지른 막대) 탄 것 같다는 말이 있듯이, 하필이면 기생집 머슴이 됐나 싶어 마음이 편치 않 았다. 어린 나이에, 장안의 한량이나 오입쟁이들의 못된 수작부터 눈에 익는 것 이 마음에 걸렸다. "여보게 연홍이. 들어오다 보니까 웬 거렁뱅이로 생긴 놈이 있던데, 이 집에 몸붙이고 있는 아인가?" "네. 오갈 데 없는 거지이옵니다." "기방에서는 거지가 할 일 따로 있는가?" "그런 게 아니옵고... 며칠 전 문 밖에서 몹시 굶주린 얼굴 로 있길래 밥만 한술 먹여 보내려고 했더니, 저리 눌러 있지 뭡니까. 밥값 하겠 다고 온갖 궂은 일을 자청해서 하고 있어, 차마 내쫓지 못하고 있습니다. 꼴은 더러워도 어린 것이 기특한 구석도 있고... 나으리 보시기에 거슬리시는지요? 그러시다면, 당장 내보내겠습니다." "아닐세. 그저 물어 본 것뿐이니, 마음 쓰지 말게." 이용후는 차마 말을 덧붙일 수가 없어 짐짓 무심한 표정으로 재빨리 돌아왔 다. 놈을 당장 주선할 곳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그나마 밥 얻어먹을 곳을 찾은 것만도 다행으로 접어 두었다. 홍경무는 술을 과하게 마신 탓에 혀는 두루마리처럼 꼬부라진듯하고, 잠이 밴 눈은 업혀가는 돼지 눈깔처럼 거슴츠레하였다. 연홍은 그 모습이 민망했던지 "잠 시 주무시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며 홍경무를 부축하여 곁방에다 눕혀 놓고는 이 내 돌아왔다. "이보게, 연홍이. 내 부탁이 있네." "나으리께서 저 같은 것한테 부탁이라니 요...?" "조금 전에 말한 그 거렁뱅이 말일세." "네, 나으리. 말씀하십시오." " 웬만하면 그 아이를 잠시 데리고 있게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혹시 나으리께 서 아시는 아입니까?" "실은 그렇다네. 내가 황해도를 다녀오던 길에 우연히 만 난 아이야. 놈이 비록 꼴은 저렇고, 배울 기회가 없어 문자는 없어도 제법 똑똑 한 데가 있는 아이라네. 어디 머슴자리라도 주선하려고 했으나, 마땅한 곳이 없 어 궁리 중이었다네." "그럼, 뉘집 자식입니까?" "애비 에미가 일찍 죽어 혈혈 단신인 모양이네. 저놈한테는 그저 밥이나 먹여 주면 더 바랄 것이 없는 놈일 세." "글쎄요...? 어차피 남는 밥이나 먹이는 것이야 어렵지 않사오나, 제 집에 드나드시는 어르신들이 저 꼴을 보고 불쾌하게 생각지 않으실는지, 그게 마음에 걸립니다. 모양새가 너무 불결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 보기에도 꼴이 사 나우니, 저 아이를 손님들 눈에 띄지 않게하면 되지 않겠는가. 내가 마침 몇 푼 가지고 있는 것이 있으니, 이것으로 입성이나 갈아입히면 남 보기에도 괜찮을 성싶네만..." 이용후는 누이가 준 엽전 이십 냥을 연홍이 앞에 선뜻 내놓았다. 그러나 연홍 이가 그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나으리께서 그토록 부탁하시는 일이니, 헌 옷 한 벌 빌려 입히겠습니다." " 고맙네. 그럼, 이걸로 오늘 술값을 치르게. 홍 생원께는 이르지 말고." "그것도 아니되옵니다. 나으리가 아시면 저희만 혼나지 않겠습니까." "어허. 이것도 아니 된다, 저것도 아니 된다...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다른 생각이 있으면 말을 하게." "아닙니다, 나으리. 나으리께서는 하찮은 거렁뱅이를 그토록 애달퍼하시 는 모습을 뵙고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는 천한 것들을 가 엽게 여기시는 마음이 제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습니다." 연홍이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을 더듬거리자 옥수까지 훌쩍훌쩍 우는 것이었 다. "왜들 이러나. 앉아 있기가 심히 민망하네. 어쨌든, 내 손에서 이미 떠난 것이 니 쓰임을 말하게. 도로 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저희도 명분이 없어 그 돈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 "말해 보게." "제 집에 다시 들르시겠다는 약 조만 해 주십시오." "그야 어렵지 않은 일이네만, 내가 좀처럼 기방 출입을 안 하는 샌님이 돼놔서..." "약조를 아니 하시겠다면, 저도 나으리께서 하신 부탁을 들어드릴 수가 없겠습니다. 안 그러니, 옥수야?" "당연히 그렇지요." "어허. 이 런 낭패가 있나... 좋으네. 내 약조를 하지." "고맙습니다, 나으리." "허나, 자주 오지는 못해. 내가 기방 출입이나 할 처지가 아니라네." "...저희도 그리 알고 있 겠습니다. 그럼, 약조하는 뜻으로 제 술 한잔 받으십시오." 연홍이가 이용후에게 잔을 건네고 술을 따랐다. 그러자 옥수도 제 술을 받으 라며 또 잔을 건넸다. "내가 여기서 나갈 때, 그놈을 멀리 있도록 하게." "무슨 뜻이옵니까?" "내가 모르고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이 그놈한테 좋을 듯싶어서 그러네." "보잘것없는 거렁뱅이한테 그토록 마음을 쓰시다니..." "놈이 나를 믿고 행여 방자해질까 봐 그러네." "후에 알게 될 일이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네만, 그때까지 자네가 교육을 단단히 시키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나는 이만 일어나야 되겠네. 홍 생원을 잘 모시게." 이용후가 일어날 차비를 하자 승업이를 멀리 있게 하려고 연홍이가 앞질러 나 갔다. 그 틈을 타서 옥수에게 엽전 몇 닢 내어 화대로 주었다. 그러나 받지 않으 려고 몸을 이리저리 빼었다. 이용후가 눈을 부릅떠도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다. "내 손을 두 번씩이나 부끄럽게 하는구나." "용서하십시오, 나으리. 하지만, 오늘은 절대 받을 수가 없사옵니다. 다음에 오셔서 주시면, 그때는 받겠사옵니 다." "이런 낭패가 있나..." 연홍이가 다시 들어와 승업이를 얼씬대지 못하게 했다면서 능숙한 손놀림으로 나갈 차비를 거들었다. 7 승업이 청계옥 안팎에 비질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무 꼬챙이로 그의 궁둥이를 콕콕 찔렀다. 기생들 몸종으로 부리는 미향이라는 계집애였다. "와 기러네?" "어서 들어가 봐." 어투가 쌀쌀하기 그지없었다. 승업이한테 이라도 옮을까 봐 멀찌감치 떨어져 서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승업은 번번이 고깝게 구는 미향이가 야속하지만 자신의 더러운 꼴을 알고 있는 터라 감히 내색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밉게 보였다가는 쫓겨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상전처럼 대하였다. "와? 내래 뭐 잘못했네?" "너, 잘못한 일이 있구나? 벌벌 떠는 걸 보니까." " 기래서 떠는 거이 아니야. 추워러 기렇디." "치이. 빨리 들어가 봐. 연홍 아씨가 찾아." "연홍 아씨가? 와 기럴까?" 승업은 공연히 걱정부터 앞섰다. 혹시, 쫓아내려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하여 심 장이 코알만하게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밥만 얻어먹고 즉시 나가라는 것을 어 물쩍 눌러 있는 것이 그새 닷새나 되었다. 옷 꼴이 워낙 더러운데다 악취까지 풍기고 있어 어느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 거렁뱅이야. 빨리 가 보지 않구서 뭐 하니?" "알았어." "어쩌면 저리도 더러울까?" 미향이가 코를 잔뜩 싸쥐고는 깡총거리며 먼저 들어갔다. 승업이 미향이 발자 국을 밟으며 안채로 들어가자 연홍이가 웬 보퉁이를 들고 마루 끝에 서 있었다. "이 옷으로 당장 갈아입고, 네가 입던 것은 불에 태워라. 집 안에 온통 이가 기어 다니는 것 같구나." 들고 있던 보퉁이를 승업이 앞에 던졌다. 승업이 영문을 몰라 연홍이와 보퉁 이를 번갈아 보았다. "뭐 하구 섰니? 어서 갈아입으라니까. 그리고 목욕도 좀 해라. 너만 나타나면, 냄새가 나서 숨을 쉴 수가 없구나." "입던 옷을 꼭 태워야 합네까?" "그냥 뭉 쳐 두면 이가 여기저기 기어다닐 것 아니겠니. 그러니까, 홀랑 태워 버려." "깨 끗하게 빨갔시요." "저엉 버리기 아까우면, 십 리 밖으로 나가서 옷을 활활 털 어라. 그런 다음에 빨든지 삶든지 해. 알았지?" "꼭 기렇게 하갔시요." "네 이 름이 뭐냐?" "장승업이야요. 베풀 장, 이을 승, 업 업잡네다." "이름은 제법 유 식하게 말하는구나. 몸을 깨끗하게 씻지 않으면, 당장 내쫓길 줄 알아라." "냇가 에 가서 씻고 오갔시요." 몸만 깨끗이 하면 쫓아내지는 않을 눈치여서 승업은 그 즉시 냇가를 향해 샅 에서 비파소리가 나도록 달려갔다. 승업은 땔감을 한아름 주워 우선 불부터 피웠다. 모닥불 앞에 옷을 벗어 놓자 꼭 보리알만한 이가 셀 수도 없이 기어나와 사방 으로 도망쳤다. 옷을 들어 불길에 털었다. 그러자 이가 타는 소리가 콩 볶는 소 리를 내었다. 승업은 홀랑 벗은 몸으로 냇물로 첨벙 뛰어들어 어금니를 잔뜩 깨물고는 마치 가죽을 한 겹 벗기듯이 살을 박박 문질렀다. 때가 켜를 이루어 꼭 거북이 등처 럼 딱지가 앉아 있었다. 손으로는 잘 벗겨지지 않아 아예 돌로 긁어 내야 했다. 양잿물로 머리까지 감고 나자 너무 개운하여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냇가에서 막 돌아온 승업을 마침 기생 옥수가 발견하자 그녀는 눈을 크게 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누구야...? 옷을 갈아입으니까, 누군지 몰라보겠네. 게다가 몸까지 씻고." "연홍 아씨래 새 옷을 주셨시요." "나도 알고 있단다. 새사람이 되었구나." 이때 연홍이도 나와 달라진 승업의 모습을 보고 역시 놀란 듯 얼굴에 반가운 기운이 가득 퍼졌다. 지저분한 꼴을 말끔하게 벗어 버린 것은 아니지만 몸을 씻 고 옷을 갈아입히고 나니 전혀 다른 아이처럼 보였다. "오늘부터는 광 옆에 붙은 방에서 자거라. 네가 밥값을 제대로 하려면 집 안팎 도 깨끗이 쓸고, 땔나무도 해 와야 한다. 알았니?" "알갔습네다. 쫓아내지만 않 으믄 무슨 일이락두 하갔시요." "두고 보면 알겠지. 조금이라도 꾀를 부렸다가 는 당장 내쫓길 줄 알아." "염려 마시라요. 열심히 하갔시요." 승업은 곧장 광 쪽으로 달려가 곁에 붙은 방을 들여다보았다. 온갖 잡동사니 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장판이 모두 뜯어진 흙바닥에 간간이 쥐까지 돌아다녔 따. 문 창호지도 폐가처럼 찢어져 꼴이 사나웠고 불이라고는 한 번도 땐 적이 없는 듯 5월인데도 얼음장만큼이나 냉골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오늘부터 굴뚝잠 을 자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고대광실이 부럽지 않았다. 끼니마다 밥 배 불리 먹을 수 있고, 하늘을 지붕으로 삼지 않아도 되고, 바람을 맞지 않아도 되 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승업은 방으로 들어가 바닥에 널려 있는 잡동사니를 한쪽 구석으로 몰았다. 바닥도 말끔하게 쓸었다. 불만 잘 들어간다면 부러울 것이 없을 방이었다. "흥. 거렁뱅이한테 방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을까." 갑자기 미향이가 얼굴을 디밀고는 입 끝을 끌어올리며 비아냥댔다. 건방진 계 집애. 비웃거나 말거나 승업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방에다 큰 보퉁이 하나를 집어던졌다. "그게 뭐이가?" "궁금하믄 펴 봐라. 연홍 아씨가 주시는 거니까." 승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를 풀었다. 뜻밖에 이부자리였다. 낡아서 여기저 기 구멍이 나 있고, 때가 꼬질꼬질한 솜이 삐죽삐죽 나와 있었지만 승업한테는 과분하였다. 거렁뱅이한테 이부자리라니... 아무래도 꿈만 같았다. "이거이 웬 이불이가?" "너 얼어 죽지 말라고, 연홍 아씨가 주신 거다. 그러 니깐 일 열심히 해." 미향이는 마치 제가 덕을 베푸는 것처럼 공치사를 했다. 승업은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내색은 하지 않았다. 못된 성미로는 괘씸하기 그지없는 계집애지만 비위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다 싶어 잠자코 있었다. 연홍 아씨. 고맙습네다. 은혜 잊지 않갔시요. "내가 연홍 아씨한테 얘기해서 주신 거다. 알기나 해?" "기러니? 고맙구나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 말도 잘 들어야 한다. 알았지?" "염려 말라우. 네가 시 키는 일두 잘 하갔어." "어디, 두고 봐야지. 그리고 너한테 일러 줄 게 있어. 황 서방 아저씨한테도 잘 보여야 돼. 얼마나 무서운지 아니?" "황 서방이래 누구 가?" "우리 집 머슴야." "기런데 와 안 보이네?" "상을 당해서 자기 집에 갔 어. 낼 모레 올 거야." "황 서방이래 기렇게 무섭네?" "말만 잘 들으면 안 무섭 지." "일만 열심히 하믄 되지 않겠네?" "내가 너 걱정해서 일러 주는 거니까, 고맙게 생각해." "...알갔어." 승업은 미향이가 사라지자마자 다시 방으로 들어가 바닥에 벌렁 누웠다. 히히. 오늘부터 방에서 잠을 자다니... 행복한 기분에 빠져 곧 자지러질 것만 같았다. 이 현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 아 볼이고 허벅지고 마구 꼬집어 보았다. 연홍은 주객들이 다 돌아가자 미향이를 데리고 문단속에 나섰다. 황 서방이 할 일이지만 상중에 있으니, 돌아올 때까지는 그녀가 단속해야 했다. 청계옥은 김봉옥이 주인이었다. 그녀는 나이 서른의 퇴기로, 그 동안 모아 둔 돈으로 이 기방을 차렸다. 지난해, 마침 홀아비 보부상을 만나 살림을 차리면서부터 청계옥 을 연홍이한테 맡겼다. "미향아. 승업이는 어디 있니?" "모르겠어요. 자기 방에 있을지도 모르구요. 오라구 할까요?" "아니다. 뭘 하는지, 함께 가 보자꾸나." 승업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궁금하여 미향이를 앞세워 그의 거처로 발길을 돌렸다. 가까이 다가가 미향이 초롱불을 올리자 승업이 불도 밝히지 않은 방 문 턱에 걸터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왜 자지 않느냐?" "아씨도 아직 안 주무시는데, 제가 어드렇게 먼저 자갔습 네까." "제법 기특하구나. 그래, 방이 쓸 만하더냐?" "기럼요. 아주 훌륭합네 다." "네 주제에, 과분한 줄 알아야 한다." "기럼요. 궁궐이 부럽지 않습네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문단속을 할 테니 따라나서라." 그러자 미향이가 초롱불을 승업의 손에 넘겼다. 불을 받아든 승업은 연홍이 일러 주지 않아도 앞질러가서 꼼꼼하게 단속을 확인하였다. 하는 짓을 보면 전 혀 아이같지가 않았다. 어찌 보면 의뭉하기도 하고, 또 달리 보면 말하는 것이 영락없는 어른이었다. 생각하는 것이 여느 아이와는 사뭇 다른 구석이 있었다. 이 진사가 그토록 당부하는 까닭이 있을 성싶었다. 연홍은 이 진사가 다녀간 이후 눈만 뜨면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하였다. 생면 부지의 사내가 느닷없이 나타나 감동만 남겨 놓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양반은 틀림없지만 가세가 넉넉하지 못한 듯이 보였고, 그의 말대로 좀처럼 기방 출입 을 하지 않는 샌님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만 여자나 밝히는 한량은 분명 아닌 듯싶었다. 함께 온 홍경무와는 다른 데가 있었다. 심지가 깊고 주장이 뚜렷한 인 물로 단정하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홍경무가 기방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보면 가세는 넉넉한 듯하였다. 생원과에 급제하였으니 학문은 웬만큼 있겠지만 덕행은 그다지 양반답지 못하였다. 기생이 천한 신분임에는 틀림없지만 홍경무 는 특히 계층간의 구별이 뚜렷해 기방 여자들을 늘 함부로 다루었다. 기방에 출 입하는 양반들이 대개 그렇지만 그들 중에 홍경무는 한술 더 뜨는 위인이었다. 그래도 그가 청계옥 단골이라 차마 싫은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음담이 심하고 손버릇이 고약하지만 돈 씀씀이가 커서 아주 귀한 고객이었다. 그런한 중에 이 진사가 갑자가 나타나 연홍이 마음을 홀딱 사로잡히고 말았 다. 외모도 준수할뿐더러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니 학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 엇보다도 그의 훈훈한 인정이 연홍이를 감동시켰다. 자신한테는 물론이고 나이 어린 옥수한테도 하대하지 않고 언행을 삼갔다. 모처럼 사람 대접을 받아 보는 흐뭇한 기분에 젖어 보았다. 연홍은 이 진사가 노골적으로 그리웠다. 승업이를 맡겨 놓았으니 언젠가는 보 겠지만 그게 언제쯤일지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지극 정성으로 모실 생각으로 단단히 벼르고 있는 중이었다. 연홍이 잠에 들지 못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자 옥수가 돌아누우며 왜 자 지 않느냐고 슬그머니 물었다. 연홍이 대답을 않고 한숨을 내쉬자 옥수가 밑도 끝도없이 능히 알 만하다고 하였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러니?" "형님 마음을 맞춰 볼까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어서 잠이나 자렴." "이 진사 어른 생각하시는 거지요? 제 말이 맞지요?" "아니다." "요즘 형님 얼굴에 그렇게 쓰였어요." "네가 뭘 안다고..." "기생 삼 년에, 배운 건 눈치뿐이랍니다. 제가 그쯤 모를까 봐요? 제가 뵙기에도 훌륭하신 분이 틀림없어요." "그렇게 보이든?" "그렇구말구요. 입성이 좀 남루해서 그렇 지, 얼굴은 꽤 준수하셨어요." "옳게 봤구나. 가세가 꽤 빈곤하신 분 같더구나." "양반네들은 다 부자인 줄 알았더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봐요." "심지가 깊 으신 분이라, 그까짓 가세쯤 괘념치 않으실 분 같더라. 돈 많고 덕행이 없는 양 반이라면, 돈 많은 중인이나 상인과 다를게 없지 않겠니. 사람한테 돈이 많고 적 고는 그리 문제 될 게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 은 곧 마음이야. 마음을 잘 먹으면 북두칠성이 굽어보신다는 속담이 있지 않니. 후덕군자(후덕하고 점잖은 사람)가 따로 없다. 그분이 바로 후덕군자시다. 노류 장화 인계가절이라고, 기생쯤 누구나 건드려 볼 수 있는 것 아니겠니. 그러나 그 어른은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지. 신분에 앞서 사람을 귀히 여길 줄 아시는 분 이시다. 그날 우리한테 하신 언행을 보면 모르겠니?" "제가 비록 나이는 어려 도, 그쯤 느낄 줄 알아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거렁뱅이한테 마음 쓰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래. 옳게 봤구나." "그러면 앞으로는 생 원님을 모시고, 진사 어른을 모실 건가요?" "글쎄다...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나 같은 것이 감히 그럴 수 있겠니. 그래서 마음이 더욱 답답하구나. 생원님한테는 아직 마음도 몸도 주지 않았으니, 거리낄 것은 없다만..." "그렇다면, 진사 어른 을 모셔도 되겠네요." "그래도, 생원님을 두고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기새의 자리 저고리라고, 비록 기생질은 해먹고 살아도 언행이 간사해서야 쓰겠니." " 형님도 참... 길을 알면 앞서가라는 말도 있어요. 자신이 떳떳하면 주저할 것이 뭐 있어요? 저 같으면 진사 어른을 모시겠어요." "그래도 그렇지 않다." 연홍은 옥수와 대거리하는 것이 의미도 없고, 그럴수록 가슴만 더 답답해 한 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돌아누웠다. 눈을 붙이려 해도 이 진사 모습이 자꾸 다가 와 오래도록 마음을 산란하게 하였다. 버들잎은 푸르고 강물은 맑네 가희의 노랫소리 물소리와 함께 들리는구나 동쪽 하늘엔 해가 뜨는데 서쪽 하늘엔 비가 오네 무정한 것이 도리어 다정하구나 청계옥을 나선 이용후는 머지않아 해가 기울 시각인데도 곧장 집으로 가지 않 고 명례동 김후안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초에 그의 집에서 예배 본 지 열흘 도 채 안 되었다. 그럼에도 급히 발길을 돌리는 것은 그놈의 엽전 스무 냥 때문 이었다. 연홍이한테 주고 왔으면 마음이 홀가분했을 것을 막무가내로 사양하는 바람에 이용후한테는 큰 짐이 되었다. 요즘 기생들이 화대 긁어 내느라 혈안이 돼 있다는 소문은 전혀 근거가 없는 듯싶었다. 연홍이나 옥수한테서는 그 따위 천박함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특히 연홍이는 여느 기생과는 다른 면이 있는 듯싶었다. 인물도 빼어났고 문 장도 만만치가 않아, 재색을 겸비한 여인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인정 또 한 많아 승업이와 같은 거렁뱅이를 마다 않고 맡아 준 것만 보아도 그 마음씨를 훤히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양반집에서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훌륭한 문장가가 됐을지도 모를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용후 처지로는 연홍이를 마음에 묻어 둘 수가 없었다. 벼슬 없는 껍 데기 양반에다가 가산도 없어, 식솔이 간신히 연명하는 마당에 무슨 수로 기방 출입을 할 수 있겠는가. 연홍이를 한 번 더 보게 된다면 그것은 승업이 놈을 맡 아 준 후의를 생각해서 가보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어쨌든 두 여자와 약속을 한 만큼 한 번은 꼭 들러야 할 일이었다. 이용후가 김후안 집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사방에 어둠이 내려 앉기 시작하였 다. 김후안은 이용후의 뜻밖의 방문으로 반가움보다는 불안한 기색이 얼굴에 가 득하였다. 한낮도 아니고 늦은 시각에 느닷없이 나타났으니 그가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진사. 대체, 어인 일이시오? 혹시, 불길한 소식이라도...?" "그런 게 아닙 니다. 설명하자면 길겠고... 우선, 이것부터 받으십시오." 이용후는 엽전 꾸러미를 내놓으면서 전후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그러 자 김후안이 깜짝 놀라 꾸러미를 물끄러미 내려보고만 있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제가 어찌 이걸 받을 수 있겠소. 도로 넣으시오. 이 진사 가세가 좋다면 몰라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마당에 제가 어떻게 그걸 받는다 는 말이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김 성도께서는 교우들이 올 때마다 공복을 달래 주시니, 그것도 작은 일이 아니지요. 얼마 되지는 않지만 예배하러 오는 성 도들을 위해서 써 주십시오. 이건 천주님께 드리는 예물이라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뜻이 그러시다면, 이걸 반으로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식솔들 생 각도 좀 하셔야지요." "괘념치 마십시오. 가세는 비록 곤궁하지만, 굶어 죽을 지 경은 아닙니다." "글세,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제 말씀대로 하심이 좋을 듯 싶습니다." 김후안의 고집도 성벽처럼 단단해 결국은 그의 제안대로 열 냥만 내놓고 나왔 다. 이용후가 굳이 돈을 집에 들이지 않으려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 이었고, 아내가 자칫 다음을 바라는 마음이 생길 것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것 이 누이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게 되면, 곡식이 떨어질 때마다 누이의 손길을 은 근히 기다리는 버릇이 아내한테 생길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용후는 그것을 우 려하였다. 차라리 연홍이한테 억지로 맡길 것을 잘못했다는 후회가 자꾸 들었다. 화대나 술값으로도 받을 수 없다면, 승업이 밥값으로 셈하라고 할 것을 미처 생각지 못 한 것이 또한 안타까웠다. 하는 수 없지. 마누라 눈길 닿지 않는 곳에 묻어 둘 수밖에. 이용후가 짜낸 궁리가 고작 그것이었다. 몰래 묻어 두었다가 먼길 떠날 때 여 비로 쓸 생각으로 결론을 내렸다. 승업은 참으로 오랜만에 잠다운 잠을 잔 것 같았다. 목욕하고, 새옷으로 갈이 입고, 게다가 이불을 덮고 잠을 자 보기는 실로 여러 해 만이었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뜬 그 이듬해부터 떠돌이가 되었으니, 도대체 몇 년 만인지 셈조차 할 수가 없었다.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겠다던 결심이 그만 늦잠에 먹히고 말았다. 햇살이 뜯 어진 창호지를 뚫고 들어올 때까지 잠에 빠져 있었다. 미향이가 들어와 엉덩이 를 걷어차지 않았다면 종일 잤을지도 모를만큼 잠에 푹 취해 있었다. "이렇다니까... 거렁뱅이가 그렇지, 별수 있겠니?" "일부러 늑장부린 게 아니 야. 나도 모르게 잤댔어." "등 따시고 배부르니까, 이젠 거지를 벗어난 것 같 니?" "기런 게 아니래두. 오랜만에 구들방에서 자서 기래. 내일부텀 동트기 전 에 일어날 기야." "터진 조둥이라고, 말은 잘 한다. 연홍 아씨한테 빨리 가 봐." "나 늦잠 잤다구, 연홍 아씨래 화나셨네?" "그럴 말이라구 하니? 화가 나도 단 단히 나셨지." "큰일났구나야. 나가라믄 어카지?" "어떡하긴? 바가지 차고 거리 로 나가야지." "미향이 네가 일런?" "어머머? 내가 뭐 고자쟁인 줄 알아? 연홍 아씨가 이미 아신 거지." "당장 나가라믄 어카지...?" 승업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죽을 맛이었다. 미향이 말대로 등따시고 배가 부르니까 제 주제를 깜빡 잊었는가 싶어, 게을렀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도 미향이는 입을 가린 채 비스듬히 서서 자꾸 킥킥대는 것이었다. "와 자꾸 웃네? 남은 걱정이 돼서 죽갔는데."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가 봐. 늦게 가면 더 혼난다." 승업은 물가로 가 눈꼽만 대충 떼고는 부랴부랴 연홍이한테 달려갔다. 그녀가 이미 대청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승업은 혼쭐이 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머리 를 조아렸다. "너 지게 질 줄 아니?" "기럼요. 아주 잘 집네다." "잘됐구나. 아침 먹고, 행 랑어멈 따라서 장에 다녀오렴." "기러갔습네다.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시라요." 승업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연홍 아씨가 늦잠 잔 것을 아직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미향이 고 계집애가 괘씸했다. 남을 골탕먹이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 분명했다. 무슨 원한이 있어 그러는지 알수가 없었다. 요놈의 계집애, 어디 두고 보자. 앙갚음을 꼭 하고 말갔어. 승업은 걱정을 무사히 넘겨 다행이었다. 내일부터는 꼭 동이 트기 전에 일어 날 것을 단단히 결심하였다. 연홍 아씨 눈밖에 났다가는 여지없이 쫓겨난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가슴 깊이 새겨 두었다. 8 같은 해 8월. 전국에서 유생과 유학들 3,416인이 이미 죽은 윤선거, 윤 증 부자의 관직 박탈 을 청하는 상소가 있었다. 이들의 상소 때문에 조정이 매번 시끄러워지자 철종 이 하교를 내려 당론의 폐단을 금하더니, 9월에 와서는 만인소까지 엄금하였다. 8월 초이튿날 올린 이 상소문에서 유생들은 주자학의 대가였던 우암 송시열의 학문과 덕을 재조명하고, 송시열과 뜻이 맞지 않아 등을 돌려 노소분파의 계기 를 만들었던 윤선거와 그의 아들 윤 증의 과거 비행을 들어 모든 관직과 직위를 추삭(생전의 관직을 박탈함)할 것과 시호도 쓰지 못하도록 청하였다. 윤선거는 파평 윤씨로, 어려서부터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23세에 생원과 진 사 두 시험에 급제하였다. 그는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불합리한 점을 시정해 나갔으며, 송시열 등과 함께 경의(경서의 의미)를 강론하여 일가를 이루기도 하 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인조대왕이 친히 청나라에 항복하는 치욕을 겪고, 그의 처가 순절하는 등 나라와 집안이 참변을 당하는 마당에, 윤선거는 노예로 변장 하여 남한산성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그의 아버지 윤 황은 비겁한 자식이라하여 상종치 않았으며, 유림들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제서야 뉘우쳐 날마다 송시열과 문경공 김 집의 문 앞에 엎드려 다시 의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허 락할 것을 애걸하였다. 이에 송시열이 지난날의 허물을 묻지 않고 덮어 주었다. 그의 아들 윤 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죽자 사국(역사를 기록하는 실록청 및 일기 청)에 서찰을 보내 병자호란 때 윤선거가 변복하고 도주한 것은 잘못이 없으며, 이율곡도 산에 들어가 중이 된 잘못이 있었으므로, 아버지 윤선거도 결코 의리 가 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주장하였다. 또한 윤선거의 문집을 간행하여 널리 유 포시키는 등 아버지의 명예를 복권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유생들은 윤 증이 한때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셔 학문을 배웠고, 송시열이 아버지 윤선거 에게 참회의 길을 열어 준 사실을 망각하고 배신하였음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상소가 올라오자 철종이 다음과 같은 비답(상소 에 대한 임금의 하답)을 내렸다. "당시에 스스로 시비가 있었는데, 지금 와서 무슨 변해(조급하게 해명함)가 그 리도 많은가. 대저, 남의 장단에 대해 의논하기 좋아하는 것을 내가 매우 미워하 고 있다. 소두(연명으로 낸 상소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주동자)를 우선 정거 (단분간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는 벌)시키게 하라." 임금의 뜻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윤선거 부자에 대한 상소가 다시 올라오자 철종은 상소에 참여한 유생들을 조정을 어지럽게 하는 무리로 단정하고 이를 엄 중히 경계할 뜻으로, 소두를 형조로 하여금 정배(유배)케 하는 등 엄중하게 문책 하였다. 이러한 상소가 있기 직전, 이용후는 좌참찬 매부 김우근 집에 머물러 있었다. 이는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여 실은 연금상태라고 해야 옳았다. 유생들이 상소문 을 만들어 놓고 오 혁을 필두로 연명부를 작성하는 동안 행여 이용후가 끼여들 까 싶어 이를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굳이 이러한 방법을 취한 것은 이용후의 안 전보다는 김우근 자신이 다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지난 5월, 장헌세자 추존 상소 때 이용후가 명단에 들어 영의정 김좌근에게 심히 추궁을 당한 경험이 있 어 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중간에서 제일 민망한 사람은 역시 이용후 누이 이씨였다. 남편 김우근의 처 사가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어 동생 대하기가 참으로 민망하였다. 시비곡직 은 나중에 따지더라도, 무려 3,400여 명이나 되는 유생들의 일치된 뜻으로 올린 상소라면 전혀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학문이 있고 분별이 있 는 사내대장부의 뜻을 꼭 이런 식으로 꺾어서 옳은 것인지, 마음에 걸려 밤에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여자가 어찌 남편 뜻에 불만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씨는 동생이 고마울 뿐이었다. 그 속이 오죽 상하랴마는 별다른 내색 없이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누이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제 발로 걸어나갈 수 있었다. 옥에 가둔 것 도 아니고, 족쇄를 채운 것도 아니고, 목에 칼을 씌운 것도 아니었다. 임금의 마 지막 하교가 떨어져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만 출입을 삼가라는 분 부를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이용후가 매부의 분부에 순종하는 눈치였다. 5월의 만인소 사건 때 심한 질책이 효험을 봤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어쨌든 동 생이 집안에 화근을 만들지 않아 무엇보다도 다행이었다. 이씨는 박 서방을 불 러 이용후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자주 들여다보라고 일렀다. 결국 염탐하라는 뜻이어서, 그녀의 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당마님의 분부를 감히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박 서방을 수시로 불러 이용후의 거동을 미주알고주알 캐 물었다. "이 진사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던가." "별채에서 책만 읽고 계십니다 요." "중식은 들여갔는가." "곧 들여갈 침입니다요, 마님." "아산댁한테 반주 올리는 거 잊지 말라고 하고, 오늘은 육회를 들여놓도록 이르게. 가둬 놓은 사람 한테 먹이기나 해야지. 책만 읽는다면, 뜰에 나와 산책도 아니 한단 말인가?" "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요, 마님." "박 서방한테 말도 붙이지 않고?" "저 같은 것한테 하실 말씀이 뭐 있겠습니까요." "저러다가 입에 곰팡이 필까 걱정이구 만. 박 서방이 잘 보살피게."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요, 마님." 잠시 후 아산댁이 점심상을 들고 사랑채로 가는 것을 보고 박 서방이 잔걸음 으로 따라붙었다. "육회 올리라는 마님 분부, 잊지 않았겠지?" "어느 분의 분부라고, 감히 잊겄 시유." "반주를 넉넉하게 따라 오지 그랬어." "점심 반주로는 좀 많다 싶을 만 큼 넣었구먼유." 박 서방이 방 한가운데다 상을 내려놓았는데도 이용후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 았다. 책을 한 번 붙들면 마치 바위가 된 것처럼 장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 있곤 하였다. 책 앞에서는 요지부동이었다. "나으리. 진지 잡수시지요." 그래도 그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박 서방은 독서를 방해하는가 싶어 송구 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더운 음식이 식는데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다. "나으리..." "알았으니, 나가서 일보게." "그럼, 쇤네는..." 박 서방이 그제서야 한숨 돌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용후가 갑자기 손을 저어 박 서방을 그 자리에 다시 앉혔다. "...무슨 분부신지요, 나으리." "게 좀 앉아 있게." 이용후가 느릿느릿 책상을 물리고는 비로소 밥상 있는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 다. 박 서방이 서둘러 주발 뚜껑을 열어 주었다. "분부하실 일이 계시면 말씀하십시오, 나으리." "시킬 일은 없네. 밥 먹을 동 안 말벗이나 하자는 뜻이지." "쇤네같이 천한 것이 어찌 나으리 말벗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말벗은 당치도 않습니다요." "저엉 그렇다면, 앉아만 있게... 내당마 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 "물론, 안방에 계십죠." "듣자 허니, 승업이라는 아 이가 여기를 또 왔었던 모양인데, 사실인가?" "그놈이 기어코 나으리께 고했구 먼요. 아니 허겠다구, 약조까정 하구서." "박 서방의 후의가 매우 컸다는 얘기 를 들었네." "후의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요. 추위에 굶주려 있는 것이 하도 딱 해서 밥 한술 먹여 보냈을 뿐이옵니다." "요즘처럼 박한 세상에, 그 인정이 고 맙지 않은가." "쇤네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요. 그런데, 나으리." "왜 그러나?" "감히 여쭤 봐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요." "뭔지, 말허게." "나으리께서 그 아 이한테 특별히 마음 쓰시는 연유가 어디에 계신지, 가끔 궁금했습니다요." "조 금도 궁금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네. 그저, 나도 모르게 정이 들어서 그럴 뿐이니 까. 전혀 근본이 없이 자란 아이가 아닌 듯싶어, 더 마음이 가지 뭔가. 박 서방 이 보기엔 어떻든가." "제가 보기에도, 평생 밥이나 얻어먹을 녀석은 아닌 듯싶 었습니다요. 고 나이에 생각이 깊을 때가 있고, 예의도 차릴 줄 아는 놈이었습니 다요." "잘 봤네. 고양이 달걀 굴리듯, 재주도 있는 놈일세. 허지만 씨름 잘 해 도 등허리에 흙 떨어질 날 없다는 말이 있듯이, 왕좌대재(왕을 보좌할 수 있는 훌륭한 재능)를 지녔어도 사람이 시운을 만나지 못하면 평생 더러운 팔자로 살 수도 있는 것일세." "녀석이 요즘 어디에 가 있는지, 쇤네도 가끔 궁금합니다 요." "당분간, 밥은 굶지 않을 걸세." "나으리께서 그걸 어찌 아십니까?" "별 것은 아니네만, 방도를 마련해 주었네." "그럼, 어디 머슴으로 넣어 주셨습니까 요?" "하는 일이 그러니, 머슴이나 진배가 없지." "더 여쭙지는 않겠습니다만, 나으리께서 적선하셨습니다요." "글세...? 적선이 될는지 악연이 될는지는 두고 볼 일이지." 승업을 연홍이한테 떠맡기다시피 한 이용후는 그 후로 청계옥에 딱 한 번 들 렀을 뿐 더는 가 보지 못했다. 기방에 자주 출입할 처지도 못 되거니와 원래 바 탕이 한량의 기질이 전혀 없는 위인이라 선뜻 나서게 되지 않았다. 그날, 기방에 가는 양반이 차마 빈손으로 갈 수가 없어 땅에 파묻었던 엽전 열 냥을 지니고 갔었다. 공교롭게 청계옥에 들어서자마자 승업이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어찌 외면할 방도가 없었다. 놀랍게도 거렁뱅이 때를 말끔하게 벗어, 부모 밑에서 자라는 여 염집 아이처럼 보였다. 얼굴이 깨끗해진 덕에 이목구비가 분명하게 드러난데다 가, 단정한 입성 하나만으로도 그가 거지였다는 사실을 깜빡 잊을 정도였다. 승업은 이용후가 느닷없이 나타나자 마치 낯선 얼굴을 바라보듯 한참 동안 넋 이 나간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이용후가 제 앞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놈아. 인사하는 것도 잊었느냐?" 이용후는 시침을 뚝 떼고 넌지시 꾸짖었다. "...네, 나으리." 승업이 눈물을 글썽글썽한 채로,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표정으 로 넙죽 엎드렸다. 그리곤 어깨를 가볍게 떨었다. "나으리. 안녕하셨습네까? 여게는 어드렇게 오셨습네까?" "나는 올 만하니까 왔다만, 네놈은 거렁뱅이 주제에 웬 기방 출입이냐?" "아닙네다, 나으리. 여게 머슴이 됐시요." "그거 잘되었구나. 누가 너 같은 놈을 머슴으로 써 줬는지, 참 으로 고마운 일이로구나." 그러자 승업이 갑자기 의기양양하여 "저 아씨래 허락했시요." 하고는 연홍이를 가리키며 곤댓짓을 한참 하였다. "그래, 밥은 배불리 먹느냐?" "기럼요. 배가 터지게 먹습네다." "밥 실컷 먹 는 것이 소원이더니, 이젠 더 바랄 것이 없겠구나." "기렇습네다. 그리고 연홍 아씨래 저한테 방도 주셨습네다." "네놈이 호강하는구나. 그 대신 일을 열심히 해야 되느니라." 이용후는 한바탕 너스레를 떨고는 연홍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이 용후가 능청을 떨고 있는 동안 웃음을 참느라고 진땀을 뺐다. "어쩌면, 연극을 그리도 잘 하시옵니까? 저는 웃음을 참느라고 죽을 고생을 했 사옵니다." "저놈이 밥값이나 제대로 하는지 모르겠네." "염려 아니 하셔도 되 옵니다. 생각보다는 훨씬 부지런하고요, 똑똑한 데도 많은 아이옵니다." "데리고 있을 만하다는 뜻인가?" "나으리께서 자주 안 오시니까, 생각을 달리 해야 될 것 같사옵니다. 이토록 오랫동안 뵙지 못할 줄은 몰랐사옵니다. 춘향이 보러 남 원엘 가셨댔습니까, 황진이 보러 송도엘 가셨댔습니까." "남원데 갔더니 춘향이 는 이미 이몽룡과 재회를 한 뒤라 한 발 늦었고, 황진이는 한창 화담 선생을 유 혹하는 중이라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지 뭔가. 그래서 이리로 오는 길일세. 허허 허..." "나으리께서 그리도 무정하신 분인지 미처 몰랐사옵니다." "무안 좀 그만 주게. 그렇지 않아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중일세." 그날은 바삐 갈 곳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술상을 간단하게 준비하도록 미리 당부하였다. 오랜 시간 앉아서 흰소리 늘어놓다가 실수나 저지를 것이 뻔하여 마음에 허리띠를 단단히 묶었다. 연홍이는 반가워하는 얼굴이면서도 한구석에 박힌 서운한 표정은 끝내 빼내지 않고 있었다. 이용후는 그 속을 짐작하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할 수밖에 없었다. 섣불리 넘겨짚을 수도 없거니와 속내를 안다 고 해도 그녀 감정에 선뜻 편승할 마음이 발동하지 않았다. 이용후는 다음을 기약하고 마치 도망치듯 청계옥을 빠져나왔다. 연홍이도 더 붙들어 놓는 것이 속절없는 짓이라 판단했는지 군말없이 따라 일어섰다. "나으리. 언제 또 오시옵니까?" 연홍이 조신한 몸짓으로 따라붙으며 속삭이듯 물었다. 이용후는 그녀의 표정 을 힐끔 곁눈질하였다가 얼른 돌렸다. 그 눈빛에 애소가 가득한 것처럼 보여 가 슴이 뜨끔하였다. "기약은 못하겠고..." "약조를 해 주십시오. 애간장이 타서 곧 재가 되겠사옵 니다." "애교가 보통이 아닐세." 연홍의 어조로 보아 분명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싶어 마음에 파도가 일기 시작하였다. 이용후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짧게 숨을 토하고는 서둘러 대 청을 내려섰다. 그러자 승업이 다람쥐처럼 달려와 이용후가 신을 꿰기 좋게 거 들었다. "나으리. 벌써 가십네까?" "오냐, 오냐. 연홍 아씨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알았 느냐?" "네, 나으리." "네놈이 꾀부린다는 소식이 들리는 날에는 다시 상종치 않을 것이니, 내 말을 명심하렸다." "절대루 꾀부리지 않갔시요." "약속할 수 있느냐?" "네, 나으리." 이용후가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지르자 승업이 "나으리, 나으리." 하며 숨 가쁘게 다시 따라붙었다. "왜 그러느냐?" "이자 가시면 언제 오십네까?" "...내가 오고 싶을 때 오느니 라." "자주 오시라요." 승업이 이용후를 앞질러 얼굴을 쳐들어 물었다. 그 표정이 안타까움을 노골적 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용후는 승업의 머리라도 쓰다듬고 싶었지만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삼갔다. 이용후는 박 서방으로 하여금 점심상을 내놓도록 이르고는 방문을 열어 연못 에 눈길을 내려놓았다. 때맞춰 잔잔한 바람이 수면을 핥고 날아가 열매가 촘촘 히 달린 살구나무 그림자를 일그러뜨렸다. 그 위로 연홍이와 승업의 얼굴이 불 쑥불쑥 솟아 그의 가슴을 한참동안 저리게 하였다. 사랑 모여 불이 되어 가슴에 피어나고 간장 썩어 물이 되어 두 눈으로 솟아난다 일신에 수화상침하니 살 둥 말 둥 하여라 승업은 이용후가 다녀간 후부터 공연히 마음이 산란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 았다. 꾀부리지 않고 일 열심히 하겠다고 단단히 약속은 했지만 그의 모습이 눈 에 아른거려 일마다 건성으로 하였다. 구름처럼 나그네처럼 느닷없이 나타나 마 치 바람이 사라지듯 약조도 않고 훌쩍 떠나 버린 그가 한편 야속하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죽은 어머니보다 더 그리운 적이 많았던 사람인데 무심한 표정으로 떠난 뒷모습이 가슴을 저리게 하였다. 승업이 빗자루에 턱을 괴고 망연히 앉아 있는데 마침 미향이가 그 모습을 발 견하고는 살금살금 다가와 승업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아이고 깜짝이야. 간 떨어지갔어야." "하라는 일은 안 하고, 하늘은 왜 올려 다보니? 감이라두 떨어질까 봐?" "기런 게 아냐. 생각 좀 했댔어." "흥. 네 꼴 에, 생각은 무슨 생각? 고작, 밥 먹을 궁리나 했겠지." "기런 게 아니래두. 사실 은 방금 가신 우리 나으리 생각을 했댔어. 나으리께서 어드렇게 오셨는지, 기거 이 궁금하디 뭐이가." "병신아. 그분이 오늘 처음 오신 줄 아니?" "기럼, 언제 또 오셨댔는데?" "아마, 지난 유월에 오셨을 거다. 홍 생원 나으리랑 함께 오신 것두 모르구 있었니?" "뭐이 어드래? 유월달이라구? 기럼, 내래 있을 때 아니 가?" "병신. 네가 그분들이 벗어 놓은 신발을 가지런히 모아 놓구서두 몰라?" "기런데 와 내래 보지 못했단 말이가. 거지뿌렁 하디 말라우. 내래 와 못 봤갔 네." "그러니까, 네 능깔은 까막눈이지. 글자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사람도 못 알아보는 배냇병신이구나." "알 수 없는 일이네. 나으리가 와 아는 체를 하시디 않았을까?" "바보야. 그건 연홍 아씨랑 짜고 그러신 거야. 이건 비밀이니까 너 만 알구 있어야 한다. 알았지?" "기거이 뭐인데 비밀이가?" "연홍 아씨가 너를 이 집에 머물도록 허락한 것은 이 진사 나으리께서 특별히 부탁하셨기 때문이 야. 알기나 해?" "기거이 참말이가?" "그렇대두. 두 분이 하신 얘기를 내가 다 들었단 말야." "기걸 와 진작 말하디 않았네?" "어른들이 짜구서 한 일을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있니?" "우리 나으리께서 부탁하셨구나. 기러믄 기렇디." 승업은 그의 후의가 새삼 고마워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 다. 평생을 하늘처럼 높이 받들어도 정성이 모자랄 분이라 생각하였다. 나으리. 고맙습네다. 정말 고맙습네다. 이 은혜, 잊디 않갔시요. 승업은 미향이가 비웃거나 말거나 이용후가 나간 대문 쪽을 향해 넙죽 엎드려 큰절로 삼배를 하였다. 그러자 미향이가 입을 삐쭉거리며 뒷걸음질로 슬그머니 물러섰다. 병신. 대문에다 절을 하는 놈이 어디 있담. 9 김우근 부인 이씨는 남편의 조반상 들어가는 시각에 맞춰 그의 침방으로 들어 갔다. 그는 이미 산책을 마치고 독서를 하는 중이었다. 아침잠이 없는데다가 원 체 부지런해서 동이 트자마자 정원을 산책하고 들어와 독서하는 습관이 오랫동 안 몸에 밴 사람이었다. "진지상 들이라 할까요?" "그러시오." "입궐하십니까?" "그렇소." 이때, 문 밖에서 상노(밥상 나르는 일과 잔심부름을 맡은 아이) 원향이가 "내 당마님. 대감마님께 진지상 올릴깝쇼?" 하고 물었다. "그래. 어서 올리거라." "대감마님하고 겸상하시는지요." "아니다. 대감마님만 잡수신다." 그러자 김우근이 "부인도 같이 들지 않구요?" 하고 넌지시 물었다 "아닙니다. 집에 있는 사람이 일찍 먹을 일이 뭐 있겠습니까. 저는 나중에 먹 겠습니다." 이어서 밥상이 들여졌다. 이씨는 주발 뚜껑을 열고 잔손을 놀려 이것저것 시 중을 들었다. "처남은 요즘 어떻게 하고 있소?" "종일 책만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대감께 그 일을 의논드릴 참이었습니다만... 이제는 그만 풀어 줘도 아니 되겠습니까?" "...내 생각도 그렇긴 하오" "조정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상소 문제로 의견이 많은지요." "요즘은 잠잠한 편이오만." "그러면, 내보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구료." "후환은 없을는지요." "이번 일에 처남이 관여 한 것이 아니니까, 후환을 염려한 것은 아니잖소. 오로지 예방을 위해서 내가 선 수를 친 것이지." "이번 일은 대감께서 예비를 잘 하신 겁니다. 그렇지 않았으 면 저 사람 이름 석 자가 들어갔을 건 뻔한 일입니다." "어쨌든, 차후로도 그런 일에 끼여들지 않도록 단단히 이르시오." "단단히 쐐기를 박겠습니다." 김우근이 탄 사인교가 대문을 나서자마자 이씨는 박 서방을 시켜 이용후를 내 실로 불러들였다. 마침 이용후는 오늘로 연금당한지 꼭 한 달 됐음을 계산하고 있던 참이었다. "아침은 드셨나?" "아직, 식전입니다." "잘됐구먼. 나도 아직 식전이니, 여기 서 함께 드시게." 이씨는 그 즉시 상노를 불러 밥상을 들이도록 분부하고는 동생의 안색을 힐끔 힐끔 살폈다. 족쇄 채운 지 한달이나 되었음에도 의외로 마음은 태평한 사람처 럼 보였다. 따로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은 아닌지 한편으로 불안한 마음도 들 었다. 비록 동생이긴 하지만, 원체 속내가 깊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 그 속을 들여다볼수가 없어, 마음이 답답하고 은근히 걱정되었다. "그래, 요즘 심기는 어떠신가." "매끼니마다 잘 먹고 잘 자고, 게다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데, 심기 불편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참말이라면 다행일세. 대감께서도 자네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시다네. 그러니 다소 서운한 점이 있더라 도 오래 새기지는 말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예방 하신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아암. 그래야 하구말고." "누님께서도 오늘로 며 칠째가 되는지는 알고 계시겠지요." "알다마다. 그새 한 달이 되었네." "그렇습 니다. 그러니, 이제는 나갈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 대감께서 그리 말씀하셨네. 그래서 내가 자네를 보자 한 것이고." "저도 마침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상노 둘이서 밥상을 맞들고 들어서는 바람에 얘기가 잠시 중단되었다. 상이 내려지자 남편한테 했던 것처럼 동생의 주발 뚜껑을 서둘러 열어 주고 좋은 반 찬은 먹기 좋게 위치를 바꿔 놓았다. "천천히 많이 드시게. 그 동안 수고가 많았네." "누님. 고생은 없다지 않았습 니까. 못난 동생 하나 때문에 오히려 누님께서 마음고생을 하셨지요." "알아주 니 고맙구먼. 어서 드시게." 이씨는 마치 어린 자식 밥수발 들 듯이 반찬 이것저것을 가려 주면서 그와 함 께 보냈던 어린 시절을 문득문득 떠올렸다. 가세는 넉넉하지 못했으나 높은 학 식과 깊은 덕망으로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던 부친과 당시 알뜰한 살림과 재 색을 겸비한 여인으로 칭송이 자자했던 모친 슬하에서 오누이가 유별나게 다정 했었다. 부모 밑에서 엄하게 교육을 받은 남매인지라 예의범절이 남달리 바르고 공부에도 게으른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풍요하지 못했던 살림 중에도 음식 을 놓고 한 번도 시샘하거나 다툰 적이 없었다. 그만큼 두 사람의 정이 각별하 였다. 그의 부친 이명한은 선조 때 호조, 형조, 병조 3조판서를 두루 지냈으면서도 청렴한 관리로 이름을 남겼던 이희검과 그의 아들 이수광의 후손답게 역시 재물 에 욕심이 없었으며 안빈낙도를 삶의 신조로 삼은 선비였다. 이용후는 어릴 때 부터 그러한 부친의 생활 철학을 보며 자라 왔고, 결국 곤궁한 가세까지 이어받 은 셈이 되고 말았다. 다행이 누이 이씨는 권세가인 안동 김씨 가문에 시집 와서 살림에 부족함을 모르고 살고 있지만, 벼슬도 없이 가난하게 사는 동생이 늘 마음에 걸려 다정했 던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이용후가 누이한테만은 매사 고분고분하게 구는 것도 결국 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사람으로서 갈 길이 아니면 곁눈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지만, 차마 누이의 마음만은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매부인 김우 근 측근들의 온갖 불합리한 행태가 마땅치 않아도 누이를 떠올리면 생각대로 말 할 수도 없고 행동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나가면 곧장 집으로 가실 텐가?" "집을 너무 오래 비워서..." "내가 자네 식솔들이 살 도리는 해 놓고 있으니, 굶지는 않을 걸세." "...그러셨군요. 누님한테 염치가 없습니다." "그런 말은 하지 마시게. 자네와는 동기간 아닌가." 기어코 이씨가 동생한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혼자만 호강하는 것도 송구하 고, 집안의 안이만을 생각해 동생을 연금한 것도 미안하고, 자신의 깊은 생각이 따로 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있는 동생이 고마워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어쨌든, 집으로 먼저 가시게. 박 서방이 전하는 말로는, 자네 여식이 고뿔이 심히 든 것 같다고 했으니, 가는 길에 약 몇 첩 지으시게." "고뿔이야 항다반사 가 아닙니까. 우려할 일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 않네. 기침을 심하게 하는 모 양일세. 기침이 깊으면 폐가 상한다지 않는가. 예사롭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네.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니만큼 병이 쉬이 낫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기침병이 들면 어른도 고생인데, 어린것이야 오죽하겄나. 불쌍한 것..." "애비를 잘못 만난 제 복이지요." "서둘러 약전부터 들르게. 종로 '배우개'에 가면 약전 골이 있지 않은가?" 이씨는 이용후가 듣지 않게 속으로만 혀를 차면서 무엇인지 보에 싼 뭉치를 내놓았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이걸루 약도 짓고, 육류나 좀 사도록 하시게." "누님. 이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지난번에는 박 서방 편에 주시는 것이라 할 수 없이 받았습니다만, 오늘은 아니 받겠습니다. 도로 넣으십시오." "이 사람아. 자식을 죽일 셈인가? 고집을 부릴 때 부려야지." 이씨가 갑자기 파르르 역정을 내면서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이용후는 그만 무안해서 고개를 맥없이 떨어뜨리고 말았다. 누이 집을 나선 이용후는 방향을 잡아 곧장 약전으로 들어갔다. '변약방'의 현 판을 걸어 놓고 있는 이 약전은 전에 서너 번 온 적이 있어 이제는 단골이 된 셈이었다. 그래서 주부(약방 주인)인 변씨와도 얼굴을 익힌 사이가 되었다. 변 주부가 처방전을 내고 있는 동안 사동 하나가 구석에 앉아서 약재를 열심 히 썰고 있었다. 이용후는 사동이 하는 일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승업의 얼굴 을 떠올렸다. 그놈한테도 약재나 썰게하면 어떨까 생각하였다. 허구한 날을 기생 들 심부름이나 하면서 겨우 밥이나 얻어먹는 것보다는 약전에 와서 일이라도 배 우는 편이 훨씬 장래성 있는 일이겠다 싶었다. 연홍이 각별히 마음 쓰고 있어 숙식은 걱정이 없겠으나 역시 기방이라, 보고 듣는 것이 대개 음행한 것뿐이니 유익할 리가 없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기생 치맛바람을 오래 쏘이다 보면 커 서 난봉꾼밖에 더 되랴 싶기도 하였다. "변 주부한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만." "네, 나으리." "혹시, 사동 하 나 더 부릴 생각은 없소이까?"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 "그럴 뜻이 있다면, 천거할 아이가 하나 있어서 그러오." "글쎄요...? 똑똑한 아이가 하나 더 있으면 좋기는 합니다만..." "놈을 면대할 의향은 있소?" "나으리가 천거하시는 아이라면 믿을 만하겠습니다." "그럼, 데리고 와도 좋다는 뜻으로 알겠소이다." "나으리께서 몸종으로 부리던 아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용후는 다행이다 싶어 승업과의 전후 사연을 대충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변 주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분명히 긍정적인 표정을 지었다. "나으리 말씀을 듣고 보니, 문뜩 사람의 연이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듭니 다." "실은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소이다." "사람의 덕이라는 것이 태어 날 때 이미 안고 나는 것이라 싶습니다. 그 아이가 나으리 같은 분을 만났으니 말씀입니다." "전생의 인연인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소." "그런 것 같습니다. 어 쨌든, 한 번 만나 보겠습니다." "고맙소이다." 이용후가 집에 당도해 사립문을 밀고 들어가자 대뜸 아이의 기침 소리가 먼저 마중을 나왔다. 듣는 사람이 곧 자지러지고 말 것처럼 기침을 매우 심하게 하였 다. 이용후가 인기척을 내자 그의 아내가 근심과 안타까움이 가득한 얼굴로 나 왔다. "원이가 기침을 심하게 하는구료. 약을 지어 왔으니, 어서 달여 먹이도록 하시 오." "어찌 아시고 약을 지어 오셨습니까?" "박 서방한테 들었소." "걱정하실 까 봐 말씀드리지 말라고 일렀건만..." "누님의 걱정이 대단하셨다오." "더욱 민망하군요." "괜한 마음 쓰지 말고, 어서 약이나 달이구료." 아이 얼굴을 들여다보니 꽤 여러 날 앓았던 것이 분명하였다. 눈이 벌겋게 충 혈되었고, 신열이 마치 불덩어리 같았다. 입술도 바싹 말라 죄다 갈라졌고 얼굴 곳곳에 열꽃이 솟아 있었다. 한식경(한 차례 음식을 먹을 시간)이 지나자 그의 아내가 약 달인 것을 가지 고 들어왔다. 약을 달이는 동안 얼굴이 많이 밝아진 것처럼 보였다. 비로소 안도 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부인이 걱정 많이 했겠소."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파뿌리를 애써 달여 먹였는데도 전혀 낫는 기색은 없고... 이러다가 애 죽이겠다 싶어서, 나으리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천식이 아니니 다행이오. 천식 에는 영약이 없다지 않소. 누님은 아이가 폐렴이나 걸리지 않을까 염려하십디 다." "전들 그 생각을 왜 아니 했겠습니까.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자니 까, 별별 생각이 다 들지 뭡니까." "이젠 걱정 안 해도 될 게요. 저 약만 먹이면 금세 차도가 있을 것이라 했으니, 마음놓도록 하구료." 이용후는 새삼 식솔들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라에서 주는 벼슬길도 마 다하고 빈둥거리고 있어, 자신의 고집에 조금 후회가 들기도 하였다.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닌 주제에 허구한 날 놀고 먹으니 무럭무럭 커 가는 아이들 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평생 삽질 한 번 해 본 적이 없어 작심 하고 팔을 걷어붙일 일거리도 없는 처지였다. "양식은 있소?" "...실은, 박 서방 편에 보내 주신 것이 있습니다. 나으리 마음 언짢으실까 봐 말씀드리지 않으려구 했습니다." "나도 누님한테 들어서 알고 있 소. 기분이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 모르게 하신 일이니 어쩌겠소." "동기간 의 우애라고 생각하시면, 꼭 마음 쓸 일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리 생각할밖에 요. 그리고 이건 누님이 주신 것이니 요긴하게 쓰도록 하시오." 이용후는 누님한테 받은 엽전 꾸러미를 아내 앞에 내놓았다. 약전에 가서 펴 보니 무려 백 냥이었다. 이용후는 그 중에서 약값 치르고 또 삼십 냥을 따로 떼 어 놓았다. 며칠 후 승업이를 데리러 청계옥에 가려면 술값은 있어야겠다 싶어 따로 두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펴 보구료." 아내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보를 폈다. 잠시 후 그것 이 돈임을 알자 그녀는 마치 해괴한 물건을 보듯 흠칫 놀란 몸짓으로 뒤로 물러 앉는 것이었다. "왜 그리 놀라시오?" "돈이 아닙니까?" "돈을 처음 보시오?" "그런 게 아니 라, 이렇게 많은 걸 주시는 까닭을 모르겠어서 그럽니다." 순간, 이용훈는 '그게 족쇄를 채운 값이라오.' 하는 말이 목구멍을 오르락내리 락하였지만 차마 입밖에 내지는 못하였다. 전혀 내막을 모르고 있는 아내에게 전후 사연을 새삼 알릴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어허. 동기간의 우애로 생각하자는 사람이 누군데, 그런 말을 하시오?" "양 식을 보내 주신 것만도 과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돈까지 얹어 주셨으니 놀랄 수밖에요." "고마운 마음으로 알았으면 된 것이오." 이용후는 눈물을 찜끔거리는 아내 보기가 민망해서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와 버렸다. 승업이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한창 밥을 먹고 있는데, 미향이가 숨이 턱에 차 가지고 들어와 "승업아, 승업아."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와 기러네? 누구래 나를 찾안?" "거렁뱅이는 못 속인다니까. 그저, 눈만 뜨 면 처먹지." "남 밥 먹는데 와 기래?" "이 병신아. 한가하게 밥만 처먹구 있으 면 어떡하니? 지금 누가 오셨는지 알기나 해?" "누구래 오셨는데?" "병신아. 빨리 나가 봐." 미향이가 승업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찼다. 그래도 승업은 남은 밥이 아까워 선뜻 일어나지 못하고 볼이 터지도록 밥을 쑤셔 넣었다. 더욱 답답해진 미향이 가 이번엔 승업의 볼때기를 쥐어박았다. 그러자 행랑어멈이 미향이 잔등을 후려 갈겼다. "이년아. 먹을 때는 개도 안 때린다구 했어. 네년이 무엇인데 이 아이를 번번 이 구박이냐. 네 밥 축내니? 못된 년 같으니라고." "행랑어멈은 알지두 못하믄 서 왜 때려요?" 미향이 눈물을 찜끔대면서 턱을 바싹 쳐들었다. 기가 찬 행랑어멈이 "아니, 요 년이...?" 하고는 부지깽이를 집어들자 미향이가 다람쥐처럼 재빨리 부엌을 빠져 나갔다. "이놈아. 너는 사내자식이 계집애한테 왜 맨날 얻맞기만 하냐? 저년한테 죄지 은 것 있어?" "잘못한 것 없시요." "그런데 왜 쥐어박혀?" "나만 보믄 괜히 못 살게 굴디 뭡네까." "너두 맞때리면 되잖니. 그럴 양이면 불알을 떼 버려라. 사내자식이 그리도 못나서야 원..." "여자를 어드렇게 때리갔습네까. 내래 기냥 참갔시요." "꼴에... 어이 나가 봐라. 손님이 오셨는 모양이다." 승업이 결국 그 밥을 다 긁어 먹고서야 자리를 떴다. 미향이 그때까지 문밖에 서 있다가 승업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마치 독 오른 고양이처럼 달려들어 귀를 마구 비틀었다. "병신아. 냉큼 따라나올 일이지, 여태 뭘 꾸물거리니?" "이거 놓으라우." 승업이 귀를 잡힌 채 꼼짝 못하고 미향이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행랑어멈 말처럼 정강이를 냅다 걷어차고 싶었지만 계집애가 원체 보잘것없는 몸피라 차 마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병신아. 연홍 아씨 방에 누가 와 계신지 모르지?" "누루래 오셨는데 이러 네?" "가르쳐 줄까, 말까...?" "지금, 숨바꼭질하네?" "병신아. 이 진사 어른이 오셨어." "뭐이? 기거이 참말이가? 참말, 이 진사께서 오셨단 말이디?" "그렇 다니까. 내 눈으루 똑똑히 봤는걸." "기래두, 내가 봐야디 믿갔어." 승업이 코를 벌름대면서 이용후가 있다는 곳을 향해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달 려갔다. 그러자 미향이가 화들짝 승업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이 병신아. 거기가 어딘 줄 알구서 감히 달려가니? 네 꼬락서니에, 감히 연홍 아씨 방엘 들어간단 말야?" "언제 들어간댔어? 거저 밖에서 슬쩍 보기만 할 기 야." "병신아. 거긴 나만 빼고는 아무도 얼씬댈 수가 없는 곳이야. 알았니?" "와 얼씬대지 못하네?" "이런 병신. 거긴 상노나 들어가는 곳이지, 너처럼 거렁 뱅이는 근처에도 가면 안 돼." "내래 와 거렁뱅이네. 지금은 이 집 머슴이잖네. 내 말 틀렸네?" 승업이 숨을 씩씩대며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순간 미향이 겁을 먹고 재빨리 뒷걸음질쳤다. "병신. 머슴이 무슨 벼슬이냐? 맨날 머슴타령이게." "거렁뱅이보담은 낫디 않 네." "그럼 평생 남의 집 종 노릇이나 해먹구 살어라, 이 병신아." 미향이가 왠지 볼을 파르르 떨며 승업의 정강이를 또 걷어찼다. 승업이 부릅 떴던 눈을 내리깔면서 "이 에미나가...?" 하고는 어쩌고저쩌고 몇 마디 중얼거리 기만 하고 슬그머니 돌아섰다. 이때, "미향이 거기 있니?" 하는 연홍의 목소리가 대청을 내려섰다. 그러자 미 향이 지체 않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가서 승업이를 데려오너라." "...승업이, 여기 있는데요." "이리 오라고 해." 이내 방문이 열리며 연홍이 얼굴을 내밀었다. 승업을 보자 대뜸 마루로 올라 오도록 손짓을 하였다. 승업이 기다시피하여 대청에 오르자 연홍이 방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승업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도 들지 못하고 다음 분부가 떨어지기 를 기다렸다. "잘 있었느냐?" 예상대로 이 진사의 목소리였다. 승업은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으나 고개를 떨 군 채 "네, 나으리." 하고 기어드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나으리께서 너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시겠다는데, 네 생각은 어떠하냐?" 연홍이 마음을 떠보듯이 넌지시 물었다. 순간, 승업은 정신이 아득한 곳으로 빠 져나간 것처럼 잠시 혼미했다. "...저는 잘 모르갔습네다." "약전에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 이용후가 약간 취기 든 목소리로 물었다. 느닷없이 약전이라는 말에 정신이 또 아득하게 달아났다. "잘 모르갔습네다. 그렇디만, 나으리 분부대로 하갔시요." "그래? 여기보다 더 고생스러워도 괜찮으냐?"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시요." "그렇겠지. 알았으니 그만 물러가도록 해라." 이내 방문이 닫혔다. 승업은 일어나지 않고 마냥 엎드려 있었다. 그러자 미향 이 성큼 다가와 "병신아. 그만 내려와." 하면서 승업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승 업은 그제서야 게걸음으로 대청을 내려섰다. "병신아. 정말, 나으리를 따라갈 거니?" "가야디. 내래 나으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기야." "벼엉신. 약전에서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줄 알어? 여기서 머슴하 던 돌쇠가 멋도 모르고 약전에 갔다가 이내 도망쳐 왔어." "와 도망쳐?" "병 신. 힘이 드니깐 그렇지."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야." "아무것두 모르 믄서, 큰소리는... 어디 두고 보라지. 너두 며칠 못 가서 도망쳐 올 테니. 그때는 연홍 아씨도 안 받아 줄 거다. 그러면 너는 다시 거렁뱅이가 돼서 밥을 굶게 돼. 알았어?" "기래두, 나으리 분부대로 하갔어." "벼엉신. 호강을 제 발로 차 버리 다니... 네 마음대루 하렴. 거렁뱅이가 되는 밥을 굶든." 왠지 미향이가 성질을 불지 못해 안달이 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 작은 몸피 에서 찬 바람이 꼭 한겨울처럼 날렸다. 해질녘이 가까울 무렵 미향이를 시켜 승업이 연홍이 앞에 다시 불려갔다. 떠 날 차비를 서두르라고 하였다. 그래도 승업이 그냥 머뭇거리고 있자 이번엔 이 용후가 또 재촉하였다. 그러자 미향이가 톡 튀어나와 "오늘 꼭 가야 하나요?" 하 고 조금은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왜 나서느냐?" 연홍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향이를 내려보았다. 그러자 곁에서 옥수 까지 끼여들어 "그러게 말예요." 하고 의아해 하였다. "곧 해가 질 것 같애서 그랬어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승업이 가 떠난다니까, 네가 서운해서 그런 것 같구나. 내 말이 맞지?" "아녜요, 아씨. 저런 거렁뱅이가 떠나는데 제가 왜 섭섭합니까? 속이 시원한걸요." 미행이 갑자기 상기된 얼굴로 입을 대짜로 대밀었다. 그러나 얼굴에 서운한 빛이 가득하게 배어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승업이 너두 미향이와 헤어지는 것이 서운하니?" "아닙네다. 저 에미나이가 저를 얼마나 구박하는지 모릅네다. 걸핏하믄 때립네다." "승업아. 미운 정도 정 인 줄 모르니? 이제 보니 미향이가 너를 은근히 사모했던 모양이구나." 연홍이 생글생글 웃으며 놀려 대자 미향이 "아녜요, 아씨." 하고는 부엌 쪽으 로 냅다 달음질을 쳤다. 드디어 승업이 행장을 꾸리자 미향이가 구석진 곳에 숨어 그 모습을 내내 지 켜보고 있었다. 병신. 다시 와 봐라. 그땐 누가 받어 줄 줄 알구? 미향이가 코를 훌쩍거리며 자주 눈물을 찍어 냈다. 병신. 지가 미워서 때린 줄 아나? 못난이 같으니라구. 드디어 미향이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10 전국에 보름째 장마가 계속되고 있었다. 지방 곳곳이 침수되면서 가옥이 떠내 려가는 것은 물론 사람과 가축까지 쓸려 가 실종되는 등 물난리로 인한 피해가 날로 늘어났다. 그 중에서도 영남지방의 수해가 가장 극심했다. 이에 철종이 매 우 걱정하여 좌부승지 신석우를 위유사(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백성을 위로코 자 임금이 급파한 임시직)로 명하여 영남으로 보냈다. 경삼감사로 현지에 내려간 신석우가 도내의 수재와 농형(농사 형편)을 치계(임 금에게 급히 올린 보고)하자 철종이 즉시 다음과 같이 하교를 내렸다. "영남지방의 수재가 이와 같이 매우 심했다고 하니, 놀랍고 두려워서 침식도 편안히 할 수가 없다. 밭두둑이 크게 무너진 것과 가호가 표류하고 넘어진 것은 이미 절대적으로 생각해야만 할 것인데, 애통하게 익사한 인명은 무슨 죄로 그 렇게 되었는가. 본도는 연전에 큰 흉년을 겪은 이후로부터 비록 다행히 소강을 만났을지라도 저축(베틀의 북)이 텅 비게 되고 병앵(곡식을 담는 항아리)은 밑바 닥이 다 드러났으니 소생하여 안보하기는 아직도 묘연하다고 할 수가 있는데, 하물며 이러한 회양(수습할 수 없는 낭패한 지경)에 걸렸으니 버티어 보존해 나 갈 수가 없을 것이다... 익사한 사람의 환포(환곡과 군포)는 탕감해 주고, 건져 낸 자를 장사지내어 매장하는 일과 표류하고 넘어진 집을 마련해 주는 일들을 적당히 헤아려 도와 준 뒤에 공곡(관청이 소유하는 곡식)으로써 회감(받을 것과 줄 것을 상쇄하여 회계처리 하는 것)하게 하고, 이밖에 달리 위로하고 안심시 킬 방책은 도에 있는 종신들과 더불어 잘 의논하여 사유를 갖추어 알리게 하 라... 무릇 수재와 한재의 유행은 없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애통한 우리 백성들 이 흩어지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게 된 것은 어찌 과인의 허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안정된 곳으로 다시 옮긴 후에야 타향에서의 근심을 면할 수 있을 것이 니 절대로 경솔히 움직이지 말고, 조정에서 보호하는 뜻을 기다리도록 하라. 여 러 방면에 대안을 마련함에 있어 섬돌 앞에 있는 일과 같이 하기를 위유사에게 분부토록 하라... 여러 고을의 수재는 근심스럽고 두려운 생각이 자나깨나 그치 지 않는다. 살 곳을 잃고 농사를 망친 백성이 어떻게 안정을 보전하겠는가. 별도 로 공곡을 비록 적당히 헤아려 회감해 주라고 하였으나 나의 마음을 너그럽게 할 수는 없으므로 내탕(국고)에서 은자(은화) 2천 냥, 단목(약재) 2천 근, 호초(약 용 후추) 2백 근을 내려보내니, 위유사에게 재해 입은 정도를 헤아려 나누어 주 라는 뜻을 분부토록 하라." 철종이 이와 같이 수재민을 몹시 걱정하여 위유사를 급파하고 식량과 은화와 약재를 나누어 주도록 조치를 했으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지 않아, 개중에는 굶어 죽거나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많았다. 그러자 자연 민심이 흉흉해 지고 집을 잃은 사람들이 각지고 흘터지면서 곳곳에서 약탈과 도적질이 자주 일 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7월에 들어서자 불란서 군함 한 척이 나타나 충청도 홍주 땅 장고도에 군인 수백 명으로 하여금 무기를 들고 상륙케하여 소, 돼지, 닭, 치소 등을 약탈해 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불란서 함대가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839년(기해년)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 때 불란서 성직자인 앵베르, 샤스탕, 모방 등 신부 세명이 사형당한 것을 계기로 1846년(병오년) 6월, 불란서 동양 함대 사령관 세실 준장이 이끄는 군함 세 척이 충청도 홍주 땅 외연도 앞바다에 무단 정박하였다. 그리고는 불란 서 성직자 살해에 대한 책임을 묻는 문책서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조정에 전달하 였다. 이 문책서는 영의정 권돈인 앞으로 보낸 것이었다. 외국인은 조선에 입국 할 수 없는 국법에 따라 이들 성직자들을 살해하였다는 설에 대해서, 중국인이 나 일본인이 국경을 넘어와도 죽이는 일이 없었으면서 어째서 불란서인만 사형 을 시켰는가 항의하고, 이에 대한 해명을 듣기 위해 내년(1847년)에 다시 오겠다 고 한 내용이었다. 이들이 통보한 대로 1847년(정미년) 6월, 불란서 해군 대령 라피에르가 이끄는 군함 두 척이 전라도 고군산열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 함대는 영국 에서 만든 지도를 보고 온터라 불행하게도 모래풀 속에 좌초하고 말았다. 6백여 명의 군대가 군함에 있던 식량과 무기를 섬으로 옮겨 천막을 치고 야영을 하다 결국 영국 배의 구조를 받아 상해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이와 같이 곳곳에서 수재로 인한 피해가 좀처럼 다스려지지 않는데다가 외국 함대까지 침범하여 민심이 더욱 흉흉해지는 등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천주 교 신자들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매우 우려하였다. 특히 불란서 함대가 장고 도에서 가축을 약탈한 사건으로, 행여 조정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다시 거 론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불란서 군인들한테 가축을 약탈당한 섬 주민들이 외국인들한테는 매우 겁을 내어 감히 항변을 못하고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을 무 고하여 곤혹을 치르게 하였다. 불란서 군인들의 약탈은 신자들이 그들과 내통하 여 염탐의 길을 열어 준 것이고, 약탈한 것 중에 일부는 신자들에게 나눠 주었 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주민들이 무리를 지어 신자들의 집을 마구 뒤지거나 관가에 고발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신 자들에게 관원들이 시비도 가리지 않고 가혹한 형벌을 가한 것은 물론이었다. 이러한 소문이 전국에 퍼져 각지에 흩어져 있는 천주교 신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이용후가 예배를 보기 위해 북달재 김후안 집에 당도하자 교우들이 모여 앉아 마침 이러한 소문을 놓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용후를 보자 궁금하던 차 에 이것저것을 일제히 물어 왔다. "그다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소이다. 불란서 함대가 식량을 약탈한 것은 사실이나, 다행히 청국 돈으로 무두 배상을하여 주민들의 마음도 많이 가라앉았 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교우들을 무고하였답니까?" "그건 민심이 워낙 흉흉한데다가, 몇몇 심성이 바르지 못한 자들의 소행인 듯싶소이다." "그 럼, 관원들이 더 이상 박해는 하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박해가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이번 불란서 함대가 온 것을 지나넌 세 분의 불란서 신 부님 순교에 대한 보복으로 생각하고, 매우 두려워한 것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 습니다. 아무래도 이후부터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도 심사숙고하지 않을 까 생각됩니다만... 어쨌든 우리는 더욱 천주님을 믿고, 전도에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으로 압니다." "이르다 뿐이겠소." "오로지 천주님만 의존할 수밖에 더 있습니까." 그들은 김후안을 중심으로 더욱 결속하게 되었고, 몇몇은 눈물을 흘리며 예배 를 보았다. 이용후는 김후안 집을 나와 곧장 변 주부의 약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들 경 의 약도 짓고, 근자에 승업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도 궁금하여 겸사겸사 길을 나섰다. 경이 한여름 더위에 신열이 불덩이처럼 뜨거워, 혹시 열병(장티푸스)에 걸린 것은 아닌가 싶어 차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지난해에는 딸 원이 기침 으로 고생을 해, 결국 아이 둘이 연년으로 중병을 앓는 셈이었다. 식솔이 병을 얻을 때마다 이용후는 무능한 애비 탓이다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살림이 넉 넉한 집의 아이들처럼 평소에 기름지게 먹였으면 흔히 드나드는 잔병쯤은 스스 로 이겨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 끼니나 굶지 않을 뿐 그 동안 어느 것 하나 실하게 먹인 적이 없었다. 종로통으로 들어서면서 이용후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망설였다. 대로를 걷자 니 세도가들의 행차가 귀찮고, 그것이 싫어 피마골을 택하자니 저만치서 청계옥 을 손짓할 것이 뻔하였다. 굳이 청계옥을 피할 이유는 없지만 우선 술상 받을 형편이 못 되는데다가 연홍이 볼 일이 쑥스러웠다. 청계옥에서 승업을 빼낸 후 한 번 더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연홍이와 잠시 실랑이가 있었다. 이용후가 자 주 올 사람이 아님을 깨달은 탓인지 연홍이 이용후를 놓아 주지 않으려 했다. 마치 소실이 투정부리는 것 같은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나으리. 오늘은 못 가시옵니다." "어허. 이런 낭패가 있나. 내가 어쩌다 기방 출입을 하게 됐지만, 한량처럼 굴수가 없네." "저희 신분이 천해서 그러시는지 요." "나는 본시, 사람의 신분을 가리는 사람이 아닐세. 사람이 하는 일에 따라 신분의 구별은 있으나, 하늘 아래 사람은 평등한 것이라네." "그러신 나으리께 서 무슨 까닭으로 제 청을 거절하시옵니까?" "...일전에 잠시 귀띔했지만, 나는 천주학쟁이란 말일세. 천주님을 믿는 사람한테는 꼭 지켜야 할 계율이 있어."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진정, 알고 싶은가?" "계율이란 과연 무엇인지, 궁금 하옵니다." "첫째 하나이신 천주를 흠숭해야 하고, 둘째 천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아야 하고, 셋째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하고, 넷째 부모에게 효도하 고, 다섯째 사람을 죽여서는 아니 되고, 여섯째 간음을 해서는 아니 되고, 일곱째 도둑질을 하지 말아야 하고, 여덟째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야 하고, 아홉째 남 의 아내를 탐하지 말 것이며, 열 번째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세. 그러니, 내 어찌 자네를 취할 수 있겠는가." "그러시면, 나으리께서는 그 많은 계율을 다 지키시옵니까?" "내 아직 천주님을 온전하게 흠숭하지 못하여 다 지 키지는 못하고 있지만 천주님의 뜻에 따르려고 애쓰고 있는 중일세." "평생, 외 도는 아니 하시겠습니다." "아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일세." "제가 황 진이가 아님이 한스럽습니다." "천하의 황진이도 서화담한테만은 굴복하지 않았 는가." "조선 사내들이 모두 천주학쟁이가 되면, 그때는 기방도 문을 닫아야 하 겠습니다." "허허. 그럴 리야 있겠는가. 어디든 사람 사는 곳에는 으레 한량이 있기 마련이니, 너무 상심치 말게." 그렇게 해서, 뜻하지 않은 연홍의 색정으로부터 모면할 수는 있었으나 사내대 장부로서는 매우 민망한 일이었다. 순간순간 연홍을 품에 안고 싶은 욕정이 불 쑥불쑥 솟았지만, 방금 천주교 신자임을 공표해 놓고 앉은 자리에서 차마 배교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천한 기생이지만, 여자가 자청해서 통정하기 원했던 바 를 거절하는 것도 매우 민망한 노릇이어서 오랫동안 마음이 씁쓸하였다. 이용후가 지난번 일을 떠올리며 청계옥을 막 지나가고 있는데 기어코 그들 눈 에 들고 말았다. 마침 미향이가 문을 나서다가 이용후를 발견하고는 반색을 하 였다. "나으리..." "오냐. 무고하였느냐?" "네, 나으리. 헌데, 저희 집에 오시는 길이 아니시옵니까?" "약전에 가는 길이다만... 너는 어인 일로 나섰느냐?" "연홍 아 씨께서 많이 편찮으십니다." "그래서, 의원을 데리러 가는 길이더냐?" "약전에 심부름 가는 길이옵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더냐?" "상사병... 아니옵니다. 몸살이라 하였습니다." "그래, 어느 약전이냐?" "승업이가 있는 약전이옵니다. 나으리께서도 거기로 가시옵니까?" "그러하니라." 볼 때마다 되바라진 아이라 역시 입을 서슴없이 놀려 댔다. 이용후는 아이가 못마땅한 중에도 웃음이 나와 나무라지는 않았다. 기방에서 배울 것이라곤 그것 밖에 없으니 당연하다 싶었다. 이용후는 갈 길이 바쁘다는 핑계로 청계옥 앞을 서둘러 벗어났다. 그러자 미 향이가 조랑말처럼 따라붙었다. "그래, 승업이는 잘 있더냐?" "며칠 전, 약 심부름 가서 한 번 보았습니다." "일은 잘 하는 것 같고?" "쇤네가 어찌 알겠습니까. 더러워진 꼴이, 다시 거렁 뱅이가 된 듯싶습니다. 거렁뱅이가 별수 있겠사옵니까." "이놈아. 사람을 외모만 보고 능멸하면 아니 되느니라. 사람이 근본도 중요하지만, 마음 씀씀이와 행동거 지가 조신헌지 살펴야 하는 법이다. 천민인 주제에, 어찌하여 그 아이를 업신여 기려 드느냐?" "눈치가 없어 답답해서 그럽니다." "눈치가 없고, 답답하다...? 누구한테 말이냐?" "하는 일이 매양 그러하옵니다." "그만 알았느니라." 이용후는 아이와 대거리하고 있는 자신이 실없이 생각되어 스스로 입에 못질 을 하였다. 약전이 저만치 보이자 미향이가 토끼처럼 깡총거리며 앞질러 내달리 더니 문을 거침없이 여는 것이 보이고, 이내 승업이 겅중겅중 달려왔다. "나으리 오셨습네까?" 승업이 길 한가운데에서 서슴없이 넙죽 엎드렸다. 미향이 말대로 몰골이 꾀죄 죄한 것처럼 보였다. "일은 잘 하고 있느냐?" "네, 나으리." "다행이로구나. 변 주부 있더냐?" "네, 나으리. 어서 드시라요." 약재를 정리하던 변 주부가 이용후를 보자 "어서 오십시오, 나으리." 하고 자 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변 주부는 이용후를 객으로서가 아니라 오래 사귄 지기 로 대접하였다. 그가 비록 중인이긴 하지만 제법 학문도 있고 재력 또한 탄탄해, 벼슬 없는 양반보다 결코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없이 사는 사 람을 멸시하는 법이 없고, 특히 학문과 재주가 있는 사람을 항상 겸손하게 공대 하였다. "무고하시오?" "나으리 덕분에 탈없이 지냅니다만, 어인 행차시옵니까?" "내 자식의 약을 지으러 왔소이다. 신열이 어찌 심한지..." "상태를 소상히 말씀해 주십시오." "저 아이가 약 심부름을 온 것 같으니, 먼저 지어 보내구료." 이용후는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미향이를 가리켰다. 그러자 승업이 약을 썰던 손을 내려놓고 "아닙네다. 나으리 약부터 지어야 합네다." 하고 불쑥 나섰다.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봤나. 어르신 말씀하시는데, 네놈이 어째서 나서느 냐? 볼기 맞고 싶으냐?" 변 주부가 눈을 부라려 호통을 치자 승업이 목을 자라처럼 넣고 눈치를 힐끔 힐끔 살폈다. 이때 미향이 고개를 빳빳이 세워 입을 씰룩러렸다. "깨소금 맛이다. 제 분수도 모르고 날뛰더니..." "어허? 잿방년이 코 기린다더 니... 네년은 심부름 온 것이 어째서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변 주부가 또 눈을 부릅뜨며 마루에다 회초리를 찰싹찰싹 내리쳤다. "...저 아이 하는 짓이 답답해서 아니 그럽니까." "요년. 그래두 입을 놀려? ... 나으리. 요즘 아이들 당돌하기가 저리 안하무인입니다." 변 주부가 혀를 차며 미향이와 승업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이용후는 그저 껄 걸 웃기나 할 뿐이었다. "세상이 수상하니, 안 그렇겠소? 조만간, 아이들이 어른 상투에 올라앉을 시절 이 올지도 모르겠구료." "그러게 말씀입니다." 변 주부가 서둘러 연홍의 약부터 지어 미향이를 쫓듯이 보내 버렸다. 미향이 나가면서 승업한테 흘기는 눈길을 주는데도 승업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승업아. 너는 당장 나가서 동이에 물을 가득 채우거라." 변 주부가 갑자기 승업이마저 밖으로 내보냈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 이용후한 테 긴히 할 말이 있는 듯싶었다. "저놈이 일을 제대로 하는지 모르겠소이다." 이용후가 승업의 뒤를 흘끔 곁눈질하면서 변 주부의 마음을 넌지시 떠보았다. 그러자 변 주부가 "나으리, 그보다는..."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으리. 저놈 애비가 무반이라 하셨습니까?" "그렇게 알고 있소만...?" "제가 보기에, 범상치 않은 데가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오?" "손재주가 보통 아 이 같지 않습니다. 어느 날 보니까, 저놈이 여기 천장에 붙은 소란반자(무늬가 있는 천장 도배지)를 똑같이 그려내지 뭡니까." 그리고는 문갑에서 화선지 한 장을 꺼내 이용후한테 내밀었다. 그의 말대로 무늬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나으리. 이것도 좀 보십시오." 그가 또 내민 종이에는 개다리소반, 약재를 써는 협도, 그리고 약탕관 따위가 그려져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완자무늬를 아주 정교하게 그린 그림이었다. 마치 문살을 찍어 낸 것 같았다. "이런 재주가 있었다니... 이걸 정말 저놈이 그렸다는 말씀이오?" 이용후는 한동안 넋을 잃고 그림들을 내려보았다. 그 동안 한 번도 눈치를 채 지 못한 사실이었다. 놈이 누구한테 배운 적이 없을 텐데도 이처럼 그려 낼 수 있음은 천부적인 소질 있다는 뜻이다. "나으리.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도 저놈이 제대로 배울 기회만 갖는다면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겠습니다. 나으리 생각은 어떠신지요?" "나도 방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소만... 승업이를 잠시 들라 할 수 있겠소이까?" 그러자 번 주부가 안채에 대고 승업이를 불러오라고 일렀다. 잠시 후 승업이 숨을 씩씩거리며 땀방울이 맺힌 얼굴로 들어섰다. "부르셨습네까?" "오냐. 게 좀 앉거라. 나으리께서 너를 보자 하셨다." 승업은 왠지 잔뜩 굳어 있는 이용후 표정을 경계하며 게걸음으로 다가앉았다. 곧 무서운 질책이 떨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승업아. 이것을 네가 다 그렸더냐?" "...네, 나으리. 주부 나으리 허락도 없이 지필묵을 몰래 썼시요." "이걸 무슨 소용으로 그렸더냐?" "거저, 심심해서 그 렸댔시요." "전에도 이런 걸 그린 적이 있었느냐?" "아닙네다. 요번이 처음입 네다." "혹시, 네 아비나 어미한테 배운 적이 있느냐?" "없습네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또 그려 볼 수 있겠느냐?" "..." "왜 대답이 없느냐?" "그릴 수는 있디만..." "지필묵을 줄 터이니, 네 마음대로 그려 보거라." 변 주부가 그 즉시 종이와 붓과 먹을 승업이 앞에 내놓았다. 그러자 승업이 잠시 주위 사물들을 둘러보더니 문갑 위에 놓인 난초에 눈길을 오랫동안 내려놓 았다. 이용후와 변 주부가 숨을 죽이고 승업의 손놀림을 지켜보았다. 난을 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서툰 솜씨의 문인화를 능가하는 재주였다. 더 놀라운 것은 한 번 관찰한 후에는 오직 기억으로 거의 똑같이 그려 낸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 진지한 자세는 보는 이의 가슴을 떨게 하였다. 이용후와 변 주부는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닫지 못하고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네놈이 나를 속인 것이렸다. 어디서 배우지 않고는 이럴 수가 없거늘." "아 닙네다. 제가 어드렇게 나으리를 속입네까. 지필묵도 여게 와서 처음 만져 봤시 요." 승업이 어깨를 바들바들 떨며 극구 부인하였다. 그 표정으로 보아 거짓은 아 닌 듯싶었다. "정녕, 사실이렸다." "네, 나으리. 거지뿌렁이믄 저를 죽이시라요." "알았으니, 그만 물러가도록 해라." "네, 나으리." 승업이 밖으로 나가자 이용후와 변 주부는 이마를 맞대고 난초 그림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보고 또 보아도 역시 감탄밖에 할 것이 없었다. 천부적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으리. 여기서 약재나 썰고 있을 놈이 아닌 듯싶습니다." "변 주부한테 좋 은 생각이라도 있으시오?" "글쎄올습니다... 마땅한 분이 계시면, 저놈을 보내 그림 그림을 제대로 배우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 쩌면, 변 주부 생각이 번번이 나와 같단 말이오. 실은 나도 그 생각을 하였소." "다행입니다, 나으리. 마땅한 분을 알고 계시는지요?" "당장은 떠오르는 사람이 없소만, 찾으면 잊지 않겠소. 그러나, 근본이 없다시피 한 저런 놈을 누가 맡아 가르치려 하겠소." 이용후는 주변에 있는 몇몇 화가를 떠올리며 승업을 받아 줄 만한 인물이 누 구인가를 점쳐 보았다. 그러나 마땅하게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으리. 제가 한 번 물색해 볼까요?" "그럴 만한 인물이 있소이까?" "아직 은 생각나는 인물이 없습니다만, 저한테 약 지어 가는 양반들이 많아 넌지시 알 아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더 좋은 생각이 있으시오?" "나으리. 제 가 연전에 잠시 역관 일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재도 구할 겸 청국으 로 가는 사신들을 따라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곳 화가들의 그림을 몇 점 얻 어 온 것이 있습니다. 대개는 산수화이고, 더러는 신선도나 절지도도 있구요. 그 래서 드리는 말씁입니다만, 그 그림들을 저 아이한테 보여 주고 모작케 하는 것 도 과히 나쁘지 않을 듯싶습니다. 그런 연후에 저명한 화가한테 사사하도록 하 는 것이 어떨는지요?" "극히 괜찮은 생각이오만, 사동 일은 어쩌시고?" "나으 리. 외람된 말씁입니다만, <한비자>에 '닭으로 하여금 밤을 담당케 하고, 고양이 로 하여금 쥐를 잡게 한다'지 않았습니까. 한퇴지(한유. 당나라 문장가)도 백락일 고라 하였습니다. 백락(말에 대한 감정에 능한 사람으로, 중국 주나라 사람)이 있어 천리마도 있게 마련 아닙니까. 천하의 명마도 백락을 만나지 못하면 평생 타마(짐이나 싣는 말)밖에 더 되옵니까. 승업이 저놈을 사동으로 데리고 있습니 다만, 사람은 그 재능에 따라 소용되는 법이라 사료되옵니다. 저모의 재주가 저 러하니, 어찌 약재나 썰게 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 변 주부의 뜻이 그러하다 니, 백락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계시지 않소. 참으로 훌륭한 생각 이시오." "원, 나으리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 히 나으리 앞에서 소인이 주제넘은 토를 달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니오, 아니오. 정말 훌륭한 생각이시오." 변 주부 뜻에 감동한 이용후가 가슴이 뭉클하여 그의 손을 끌어 잡았다. 비록 약전을 차려 주부 노릇을 하고는 있지만, 원체 사려가 깊고 학문이 있는 사람이 라 생각하는 거소 역시 속이 깊었다. "그럼, 저 아이를 차후 어찌할 셈이시오?" "천하의 장비한테 풀벌레 그리라는 격이니, 약전 일은 그만 두고 방을 주어 그림에만 전념케 할 생각입니다만..." "참으로, 생각이 깊으시오. 내가 염치가 없어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별말씀 을... 나으리께서 이미 백락이셨습니다. 저 아이를 나으리께서 돌봐 주지 않으셨 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저놈이 만약 나으리와 연을 맺지 못했더라면, 평생 밥이나 빌어먹을 팔자가 아닙니까." "허허. 어렇게 칭찬만 늘어놓다가는 해를 다 보내겠소이다. 그만, 승업이를 들라 이르시지요." "네, 나으리." 변 주부가 그 즉시 승업이를 다시 불러들였다. 땀으로 옷이 흠뻑 젖은 승업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겁먹은 표정으로 눈치를 흘끔흘끔 살폈다. "승업이 이놈. 이젠, 약전 일에 진력날 때가 되지 않았느냐?" 이용후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꾸짖듯이 묻자 승업이 재빨리 납작하게 엎드 렸다. 이용후가 그 위로 또 한 차례 호령을 하였다. "그랬으니까, 일은 아니 하고 쓸데없이 그림이나 그ㄹ 않았느냐?" "아닙네다, 나으리. 기래서 기런 거이 아닙네다. 거저, 한 번 그려보고 싶었습네다. 다시는 지필묵에 손대지 않갔시요. 맹세하갔시요. 믿어 주시라요, 나으리" "그럼 묻겠다. 약전 일이 좋겠느냐, 그림 그리는 일이 좋겠느냐?" "...제가 어 찌 그림을 그리갔습네까. 저는 거저 약전 일만 하갔시요." "그래? 승업아. 너는 참으로 인복이 있는 놈이로구나. 여기 변 주부께서 네놈 솜씨를 아까워하시고, 오늘부터 오로지 그림만 그리게 배려하겠다고 하셨느니라. 그림을 열심히 그리 겠느냐?" "감히, 어드렇게..." "이후로는 살신성인하는 마음으로 주부 어른을 극진하게 모셔야 하느니. 내 말뜻을 알아듣겠느냐?" 그러자 승업이 이마를 바닥에 깊숙히 박더니 어깨를 떨며 체읍하였다. 이용후 와 변 주부는 승업을 내려보며 흐뭇하게 웃음을 서로 주고받았다. 11 약전에서 나온 이용후는 청계옥 쪽을 흘끔거리며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미 향이로부터 연홍이 몸져 누워 있다는 얘기를 듣고도 모른 척 그냥 지나침은 아 무래도 인정 없는 짓으로 생각되었다. 지난번, 자신에 대한 연정을 뿌리친 것으 로도 이미 몰인정했을 뿐 아니라 그녀한테 자괴감까지 주었을 것이다. 그 상심 이 얼마나 컸으랴 생각하면 차마 못할 짓을 한다 싶었다. 잠시 들러 말로나마 위로하는 것이 장부로서의 아량이고 인간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용후는 자신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동안 역시 마음이 무거웠다. 다시 갈등에 빠졌다. 잠시, 얼굴만 디밀었다가 바로 나와야지. 이용후는 결단을 내려 청계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문 앞에 당도하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미향이 고 계집아이가 폴짝 튀어나와 연신 생글거렸다. "나으리께서 꼭 오실 줄 알았사옵니다." "요렇게 맹랑한 것이 있나... 연홍이 는 아직도 누워 있느냐?" "아니옵니다. 아씨도 나으리께서 오실 것으로 알고 기 다리시옵니다." "그새 일어났다니, 꾀병인 모양이구나." "꾀병이 아니옵니다. 정말, 끙끙 앓으신걸요." 이용후가 아이를 앞세워 정원을 가로지르자 연홍이 평소처럼 단장을 하고 대 청을 내려섰다. 얼굴에 핏기가 없고 몹시 창백하게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나으리." 연홍이 다소곳하게 인사를 차렸다. 그 표정에 서러움과 섭섭함이 짙게 배어 있는 듯이 보였다. "저 아이한테 들으니, 많이 아프다고?" "송구하옵니다. 철없는 것이 입을 함 부로 놀려 댔나 보옵니다." "내 보기에도, 얼굴이 상했네." "어인 나들이시옵니 까?" "나도 마침 약전에 볼일이 있던 참에 저 아이를 만났네." "하오면, 나으 리께서도 편찮으신지요?" "아닐세. 내 자식한테 신열이 있어서 간 것이네." "잠시, 안으로 드시지요." "그럴 여유가 없네." "그래도, 어찌 바로 가시겠습니 까." "술상 받을 마음이 아니라서 그러네." "그냥 가시게 할 수는 없사옵니다. 잠시만 머물다 가십시오."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잠시만 앉았다 가겠네." 비로소 이용후는 연홍이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 어디가 그리 아팠던가?" "별것 아니옵니다. 그저 몸살기가 좀 있었을 뿐이옵니다." 이때 문이 열리며 조촐하게 차린 술상이 들어왔다. 이용후는 낭패한 얼굴로 술상을 내려보았다. 아내와 아들의 얼굴이 또 눈에 밟혔다. "승업이는 잘 있사옵니까?" "잘 있다네. 그런데, 오늘 그놈한테 놀라운 사실 을 알았어." "...무엇이옵니까?" "변 주부가 발견한 것이네만, 그놈이 그림에 재 주를 가지고 있었어." "하오면, 그 아이가 그림을 배웠다는 말씀이옵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천부적인 소질인 것 같네." "그 재주가 어느 정도이옵니 까?" "지금은 겨우 흉내나 내는 정도지만, 분명 장래성이 있는 아일세." 이용후가 약전에서 있었던 일을 대충 전하면서 변 주부가 승업에게 그림에만 전념하도록 배려했다고 하자 그녀 역시 매우 감동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정 도로 그림에 자질이 있었던 아이를 그저 거렁뱅이로 멸시했던 자신의 경솔함을 잠시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런 아인 줄도 모르고, 제가 천대했던 것이 후회가 되옵니다." "몰골이 그 모양이었으니, 누구나 그랬을 걸세."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어두우니, 장차 무 엇에 쓰겠습니까." "오래 지켜봐야 할 일이니,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네. 아이의 근본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어서 지켜볼 따름일세. 그리고 자네가 그 아이를 한 동안 거둬 준 것만도 결코 작은 도리는 아닐세." "제가 무슨 도리를 했다고 그 러시옵니까. 부끄러울 뿐이옵니다." "그렇지 않아. 요즘 세상에, 자네 아니면 누 가 그 아이를 돌봐 줬겠나. 나처럼 그저 말뿐, 한 번도 돕지 못한 사람도 있지 않나. 더는 괘념치 말게." "송구하옵니다." 이용후가 술 두어 잔을 마시고 일어나려고 하자 연홍이 무엇인가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품고 있는 말이 있는 눈치였다. 이용후도 선뜻 나서 지 못하고 잠시 주춤거렸다. "나으리께 여쭐 말씀이 있사옵니다." "어서 이르게." "...저같이 미천한 것도 천주교를 믿을 수 있는지요." "자네가?" "...아니 되옵니까?" "아니 되다니... 그렇지 않네. 천주님은 누구나 오라 하시네." 이용후는 약봉지를 던져 놓고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연홍의 얼 굴을 찬찬히 살폈다. 진지한 표정으로 보아 그냥 던져본 말이 아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였나?" "...미천한 것이라, 딱히 의지할 곳이 없어 그러하 옵니다. 조실부모한데다가 마음을 나눌 형제조차 없는 계집이라, 외롭기 한량 없 사옵니다." "천주님은 만선과 만덕을 갖추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세상만물을 창 조하시고, 또한 세상을 구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를 인간 세상에 보내어 인간의 만죄를 업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분일세. 어디 그뿐인가. 우리 인간의 죄 를 사하여 영생을 주실 분이시네. 천주님은 모든 인간을 귀히 여기시는 분인 만 큼, 미천한 사람이고 아니고를 가리지 않는 분일세." "하오면, 저 같은 것도 천 주님을 믿을 수 있다는 말씀이옵니까?" "이르다 뿐인가. 진정 기쁜 도량으로 자 네를 품에 안으실 걸세." "장차, 제가 어찌하오면 되옵니까?" "며칠 기다리게. 그러면 내 자네를 데리고 갈 곳이 있을 터이니." "약조하시겠습니까?" "물론 약조하고말고." "보잘것없는 계집을 마다하시지 않고 거둬 주시니, 고마울 따름 이옵니다." "내가 거두는 것이 아닐세. 천주님께서 자네를 거둬 주시는 것일세. 천주님도 매우 기뻐하실 것이 틀림없네. 그럼, 약조하는 뜻으로 술 한 잔씩 나누 세." 이용후는 뜻밖에 얻은 기쁨으로 잔 두 개에 손수 술을 부었다. 그러자 연홍이 감격하여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어허. 이 사람아 울기는..." "...용서하십시오. 나으리가 고마워서 그러하옵니 다. 제가 나으리를 흠모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여 한이 될 것 같았사오나, 뜻밖에 천주님을 받들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옵니다. 미천한 계집을 차별 하지 않으시는 나으리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옵니다." "아닐세. 천주님께서 자네 를 구원하시는 일로 알고 있게." "아니옵니다. 나으리를 뵙지 못했더라면..." "내 갈 길이 바쁘니, 오늘은 이만 가겠네. 며칠 후 꼭 들를 것이니, 외출할 차비 나 하고 있게." 이용후는 연홍의 손을 잡아 주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는 길을 재촉하면 서도 내내 연홍의 기특한 뜻을 생각하였다. 자신을 미천한 신분으로 여기는 가 운데 신앙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흐뭇하였다. 그녀 말대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형제마저 없는 천애의 고아가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으면 대부분 의 사람들이 경원하는 천주교에 뜻을 두었을까 생각하니 갑자기 측은하였다. 그 래서 동병상련으로 승업이를 쾌히 맡았던 것 같았다.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 만 그 마음 씀씀이를 생각하면 선녀가 따로 없는 것 같았다. 어쨌든, 연홍이가 천주교를 믿겠다는 뜻을 밝힌 것만으로도 이용후는 그녀가 대견하였다. 그녀에게 천주교 믿기를 한 번도 권한 적이 없는데도 스스로 결심 한 것을 생각하면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변 주부는 승업에게 방을 따로 내주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게 하였다. 약재 를 써는 일은 물론 어떠한 잡일도 시키지 않았다. 중국에서 가져온 그림들을 하 나씩 보여 주고는 똑같이 모사하도록 시켰다. 곁에서 관찰해 보니 승업에게 특 이한 점이 있었다. 그는 원화를 바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꼼짝하지 않고 그림을 보기만 하였다. 요지부동의 그 진지한 모습 은 어찌 보면 마치 도를 닦는 자세와 같아서 결코 아이가 할 수 있는 행동이 아 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관찰한 다음에는 원화를 보지 않고 오직 기억에 담아 둔 구도 를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었다. 그 기억은 가히 탄복할 만한 것이었다. 획 하나 점 하나도 원화와 다른 것이 없었다. 마치 탁본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솜씨를 지켜본 변 주부는 너무 놀랍고 신기하여 승업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동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지경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로구나. 실물을 보지도 않고 어찌 똑같이 그려 낼 수 있 단 말이냐. 아무래도, 누구한테 그림을 배운 것이 틀림없는 것 같구나. 그렇지 않구서는 이럴 수가 없는 법이다. 내 말이 맞지 않느냐? 어른을 기만하면 아니 되느니라." 변 주부는 짐짓 눈을 부릅떠 승업에게 윽박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표 정에 조금도 흔들림 없었다. 오히려 공연히 시비를 건 변 주부만 무안할 뿐이었 다. "나으리. 제가 어드렇게 나으리를 속입네까. 내래 거지뿌렁은 절대 하지 않습 네다. 우리 오마니가 사람 속이는 것이 제일 나쁘다고 했시요. 기래서 한 번도 남을 속인 적이 없습네다. 저를 믿어 주시라요." "알았다. 너무 신기해서, 그저 해 본 소리니라." "기런데 말입네다." "오냐. 할 말이 있느냐?" "나으리. 내래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겁네까? 갑자기 이러니까니, 무섭습네다." "무엇이 무섭 다는 말이냐?" "내래 약전에 왔을 적엔 일을 하러 오지 않았습네까. 기런데, 이 도 안하고 밥을 먹으니까니 이상해서 기럽네다." "허허, 녀석 하고는... 이놈아 네놈 밥 굶길까 봐 걱정이냐? 염려하지 말거라. 밥은 배불리 먹게 할 테니 그 대신, 그림을 열심히 그려야 헌다. 만약에, 꾀를 부렸다가는 당장 내쫓을 테니 그리 알아. 알겠느냐?" "열심히 그리갔시요. 기런데, 저 같은 거렁뱅이한테 와 그림을 그리게 하십네까?" "네놈 재주가 기특해서 그러니라. 이 진사 뜻도 그러 하시고." "나으리. 제가 그림을 잘 그리면 장차 무엇이 되는 겁네까?" "글쎄 다...?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의 운명이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니... 허지만, 일생에 훌륭한 그림을 남기면 비로소 인물이 되느니라. 승업아. 장 래 무엇이 되고 싶었더냐?" "거저, 머슴이 되고 싶었시요." "하필이면, 머슴이 더냐?" "일만 잘 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기 때문이야요." "허허, 녀것... 이놈 아. 사내대장부는 포부를 크게 가져야 하느니라. 네놈도 곧 열다섯이 되니, 이제 는 뜻을 세울 때가 되지 않았느냐." "...거렁뱅이가 무슨 뜻을 세우갔습네까." "사람이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산 입에 거미줄은 치지 않는다고 했다. 설마, 굶 어 죽기야 하겠느냐. 그러니 이제부터는 머슴 될 생각은 버리고 뜻을 크게 가지 거라. 그림에 재주가 있으니, 네놈 하기 나름으로 장차 큰 인물이 될 수도 있음 을 명심하거라. 알겠느냐?" "알갔습네다. 나으리 말씀 잊지 않갔시요." "그리 고, 이 진사 어른을 잘 받들어야 헌다. 그 어른이 너를 거두지 않으셨으면, 네놈 이야말로 평생 거지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야." "알고 있습네다. 그 나으리와 주부 나으리 은혜는 죽어두 잊지 않갔시요. 진사 나으리를 만나지 못했으면 내 래 벌써 굶어 죽었을기야요. 기런 분을 어드렇게 잊갔습네까." "옳거니. 그런 생 각을 가지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변 주부는 승업을 새삼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한때 거렁뱅이로 떠들기는 했어 도 근본이 있는 아이라, 언행이 때로는 어른처럼 깊은 구석이 있음을 보았다. 변 주부 생각에 승업이 보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더라면 학문으로 큰 인물이 될 수 있는 아이라 그가 안타까웠다. "내가 너를 오래 붙잡아 둬서는 안 될 것 같구나." 변 주부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리자 승업이 듣고 있다가 잡고 있던 붓을 맥없이 떨어뜨렸다. "나으리. 무슨 말씁입네까? 저를 내쫓으시는 거야요?" "...그런 뜻이 아니다." "기럼 뭡네까?" "아직은 말할 처지가 아니니, 궁금해 할 것 없다." 변 주부는 슬그머니 자리르 떠 승업의 방을 나왔다. 그러나 승업은 마음이 불 안하였다. 그림에만 전념하라던 말을 불과 며칠 전에 들었는데, 오래 잡아 둘 수 없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더 데리고 있을 가 치가 없다는 뜻인지, 아니면 갑자기 귀찮아진 것인지 그의 마음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승업은 붓을 놓은 채 오로지 내쫓기는 상상만 하였다. 다시 거지로 돌아가 장 안을 떠도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이 미리부터 서러웠다. 누구든 약전에 오래 붙 어 있지 못한다고 한 청계옥 미향의 말이 비로소 떠올랐다. 그만큼 약전 일이 힘들다는 뜻인데, 그 점은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주부 어른의 속을 들여다볼 수가 있어야디... 승업은 지필묵을 팽개친 채 팔베개를 하고 벌렁 누웠다. 그림 그리고 싶은 마 음이 멀리 십 리나 달아나 버렸다. 일도 안 하고 팔자좋게 그림만 그리고 있었 던 요 며칠이 마치 꿈에 있었던 것처럼 아련하였다. 거렁뱅이 주제에, 그림이 뭐이가... 승업은 자신도 모르게 고인 눈물이 귓속으로 흘러들어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 불쌍한 처지가 새삼 서러워 차라리 죽고 싶었다. 다시 거지로 전락할 바에야 죽 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불안하고 궁금한 가운데 보름이 흘렀다. 무슨 일인지 아침 일찍부터 약전을 비우던 변 주부가 거의 해질녘에 돌아와서 는 대뜸 승업이를 불러들였다. 승업은 드디어 내쫓기는구나 하는 생각에 목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왜 그리 기운이 없어 보이느냐?" 승업은 대꾸하지 않았다. 오직 그의 다음 말이 궁금할 뿐이었다. 약전에서 나 가라는 말이 떨어지면 떼를 써 애원을 할 것인지, 아니면 미련 없이 떠날 것인 지도 궁리하였다. "승업아. 내일 아침, 떠날 차비를 하거라." "...나으리. 내래 그림 안 그리고, 일을 하갔시요. 기러니까니, 제발 나가라는 말씀만 하지 마시라요." "허허, 녀 석... 승업아. 내 너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네가 그림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으로 보내는 것이다. 알았느냐?" "나으리. 저는 여게 있는 것이 더 좋습네다. 여게서 그림을 그리갔시요." "어허. 학문과 예술은 반드시 스승을 잘 만나야 되 는 것이다. 여기서는 오로지 그림 흉내만 낼 뿐 배울 것이 없지 않느냐. 네 재주 가 아까워 마땅한 곳을 소개하는 것이니, 그리 알고 내 뜻을 따르도록 하여라." "거게가 어뎁네까?" 승업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등짝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동지중추원부사 이응헌 나으리 댁이다. 지체 높으신 분이니, 언행에 각별히 조심해야 하느니라." "기럼, 거게서도 일 안 하고 그림만 그립네까?" "글쎄 다...? 밥값은 해야 되지 않겠느냐." "밥만 배불리 먹여 주면, 일은 열심히 하갔 시요." "네놈은 오로지 밥타령이구나." "밥 굶는 서러움이 제일 크다고 했시 요." "허긴..." 그날 밤 승업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였다. 중추 원부사가 얼마나 높은 벼슬인지, 또 그 집은 얼마나 큰지, 머슴들의 마음씨는 과 연 좋을지... 모든 것이 궁금하였다. 김우근 대감 집의 박 서방과 같은 머슴을 만 나면 다행이지만, 청계옥 미향이처럼 못된 종년이라도 걸리면 그 수모를 어찌 견딜까 걱정이었다. 이튿날 승업은 변 주부를 따라 약전을 나섰다. 이응헌 집은 수표교 근처 관수동에 있었다. 집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으나 후 원이 매우 아름다웠다. 각종 화초 등 관상수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가운데 팔뚝만한 잉어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는 연못도 있어 그 정취가 매우 아름답고 그윽하였다. 중추원부사란 종2품 벼슬로서, 특별한 임무가 없는 한직이었다. 그러다가 공석 이 있으면 의관이나 역관으로 발탁되는 한시적인 벼슬이었다. 원래 중추원이 고 려 때는 왕명의 출납, 숙위(숙직), 군기(군사상의 기밀) 등의 일을 맡아 보았으 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행정기관의 자문기관에 불과했다. 이응헌도 한때 의관과 역관 일을 맡아 본 적이 있었다. 변 주부가 이응헌을 알게 된 것도 두 사람이 같은 시기에 역관으로 있었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변 주부는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수집한 중국화가 몇 점 되지 않으나 이응헌은 원체 그림에 일가견이 있는사람이라, 원, 명나라 이래 진적(진필)의 중국화를 변 주부 보다 훨씬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승업을 이응헌 집에 유숙토록 알선을 한 것이다. 그에게 그림을 사사케 할 뿐만 아니라, 중국화의 진적들을 접할 기회 를 많이 주기 위해서였다. 이응헌이 비록 종2품 벼슬에 지나지 않지만 대대로 가산이 있는 집안이라, 한 직이면서도 풍류를 마음껏 즐기며 그림과 학문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변 주부는 승업을 밖에 세워 둔 채 혼자서 사랑채로 들어갔다. 안에서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머슴을 시켜 승업을 불러들였다. "부사 나으리께 인사 여쭙거라." 변 주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승업은 이마를 바닥에 붙여 이응헌에게 넙죽 큰 절을 올렸다. 이응헌이 승업의 얼굴이 뚫어져라 한참 동안 내려보았다. 부리부리 한 눈매가 어찌나 무서운지 눈길이 닿는 곳마다 곧 불똥이 튈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장승업입네다. 베풀 장에, 이을 승, 업 업자 입네다." "본관은 어딘고?" "황해도 대원에서 태어났습네다." "양친은 생존해 있느냐?" "제가 어렸을 적에 다 돌아가셨시요. 아바지는 여섯 살 때 돌아가셨 고, 오마니는 아홉 살 때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습네다." "일가친척도 없고?" "...네." "그림은 언제부터 익혔더냐?" "주부 나으리 댁에서 처음 붓을 잡아 봤 시요." "숨김이 없으렸다?" "정말입네다." 그러자 그가 대뜸 승업에게 지필묵과 난초 그림 한 장을 내어주며 그 자리에 서 모사토록 하였다. 승업은 숨을 죽이고 난초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난초는 변 주부 집에서 이미 눈에 익힌 것이라 오래 볼 필요가 없는 그림이었다. 그의 머리 속에 똑똑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잠시 후 원화를 한쪽으로 밀어 놓은 승업이 붓을 들더니 단숨에 난초를 그려 내는 것이었다. 역시 원화와 한 점 틀림이 없었다. 풀잎 하나도 빠뜨린 것 없이 모사하였다. "나으리. 어떻습니까?" 변 주부가 더 초조해서 물었다. 이응헌은 그림과 승업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 개를 끄덕였다. "신통하오. 선이 다소 거칠기는 해도, 기억력만으로 이같이 그려낸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오." "하오면, 나으리께서 가르칠 만한 정도는 되는지요." "글쎄...? 좀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는 괜찮을 듯싶소." "나으리께서 그 렇게 말씀하시니,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제가 아이의 솜씨를 잘못 판단한 것 이 아닌가 하고,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소. 변 주부의 안목도 보통이 넘지 않소이까." "당치않은 말씀이십니다." "승업이라고 했겠다?" "네, 나으리." "이번에는 저 병풍 그림 중에 오른쪽 것을 그려 볼 테냐?" 이응헌이 가리킨 것은 기명절지 여덟 폭짜리 병풍의 수묵화였다. 그 중에서 이응헌이 지목한 것은 화로와 주전자와 잎이 있는 복숭아가 배열된 그림이었다. 승업이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비로소 긴장이 되었다. 과연 똑같이 그려 낼 수 있을지 은근히 켕겼다. "그릴 수 있겠느냐? 정 어려우면, 다른 것을 그리도록 하여라." 이응헌이 승업의 마음을 슬쩍 떠보았다. 그러나 승업은 대꾸하지 않고 꼿꼿이 앉아 그림이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하였다. "어쩔 테냐? 저것을 그려 보겠느냐?" "네, 나으리." "변 주부. 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우리는 정자로 가서 술이나 한잔 합시다." "아이를 혼자 두어도 괜 찮으시겠습니까?" "무슨 뜻이오?" "별다른 뜻으로 말씀드린 것은 아니옵고, 그 저..." 변 주부는 주인이 방을 비운 사이에 승업이 귀한 물건이 신기해서 손때라도 묻힐까 우려한 것이었다. "괜찮소. 그럼, 우리는 밖으로 나갑시다." 이응헌은 주안상을 차리도록 집사에게 분부하고 승업에게도 떡과 과줄(밀가루 를 꿀물이나 설탕물에 반죽하여 만든 과자)을 들여놓도록 일렀다. 후원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자 곧 이어 주안상이 올라왔다. 더위가 한풀 꺾인 듯 담을 타고 들어온 바람이 제법 소슬한 기운을 느끼게 하였다. 이응헌은 변 주부에게 술을 권하며 곧장 승업을 입에 올렸다. "변 주부가 아이의 재주를 잘 보았소. 필경, 범상치 않은 놈이오." "나으리께 서도 그리 단정하시옵니까?" "그럴밖에요. 좀더 두고 볼 일이지만, 저 아이의 재주는 천부적인 듯싶소이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 배움도 없이 저런 솜씨를 낼 수가 없는 법 아니겠소. 아까는 아이가 혹시 방자해질까 봐서 과하게 칭찬하지 않았소만, 실은 탄복하고 있었소이다." "그럼, 나으리께서 맡아 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약전에서 일을 시켜 보니, 꾀를 부리는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제놈 밥값은 하도록 이르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굳이 일을 시키지 않아 도 되겠지만, 어찌 종일 그림만 그리게 할 수 있겠소. 집사에게 일러 아이에게 맞는 일을 줄 것이오." 이응헌과 변 주부가 술잔을 주고받는 동안에 승업은 난생 처음 구경하는 떡과 과줄을 신기한 맛으로 음미하며 병풍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물론 머리 속에다 그림을 차곡차곡 담아 두기 위해서였다. 소재들의 실물을 복숭아를 빼 놓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특별한 모양의 화로나 주전자 따위의 질감을 실 물에서처럼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집사가 다시 들어와 마치 감시하듯 승업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승업은 그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자 집사가 볼멘소리로 입을 열었다. "서둘러 그리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거냐? 아무래도 네놈 재주로는 벅찬 것이 지?" 승업은 대꾸하지 않았다. 무안해진 집사가 재차 물었다. "기런 게 아니야요." "그런 게 아님?" "병풍 그림을 먼저 마음에 담아 두는 겁네다." "제법, 입은 잘 놀리는구나. 두고 보면 알겠지. 이놈아, 괴발개발 그렸 다가는 혼쭐이 날 터이니, 각오를 단단히 하거라." 집사가 더는 무안당하고 싶지 않았던지 휑하니 나가 버렸다. 승업은 나가는 그의 뒤꼭지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장차 저 사람한테 구박깨나 받겠구나 싶어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설마, 밥이야 굶기갔어? 승업은 비로소 자세를 고쳐 앉아 붓을 들었다. 12 이용후는 집을 나서자마자 곧장 청계옥으로 달려갔다. 며칠 전, 연홍의 문병을 갔다가 그녀가 천주교를 믿고 싶다는 뜻밖의 말을 듣고 다시 오기로 약속했었 다. 이용후는 연홍을 북달재 김후안 집에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청계옥에 들어서자 연홍이 산뜻한 얼굴로 이용후를 맞았다. 건강이 완전히 회 복된 듯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나으리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얼굴이 좋아 보이네. 쾌차하였는가?" "나으리 염려 덕분으로, 이젠 괜찮사옵니 다." "다행일세. 안으로 드세." 이용후가 방으로 들어가 좌정하자 연홍이 주안상 들일 것인지 물었다. "아닐세. 잠시 집을 비울 수 있겠나? 나하고 갈 곳이 있어서 그러네." "그곳 이 어디옵니까?" "일전에, 천주교를 믿고 싶다지 않았나." "그러하옵니다." "그 결심에, 변함이 없는 겐가?" "어찌, 한 입에 두 말을 담겠습니까." "그럼, 당장 나를 따라나설 수 있겠지?" "물론이옵니다." "일부러 주일을 택하여 온 것이니, 차비를 서두르게." "먼 곳이옵니까?" "그리 먼 곳은 아니니, 간편한 차 림으면 될 걸세."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연홍이 방을 나가자 이어 미향이가 꿀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왠지 오늘은 맥 이 없어 보였다. 몸이 아프냐고 넌지시 묻자 고개를 떨군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늘 촐랑대던 모습을 떠올리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왜 대답이 없느냐? 필경, 몸이 아픈 게로구나." "아니옵니다." "그런데, 왜 기운이 없느냐?" 그래도 대꾸가 없었다. 이용후는 맹랑한 그 속을 짐작할 수 있어 또 웃음이 나왔다. "오호... 이제 알겠구나. 네가 승업이 놈을 그리워하느니라. 어떠하냐? 내 짐작 이 맞지?" "...승업이가 약전에서 도망을 쳤다 하옵니다." "도망을 쳐? 누가 그 러더냐?" "주부 어른이 그렇다 하셨사옵니다." "그래? 승업이 그놈, 아주 고얀 놈이로구나. 헌데, 네가 풀이 죽어 있을 일이 아니잖느냐? 오히려 잘된 일일 텐 데... 다시 거렁뱅이가 됐을 터이니, 그 얼마나 고소한 일이냐. 아니 그러냐?" "아주 고소하옵니다. 약전에 가지 말고 여기에 눌러 있었으면, 거렁뱅이는 아니 되었을 것이옵니다. 말을 듣지 않아서 그리 됐으니, 잘된 일이지 뭡니까요. 그런 미련퉁이는 배를 더 곯아야 하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허나, 만약에 그놈이 다시 오면 그때는 구박하지 않겠느냐?" "아니옵니다. 구박을 더 받아야 정신을 차릴 것이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시는 주선하지 말아야 되 겠구나. 네 구박이 두려워, 어디 오게 하겠느냐?" "그럼, 나으리께서는 승업이 어디 있는 줄 아시옵니까?" 그렇게 묻는 미향의 눈빛이 기대와 반가움으로 가득 찼음을 어렵지 않게 거니 챌 수 있었다. "내가 어찌 알겠느냐. 나도 괘씸해서, 다시는 못 본 체할 것이다." 이용후는 승업이 이응헌의 집으로 거처가 옮겨진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체 시치미를 뗐다. 어린것의 생각으로는 음전치 못하지만 한편으로 는 귀엽기도 하여 놀려 줄 마음이 들었다. "배운망덕한 아이옵니다. 그러니 거렁뱅이밖에 더 되옵니까." 미향의 얼굴에는 서운한 빛이 가득하면서도 속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역력하였다. 기방에서 익은 눈치라 그런지 너무 내숭하여 아이답지가 않았다. 마침 연홍이 나갈 채비를 마치고 다시 들어왔다. 장옷을 팔에 걸치고 나타난 그녀는 기녀 티를 내지 않고 여염집 여자처럼 꾸몄다. "이제 나서도 되겠는가?" "네, 나으리." 연홍이 문을 열어 놓고 비켜서서 이용후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미향 이가 연홍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너는 몰라도 된다." "아씨. 홍 생원님이 오시면, 뭐라고 말씀드려요?" "옥수 한테 일러 뒀으니, 함부로 입 놀리지 말고 너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여라. 알았 니?" "그리하겠어요." 대문을 나서자 연홍이 장옷을 들러썼다. 눈만 겨우 드러내고 있어 설혹 아는 사람을 만나도 금방 알아볼 수 없을 차림이었다. 이용후는 행인이 드문 길을 골라 북달재로 향했다. 가는 도중 연홍에게 김후 안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관해서도 알고 있는 대로 설명하였다. 그러자 연홍이 아는 듯 모르는 듯 가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갸우뚱거리기도 하였다. "소문에, 서양 사람들이 조선의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다고 하옵니다." 연홍이 매우 조심스러운 어조로 의구심을 은근히 드러냈다. 이용후가 실소하 며 터무니없는 낭설이라고 일축하였다. "하오면, 어찌하여 그러한 소문이 퍼졌사옵니까?" "그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천주교를 믿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현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미개한 민족 중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이 있다고 들었지만, 문명이 발달한 서양 사람들 이 어찌 사람을 먹겠는가. 그 사람들은 개도 잡아먹지 않는다네. 하물며 사람을 잡아먹겠나? 더구나 외국의 신부들은 전도하러 온 사람들인데, 식인을 한대서야 누가 천주교를 믿겠다고 하겠는가. 나부터도 믿지 않겠네. 아니 그런가?" "...그 러하옵니다." 김후안 집에 당도하자 마침 남자 여자 신도들 대여섯이 둘러앉아 예배를 준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용후가 김후안과 신도들에게 연홍을 소개하였다. 그러자 그들 모두가 연홍 을 환영한다며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성호를 긋고 합장하였다. 승업이 이응헌 집에 온 지도 그새 한 달이 되었다. 온 날부터 지금까지 방에 틀어박혀 오직 그림만 그렸다. 이응헌이 청나라에서 수집한 그림들을 모사하는 일로, 산수, 조어, 영모(화조화), 기명절지 등을 주로 그렸다. 그 외 갖가지 짐승 도 그렸다. 독수리, 오리, 토끼, 닭, 두루미, 고양이, 개, 까치, 기러기 등이었다. 승업은 이들 짐승 중에서도 독수리가 나무에서 노니는 호취도에 많은 관심을 가 졌다. 이응헌은 그 재주에 놀라 그린 것마다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소질이 가히 천 재적임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더 많은 그림을 내어주며 거듭 그리게 하였 다. 뿐만 아니라 그의 지기들을 불러 승업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을 본 사람 들 중에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이응헌과 함께 입을 모아 승업의 재주를 필경 신이 도우신 일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는 저마다 그림 한 장씩 을 얻어 갔다. 그러나 정작 승업은 벌써부터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몇날 며칠을 방에 처 박혀 그림만 그리고 있자니 따분하고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끼니마다 밥 도 배불리 먹고 간식도 넣어 주고 있어 마치 양반집 도령처럼 호강하고 있는 중 이었다. 그런데도 이 같은 생활이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문득문득 깨 닫곤 하였다. 자신의 처지에 일도 안 하고 호의호식하고 있는 것이 불안하였다. 그리하여 승업은 이응헌에게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토로하였다. "나으리. 저도 일하갔시요." "그새 갑갑증이 났더냐?" "일도 안 하구 호강만 하니까니, 마음이 편치 않습네다." "오히려 좋지 않느냐? 앉아서 그림만 그려도 밥을 배불리 먹게 해 주니, 너한테는 잘된 일 아니더냐." "제가 나으리 댁 자제 도 아닌데, 어드렇게 일을 안 하갔습네까. 저도 밥값을 하는 거이 좋갔시요." "필경, 네놈이 갑갑한 모양이다. 네놈 뜻이 정 그러하다면 집사한테 일러 놓을 것이니, 그리하여라." 이응헌은 그 즉시 집사를 불러들였다. "이놈이 일을 학 싶다고 하니, 자네가 적당한 일거리를 주게. 일을 주되 아침 나절에는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이니, 집사가 알아서 하게." "어떠한 일을 맡김이 좋으시옵니까?" "그야 자네가 알아서 시킬 일 아닌가." "그럼, 분부대로 하겠 습니다요." 무슨 까닭인지 집사가 갑자기 흥이 솟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승업은 그 동안 자신을 쏘아보던 집사 눈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차라 마음이 은근히 켕겼다. 마치 승업한테 미운 털이라도 박힌 듯한 시선을 자주 주어 잘못하다가는 구박덩 어리로 전락할 것만 같았다. 승업을 끌고 나온 집사가 대뜸 부엌으로 가더니 물통과 지게를 들고 나와 승 업 앞에다 거칠게 던졌다. "부엌에 큰 독 세 개가 있으니, 서둘러 물을 채우도록 해라. 만에 하나 꾀를 부렸다가는 장딴지가 성치 못할 것이다. 알겠느냐?" "기렇게 하갔시요." "그 동안 네놈이 주인 나으리한테는 귀염을 받았다만, 내 눈에 거슬렸다가는 신상에 이롭지 않을 못할 것이다. 식객 주제에, 그림을 그리겠다니..." "제가 자청해서 기런 것이 아닙네다. 나으리께서 시키신 일이야요." "이놈아. 잔말 말고, 어서 물이나 길어다 붜." 그리고는 느닷없이 승업의 엉덩이에 발길질을 하였다. 승업은 비로소 후회가 조금씩 들었다. 괜히 일을 하겠다고 자청하는 바람에 장차 심신이 고달플 것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물독 하나가 어찌나 큰지 높이가 승업의 키만하고 둘레가 두 아름이 더 되었 다. 독 세 개에 물을 가득 채우려면 온종일 길어다 붜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 다. 그래도 승업은 이 집 머슴이려니 생각하고 잠시도 쉬지 않고 물질을 하였다. 승업이 독 두 개에 물을 채우고 나오는데 이응헌의 막내 아들 운경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승업이보다 두 살 아래였다. "도련님. 와 기럽네까?" "뭐 하니?" "독에 물 채우고 있습네다." "너는 우리 집 머슴으로 온 것이 아니잖니?" "기래도 일을 해야 합네다. 밥값은 해야 되지 않갔시요." "누가 일을 시키든? 아버님께서? 아니면, 집사가 시키든?" "아닙네 다. 제가 하갔다고 자청했시요." "일을 자청해서 하다니... 너는 바보로구나." "하루 종일 방에서만 있으니까니, 갑갑해서 못 견디갔시요." "그래도 나 같으면 일 안 하고, 방에만 있겠다." "도련님같이 귀한 분이 뭐 하래 일을 합네까. 궂은 일은 나처럼 천한 것들이나 하는 겁네다." "실은, 나도 갑갑해서 나왔다. 잠시, 나랑 놀지 않으련?" "집사 어른이 아시면, 내래 혼쭐이 납네다." "괜찮아. 나랑 놀면 혼내지 못한다." "기래두..." "괜찮대두." 운경이 대뜸 승업에게 달려들어 지게를 벗기려 들었다. 그러자 승업이 엉덩이 를 빼며 멜빵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도련님. 기러믄 독을 마저 채우고 오갔시요. 그때까지만 기다리라요." "그렇 게 큰 독을 어느 세월에 채우겠니. 그러지 말고 그냥 놀자." 운경이 또 지게를 벗기려 들었다. 이때 집사가 나타났다. 그가 승업을 향해 눈 을 부라렸다. "독을 다 채웠느냐?" "...하나 남았시요." "아직도 채우지 못했다니... 여태 뭘 했느냐?" "...잠시도 쉬지 않았시요." 승업이 고개를 떨어뜨려 더듬더듬 변명하자 운경이 둘 사이에 끼여들어 집사 앞을 가로막았다. 그제서야 집사가 얼굴을 폈다. "집사. 남이 얘기하는 중에 왜 끼여드오?" "그런 게 아닙니다, 도련님." "이 아이는 내가 잠시 데리고 갈 테니, 물질은 다른 머슴한테 시켜요." "네, 도련 님." 운경이 승업으로 하여금 지게를 벗어 놓게 하고는 후원으로 끌고 갔다. 승업 은 마지못해 끌려가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집사가 나중에 앙갚음을 할 것 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행여, 나중에라도 집사가 야단을 치면 나한테 일러. 내가 혼을 낼 테니." "남 자가 어드렇게 고자질을 하갔시요." "알았으니, 어서 놀기나 하자." 운경이 주머니에서 제기를 꺼냈다. 그러자 승업이 혀를 내어 입술을 돌려 핥 았다. 제기 차는 일이라면 외발제기(한 발로 차는 제기)든 어지자지(두발제기)든 누구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운경의 솜씨는 보잘것이 없었다. 외발이든 두발이든 다섯 번을 넘지 못하였다. 승업은 두 가지 다 스무 번을 넘겼다. 그러자 운경이 기가 꺾여 제기놀이를 슬그머니 거두었다. "제기는 너를 못 당하겠다. 네가 나보다 위니, 다리씨름(정강이를 맞걸고 상대 를 넘어뜨리는 장난)도 이기지 못하겠고... 옳거니, 주사위를 던져서 이마에 알밤 을 넣기로 하자. 좋지?" 그러나 승업은 주사위를 본 적도 없었고 놀이 방법도 모르고 있었다. "주사위가 뭡네까?" "아직 주사위를 보지 못했구나. 바로 이거다." 운경이 꺼낸 것은 네모난 돌에 까만 점이 여섯 면에 각각 다른 수로 찍힌 것 이었다. 신기한 돌이었다. 운경이 놀이 방법을 한참 설명하였다. 처음 본 것이기 는 해도 승업한테는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다. "좋습네다. 만약에, 도련님이 알밤을 맞아도 울면 안 됩네다." 둘은 쪼그리고 앉아 번갈아 주사위를 바닥에 굴렸다. 주사위놀이는 운경이가 거의 이기는 바람에 이마는 주로 승업이 맞았다. 그래도 승업은 조금도 억울하 지 않았다. 오랜만에 비슷한 또래와 노는 것이 좋았다. 눈만 뜨면 밥 얻어먹을 궁리나 해야 하고, 해지면 잠 잘 곳을 찾느라고 눈치만 늘려 왔던 때를 생각하 면 이 호강이 웬 떡인가 싶었다. "도련님. 주사위놀음은 재미없으니까니, 다른 놀음을 하시자요." "어떤 거?" "술래잡기는 어떻갔시요?" "그럼, 너부터 술래 하겠니?" "좋습네다. 꼭꼭 숨으 시라요." 승업이 벽에 이마를 붙이고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운경이 다람쥐처럼 달아나 몸을 숨겼다. 승업은 운경을 찾아 내려고 집안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녔다. 터가 워낙 넓은데다가 집 구조도 잘 몰라 운경이 어디에 숨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 다. 곳곳을 기웃거려도 찾아 낼 도리가 없었다. 이때였다. 후원 어귀에서 귀밑머리에 제비댕기를 한 처녀가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었다. 승업은 이 집에 와서 내내 방에만 처박혀 있던 터라 그 처녀가 누구 인지 알아챌 도리가 없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분명 하녀는 아니었다. 음전한 자 태도 그러려니와 미색이 주위의 꽃을 무색케 할 정도였다. 승업은 자신이 술래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그녀를 바라보느라고 그만 넋 이 빠져 있었다. 마치 선녀가 내려와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운경은 술래가 궁금했던지 마침내 스스로 모습을 드러 내고 말았다. "너는 술래 주제에, 딴전만 피우고 있으면 어떡하니?" "집이 너무 크니까니, 못 찾갔시요." "그러면, 네가 또 술래를 해야지." "도련님, 그보다..." 처녀가 후원을 가로질러 별채가 있는 쪽으로 사라지고 있는 뒷모습을 흘끔거 리면서도 차마 말을 잇지 못하였다. "왜 그러니? 따로 할 말이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요. 내래 다시 술래 하갔 시요. 어서 숨으시라요."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 어서 말해 봐." "...방금 지 나간 처녀래 누굽네까?" "저 아가씨 말인가?" 운경이 막 자취를 감춘 그녀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승업이 여전히 넋이 빠진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내 누님이야." "...기렇구만요. 어찌나 고운지, 정신을 잃었댔시요." "그래서, 네가 술래라는 걸 잊어먹었구나. 설사 그렇더라도, 네 처지로는 내 누님을 품을 수가 없는 법이다." "기런 뜻이 아니야요. 거저, 처음 보는 처녀라서 물어 본 거 야요. 감히 제가 기런 생각을 가지갔습네까? 천벌을 받을 짓이야요." "그만 알 았으니, 어서 술래나 해라." 그러나 승업은 금방 그녀를 잊을 수가 업었다. 여지껏 그토록 아름다운 처녀 를 본 적이 없어 아예 선녀로 단정짓고 있는 중이었다. 승업은 놀이에는 이미 흥미를 잃어 건성으로 운경을 찾아다녔다. 천애고아에 다가 밥까지 얻어먹는 주제에 지체 높은 주인집 딸에게 눈길을 던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승업은 그렇게 자신을 비웃으면서도 차마 그녀를 마음에서 밀어 내지 는 못하였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두 말랬잖네. 이튿날 아침. 이응헌이 갑자기 승업을 사랑채로 불러들였다. 또 새로운 그림을 보여 주려고 부른 것이다 싶으면서도 승업은 공연히 마음이 켕겨서 주인을 곁눈으로 흘끔거 렸다. 어제 그의 딸을 훔쳐본 일이 운경을 통해서 귀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걱 정이 되었다. "부르셨습네까?" "싱겁기는... 불렀으니까 네놈이 와 있지 않느냐." "네, 나 으리." "내 서찰을 줄 터이니, 한눈팔지 말고 곧장 와야 하느니라." "네, 나으 리." 승업이 이응헌으로부터 사찰을 건네 받고 뜰로 막 내려서는데 뜻밖에도 어제 그 처녀가 정원을 사뿐사뿐 가로지르고 있었다. 순간 승업은 슴이 딱 끊어진 것 처럼 정신이 아득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듯 승업에게 눈 길도 돌리지 않았다. "이놈아. 무슨 일로 거기에 서 있느냐?" 집사가 불쑥 나타나 승업에게 눈을 부라렸다. "나으리께서 심부름을 시키셨시요." "그렇다면 빨리 가지 않고, 왜 그러구 있 어?" "지금 갈 참입네다." 승업은 비로소 정신을 수습하고 내빼듯이 집을 빠져나왔다. 어쨌든 집사의 심 술은 꼭 놀부를 닮았다. 주인집 식구를 빼 놓고는 누구에게나 심통을 못되게 부 리는 사람이었다. 고작 집사 주제에 큰 벼슬이나 한 것처럼 아랫사람들을 능멸 하였다. 승업은 약전으로 가는 길에 청계옥에 잠시 들러 볼까 말까 망설였다. 연홍이 와 옥수 얼굴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그들이 보고 싶었다. 물론 미향의 얼굴도 떠 올랐지만 매정하게 지워 버렸다. 그 계집애가 건방지게 굴었던 것을 생각하면 청계옥을 피해 가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은혜를 크게 베풀었던 연 홍이나 늘 웃는 얼굴로 대했던 옥수를 생각하면 꼭 들르고 싶었다. 발길은 이미 청계옥 쪽으로 돌려지고 있었다. 두 여자의 고운 마음씨와 얼굴 이 승업을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청계옥에 당도해서도 승업은 몸을 선뜻 넣지 못하고 안을 기웃거리기만 하였 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이때 누군가 살며시 다가와 "웬놈인데 남의 집을 기웃거려? 도적질하러 왔지?" 하고는 전후 사정을 묻지도 않고 승업의 등짝을 냅다 후려쳤다. 그는 청계옥 물지게꾼인 허 서방이었다. "승업이야요. 이 집에서 머슴 했잖습네까." "오냐, 그러고 보니... 약전으로 팔 려 갔다더니, 그새 쫓겨났어?" "기런 게 아니야요." "아니긴 뭐가 아냐. 배가 고프니깐 밥이나 얻어먹을까 싶어 왔지?" "기런 게 아니라니까요. 중추원부사 나으리 심부름 가는 길이야요." "그러면, 네놈이 그 댁 머슴이 됐단 말이냐?" "기래요." "밥은 굶지 않겠구나. 그런데, 여긴 왜 왔어?" "연홍 아씨래 잘 계신 지, 궁금해서 들렀시요." 마침 미향이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뜻밖에 승업이 서 있는 것을 보자 대뜸 눈부터 흘겼다. "그러면 그렇지. 약전에서 도망을 쳤다더니, 결국은..." "약전에서 도망을 치다 니...? 누가 기래?" "누구긴 누구야, 약전에서 그러지." "거지뿌렁이야. 주부 어 른께서 나를 중추원부사 나으리 댁에 데려다 주셨어. 그 댁에서 내가 얼마나 호 강하고 있는지, 네가 몰라서 기래." "말도 잘 지어 내는구나. 그 댁에서 너 같은 거렁뱅이를 뭣 땜에 호강을 시키니?" "내 말을 믿지 않갔으면 그만두라우. 나도 너 같은 에미나이하고는 말하디 않갔어." "어머머? 거렁뱅이가 누구한테 계집애 래? 내가 네 계집이냐?" 미향이 입술을 새파랗게 죽여 가지고 승업한테 달려들어 손에 잡히는 대로 마 구 꼬집었다. 손끝이 어찌나 매운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내래 이자는 거렁뱅이가 아니야." "그럼, 갑자기 양반이라두 됐다는 말이 냐?" "누가 양반이랬어? 부사 나으리 댁에 머슴이 됐단 말이야." "고작 머슴 꼴에... 그래, 큰 벼슬 했다. 그래서 자랑하러 왔니?" "연홍 아씨 뵈러 왔어야." "머슴 자랑하려구?" "자꾸 머슴, 머슴 하디 말라우. 기러는 너는 뭐 별거니? 몸 종이니까니, 너두 머슴이나 마찬가지야. 알갔어?" "어머머? 내가 왜 머슴이니?" "민하게 굴기는... 너랑 말하기 싫으니까니, 날래 비키라우. 연홍 아씨 뵙고 빨리 가야 돼." 승업은 미향을 싹 무시한 채 비로소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연홍이 대청을 서 성거리다가 승업이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아니...? 너 승업이 아니냐?" "네, 아씨. 그 동안 안녕하셨습네까?" 승업이 그 자리에 엎드려 연홍에게 큰절을 올렸다. "여기는 웬일로 왔지?" "부사 나으리 심부름 가는 길에, 아씨께 인사드리려구 왔시요." "기특하구나. 그 댁에 있을 만하니? 소식을 들으니, 그림을 아주 잘 그 린다고 하더구나. 너한테 그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구나." 그러자 미향이가 갑자기 숨을 씩씩대며 앞으로 나섰다. "고작 머슴이 됐다는데, 제까짓 것이 무슨 그림을 그리겠어요." "조런 방정이 라니... 이것아. 너 같은 것은 저 아이 발가락의 때만도 못한 것이야." "아씨. 어 찌 그런 말씀을..." "사실이 그러하니, 앞으로는 저 아이한테 입을 함부로 놀리 지 말아라. 내 말 알아듣겠어?" "...네." 결국에는 미향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어디론가 내뺐다. "승업아. 조 계집아이가 버릇이 없어서 그러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지 말아라. 너는 그림을 더욱 열심히 배워서,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씨 말 씀, 명심하갔습네다." 승업은 다시 큰절을 올리고 청계옥을 나왔다. 미향이한테 너무 야박하게 군 것이 갑자기 마음에 걸렸다. 짓궂고 성질이 못된 계집애이긴 해도 자신과 비슷 하게 불쌍한 처지인 것을 생각하면 좀더 부드럽게 대해 줄 것을 잘못했다는 후 회가 비로소 들었다. 비렁뱅이가 하늘을 불쌍히 여긴다더니, 내래 기 짝이로구나기래. 13 승업은 청계옥을 나서자마자 약전을 향해 줄달음을 쳤다. 가는 길에 한눈팔지 말라던 이응헌의 당부를 까맣게 잊고 청계옥에서 잠시 지체했던 것이 마음에 걸 렸다. 하늘처럼 받들어도 부족할 주인의 명을 멋대로 어긴 것은 아무리 생각해 도 배은망덕한 짓이었다. 더구나 집안에 환자가 있어 약을 짓는 일임을 생각할 때 더욱 송구했다. 약전에 들어서자 마침 변 주부가 앉아 있었다. 새로 들어온 사동에게 약재 써 는 법을 가르치고 있던 중이었다. "나으리. 그간 안녕하셨습네까?" "오냐, 승업이로구나. 헌데, 네놈이 웬일로 왔느냐?" "부사 나으리 심부름 왔습네다." 승업이 품에서 서찰을 꺼내 변 주부에게 건넸다. 변 주부가 서찰을 읽는 동안 승업은 자신의 뒤를 이은 사동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몸피로 보나 생김으로 보나 자신보다 어린 나이가 틀림없어 대뜸 반말로 속삭였다. "나도 여게서 일했댔어. 너는 언제 완?" "한 달 됐다." "밥은 배불리 먹디?" "나는 약전 일을 배우러 왔지, 밥 얻어먹으러 온 게 아니다." "...기렇구나. 몇 살이네?" "열두 살이다. 너는?" "너보다 두 살 많아야. 이름이 뭐이가?" "미욱 이다. 너는?" "승업이. 성은 장가고." "오오라. 네가 바로 그 거렁뱅이로구나." "뭐이? 이자는 거렁뱅이가 아냐. 머슴이 됐어야. 기런데, 나를 알아?" "...미향이 한테 들어 알고 있다." "미향이를 어드렇게 아네?" "...내 누이다." "참말이가? 고 에미나이가 정말 네 누이란 말이가?" "넘 처녀한테 에미나이가 뭐니. 입을 함부로 놀리면 못쓴다." "성질이 못돼서 기래." "그래도 그렇지. 말투가 그러니 까, 너는 천상 쌍것이다." "...건방지기는 오누이가 똑같구나기래." 승업은 아래 나이한테 무안당한 것이 내내 분하면서도 그가 미향의 동생이라 는 사실에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래도 승업은 그들 남매가 은근히 부러웠 다. 그들이 부모를 여의긴 했어도 자기처럼 천애의 고아가 아닌 것만으로도 얼 마나 행복한 일인가. "미향이가 나를 어드렇게 말하든?" "오로지 밥밖에 모르는 미련퉁이라고 했 다. 틀렸니?" "...밥은 많이 먹어두, 미련하디는 않아야. 내래 얼마나 날랜지 아 네?" "너는 글도 못 깨우쳤다믄서?" "배울 기회가 없었어야." "그렇게 까막눈 이니, 고작 머슴이지." "기렇게 말하는 너는 글을 얼마나 깨우쳤네?" "많이는 못 배웠어도, 천자문 반은 뗐다." "..." 승업은 그만 입을 봉하고 말았다. 천자문씩이나 뗐다는 말에 주눅이 들어 더 는 마주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쩐지 또박또박 대꾸하는 태도로 보아 보통내기는 넘겠다 싶었다. 서찰을 다 읽고 난 변 주부가 이것저것 약재를 꺼내 저울에 달기 시작하였다. 누구 약을 짓는 것인지 궁금했다. "누구래 아픕네까?" "그 댁 따님 약이니라." "따님이라면, 선녀처럼 고운 그 처녀를 말하는 겁네까?" "딸이 하나뿐이니, 그렇겠구나. 얼굴을 보았느냐?" "멀찌감치서 잠깐 봤댔시요." "정말, 선녀 같더냐?" "선녀가 틀림없시요. 여적 그렇게 아름다운 처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네다. 꼭 그림 같았시요." "녀석 하고는... 이놈아. 언감생심, 함부로 눈길 주지 말아라. 그랬다가는 동지사 어른한 테 살아남지 못할 거이다. 알았느냐?" "기럼요. 제가 어드렇게 마주 보갔시요." "사람이란 항상 제 분수를 깨달아야 하느니라." "명심하갔시요." 그러나 승업은 마음이 아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그 고운 처녀가 아플 것이 뭔가 싶어 가슴이 답답하였다. 이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불쑥 들어섰다. 뜻밖에도 이용후였다. "나으리..." "아니...? 너 승업이가 아니냐?" "네, 나으리. 그간 옥체 만강하셨 습네까?" 승업은 재빨리 바닥으로 내려서 넙죽 큰절을 올렸다. 마치 그리운 님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네놈이 여기는 웬일로 왔더냐?" "부사 나으리 심부름 왔습네다." "있을 만 하더냐?" "네, 나으리. 너무 호강을 해서 몸살이 날 지경입네다." "변죽도 좋아 졌구나. 그래, 그림은 많이 그렸느냐?" "거저, 그림만 그립네다." "주로, 무슨 그림을 그렸더냐?" "맨날 같은 것만 그리고 있시요. 그릇과 나무와 꽃도 그리 고, 짐승과 새도 그리고, 산과 물도 그립네다." "네가 그린 것들이 마음에 들더 냐?" "나으리. 이자는 남의 것을 흉내내는 것보다 제가 사물을 직접 보고 그렸 으면 좋갔습네다. 흉내만 내니까니, 재미가 없시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 냐?" "나으리. 제 생각이 틀렸습네까?" "아니다. 네 생각을 묻고 있는 것이다." "...감히 말씀드려도 됩네까? 야단치지 않으시갔시요?" "오냐. 말해 보거라." "사물이란 그걸 보는 사람마다 생각이 틀려서, 반드시 그 사물과 똑같이 그려야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네다. 어드런 사람은 산을 호랑이가 앉아 있는 형상 으로 그리는 사람도 있고, 어드런 사람은 거북이 형상으로 그리는 사람도 있고, 또 어드런 사람은 토끼 형상을 그리는 사람도 있습네다. 뿐만 아니라, 기암절벽 만 그리는 것이 꼭 바위를 잘 그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네다. 나무도 기렇고, 꽃도 기렇고, 과실도 기렇습네다." "옳거니... 그래서?" "기래서, 이자는 남의 그림을 흉내내는 것보다는 제가 사물을 직접 보고 제 마음 내키는 대로 그렸으 면 좋갔습네다." "동지사 어른께 그리 말씀드렸더냐?" "아닙네다.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가 없었시요. 저는 거저 나으리가 시키는 대로 따를 뿐입네다." "그 것도 그른 생각은 아니니라. 그 어른이 너의 재주를 좀더 숙달케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아직은 그분 뜻에 따르는 것이 좋으니라. 사람이 자기 재주만 믿고 방자 하면 못쓰는 것이다. 내 말을 알아듣겠느냐?" "네, 나으리." "동지사께서 네가 그린 것을 다 어찌하시더냐?" "부사 나으리께서 가지고 계시기도 하고, 어느 때 는 나으리를 찾아오시는 손님들한테 나눠 주실 때도 있습네다." "허면, 나한테 는 언제 줄 것이냐?" "제가 그린 것을 감히 어드렇게 드리갔습네까. 더 숙달을 해서, 낙관을 할 처지가 돼야 드리지 않갔습네까." "그때가 되면 나한테도 몇 점 줄 것이냐?" "몇 점이 뭡네까. 아예 다 드리갔습네다." "이놈아. 약조를 지 키지 못할 일은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는 법이다." "...네, 나으리." 그러는 사이에 변 주부가 약을 다 지어 꾸러미를 들고 승업 앞에 밀어 놓았 다. 승업은 약 꾸러미를 가슴에 안고 일어날 차비는 하였으나 선뜻 자리를 뜨기 가 싫었다. 이용후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헤어 지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치 부모와 헤어져 천릿 길을 떠나는 심정이었다. 그러면서도 한눈팔지 말라던 이응헌의 얼굴이 떠올라 안절부절못하였다. "서둘러 가지 않고, 왜 그러고 있느냐?" 변 주부가 남의 속도 모르고 눈부터 부릅떴다. 그러자 이용후 역시 속히 떠나 라고 재촉하였다. 그러는 이용후가 갑자기 야속하였다. "나으리. 약전에 오다가 청계옥에 들렀댔시요." "청계옥에도 볼일이 있었더 냐?" "연홍 아씨한테 문안인사 여쭈러 갔댔습네다." "...기특하구나. 잠시나마 네놈을 거둬 준 사람이니, 그리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니라. 연홍이 너보고 뭐라 하더냐?" "그림을 열심히 그려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했시요." "옳은 말이니 라. 동지사 어른께서 네놈 배를 곯지 않게 하시고, 편한 처소까지 마련해 주셨으 니, 그림을 열심히 배우는 것만이 그분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니라." "네, 나으 리." "그럼, 어서 가거라. 심부름 온 녀석이 이리 지체해서야 되겠느냐?" "기 럼, 옥체 보전하시라요. 주부 어르신도 옥체 보전하시라요. 가갔시요." 승업은 두 사람에게 번갈아 큰절을 올렸다. 그 눈에 이슬 같은 눈물이 방울방 울 맺혔다. 그러자 이용후가 허리춤을 열어 엽전 한닢을 승업의 손에 쥐여 주며 종로 거리에서 엿이라도 사서 물고 가라고 하였다. 승업이 나가자 이용후는 그제서야 약전 마루에 올라 좌정을 하였다. "변 주부. 저놈 근황은 들으셨소?" "자주 듣고 있습니다. 벌써, 장안에 소문이 났지 뭡니까." "소눔이 나다니요?" "그림에 신동이 나타났다는 쫙 퍼져 있습니 다." "저런... 내 귀만 어둡구료. 신동이라는 말이 퍼졌으니, 역시 재주가 비상한 모양이오." "그렇습니다. 그 어른의 친지들이 와서는 승업의 그림 한 장씩을 얻 어 갔다고 합니다." "그럴 정도로 솜씨를 보였단 말이오?" "마침 저도 두어 장 얻어 왔습니다만... 보시겠습니까?" 그리고는 연상에서 화선지 묶음 하나를 꺼냈다. 변 주부가 펴 든 그림은 남종 화풍의 산수도와 조어도 두 장이었다. 산수화는 원근법을 효과적으로 살려 사실 성을 높인 것이었고, 조어도 역시 자연 경관을 원근법으로 처리하여 강 한가운 데에 배를 띄워 놓고 낚시하는 정경이었다. 두 그림 모두 훌륭한 솜씨였다. 물론 모사품이기는 하지만 배움이 전혀 없었던 아이의 그림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나일. 제 얕은 안목으로는 경탄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나 역시 변 주부 생각과 같소이다. 재주가 이러하니, 이제는 장안에 이름난 화가한테서 수업하는 것이 어떨까 싶소만..." "그렇잖아도, 오래 전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 다. 어디 마땅한 분이 없을까 수소문하고 싶습니다만..." "그런 화가가 왜 없겠 소. 허락을 하지, 그것이 문제지." "나으리 뜻이 그러하시면, 동지사 어른과 상 의해 보겠습니다." "나도 알아볼 수는 있겠지만, 동지사가 승업이를 보살피고 있는 중이니, 일단은 그분과 의논하는 것이 옳을 듯싶소." 이용후는 약전을 나서자마자 곧장 청계옥으로 갔다. 김후안의 사제 서품식에 연홍을 참석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미 순교한 김범우의 후손인 김후안이 오랫동 안 전교활동을 활발히 펴 왔으나 서품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던 차에 마침 만주 에서 활동하던 베르뇌 장 주교로부터 신부 서품을 받게 되었다. 베르뇌(한국명 장경일) 주교는 불란서 사람으로 오랫동안 만주에서 전교하던 중, 철종 7년(병진년)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조선의 제4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입국하였다. 연홍은 기녀 노릇을 하면서도 의외로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배우고 천주를 믿 는 마음이 독실하여 이용후를 매우 감동시키고 있었다. 이번에 김후안이 서품을 받게 되었다고 하자 그녀가 자청해서 서품식에 참석하고 싶다고 하여 함께 가기 로 약속한 것이다. 청계옥에 당도하자 제일 먼저 미향이가 다가와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인사하 는 얼굴 표정이 왠지 밝지 못하였다. "잘 있었느냐?" "네, 나으리." "승업이한테는 아직 소식이 없더냐?" 이용후는 미향이를 놀려 줄 심산으로 시치미를 뚝 떼고 넌지시 물었다. 그런 데도 여전히 볼에 바람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조금 전에 왔었사옵니다." "그래? 꼴이 어떠하더냐?" "...신수가 좋아 보였 사옵니다." "거 참, 이상한 일이로구나. 거지 꼴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느냐." "어느 나으리 댁에서 그림을 배운다고 하였사옵니다. 거기서 밥을 배불리 먹는가 보옵니다." "그놈 신수 좋아졌다고 하니, 네 마음이 어떠하더냐? 좋더냐?" "제 마음이 좋을 것이 뭐 있겠사옵니까. 저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네 입이 대짜로 나와 있느냐?"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며 어디론가 내빼 몸을 숨겼다. 그 표정에서 승업을 은근히 흠모하고 있음을 역력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연홍이 이미 떠날 채비를 해 놓고 이요후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 얼굴에 흥분이 잔잔하게 배어 있음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음이 들떠 있는 듯싶었다. "나으리. 조금 전에 승업이가 왔었사옵니다." "변 주부 약전에서 봤네." "그 렇사옵니까? 그림에 발전이 많은지요." "나만 모르고 있었는데, 신동이 나타났 다는 소문이 돌 정도라네." "그 정도이옵니까? 정말 놀라운 일이옵니다. 그 아 이를 처음 봤을 때는 꼴이 하도 더러워, 평생 사람 대접도 못 받을 것 같았사옵 니다." "어쨌든, 신통한 일이네. 박복하여 부도 일찍 여의고 일가붙이 하나 없이 저토록 떠도는 신세가 안타까울 뿐일세." "그리 생각하면, 세상이 공평치 못한 듯싶사옵니다." "내 생각도 그러하다네." "나으리. 승업한테도 천주님을 믿게 하심이 어떠하올는지요?" "아직은 그럴 처지가 아니잖는가." "...무슨 뜻이옵니 까?" "생각해 보게. 남의 집에 있는 몸이 어찌 출입이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아직은 천주님을 깨달을 나이도 아니고." "제 생각이 매우 짧았던 것 같 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나갈 차비가 되었으면, 그만 나가세." 그러자 연홍이 서둘러 옷매무시를 고치고 장옷을 팔에 걸었다. 대청을 내려서 자 마침 옥수가 따라나와 두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형님. 오늘도 나으리와 동행하세요? 지난번에도 함께 가시더니..." "나으리 모시고 다녀올 곳이 있으니, 입 단속하여라." "입 단속하라니요? 어디 소풍이라 도 가십니까?" "굳이 알려고 하지 말아라. 나중에 자연 알게 될 것이다." "나 으리. 좋은 구경이면 저도 데리고 가셔요." "연홍이 말이 맞으니, 당장 알려고 하지 말게." "번번이 저만 떼어 놓고 가시니, 매우 섭섭하옵니다." "기회가 닿 으면, 너도 데려갈 것이다." "약조하셨습니다, 나으리." "오냐." 비로소 두 사람이 청계옥을 빠져나와 종로를 가로질러 북달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로를 피해 가는 길이라 행인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면식 이 있는 사람을 만날까 싶어 특히 연홍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들이 모르는 체하고 지나치면 다행이지만 짓궂은 사내라도 만나면 변명하기가 매우 구차할 것 같았다. 장안에서 오랫동안 기생 노릇을 하는 처지라 청계옥에 출입하는 사 내들 중에는 연홍의 얼굴을 단박에 알아볼 것이 뻔하였다. 만약 불량스러운 한 량과 마주치는 날에는 낭패한 일을 겪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더구나 이용후와 동행하는 중이라 그에게 누를 끼칠까 봐 제일 걱정이었다. 그런저런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이용후를 따라붙고 있는데 아니나다를까. 머리 에 초립을 삐딱하게 얹고 팔을 별나게 저으며 저만치서 걸어오는 사내가 연홍의 눈길에 잡혔다. 팔을 유별나게 흔들며 걷는 모양이 틀림없이 '수표교 꼭지'였다. 무지하기가 이를 데 없고 상스러운 행패가 장안에 소문이 나 있는 거지 우두머 리였다. 청계천 준설로 인해 만들어진 가산에 굴을 파 놓고 사는 거지들이 우두머리인 꼭지딴 휘하에 가산에다 대본영을 두고 사대문 안팎으로 광교 지영, 수표교 지 영, 서소문 지영, 새남터 지영 등을 두어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하였고, 각 지영마 다 꼭지라는 이름의 우두머리를 따로 두고 있었다. 꼭지딴을 발견한 연홍은 예감이 좋지 않아 고개를 더욱 숙이고는 장옷을 깊이 눌러썼다. 그런데도 연홍을 대뜸 알아보았다. "아니... 청계옥의 연홍이 아닌가?" 그가 연홍의 앞을 딱 가로막았다. 연홍이 몸을 비껴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하 자 장난스럽게 앞을 또 가로막았다. "그렇게 위장을 한다고 해서, 내가 모를 줄 아나? 원체 뛰어난 미색이라 감출 수가 없지. 그래 어디를 그리 바삐 가는가? 먼 길이면 내가 안내할 수도 있어." 그래도 연홍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연홍의 장옷을 벗기려고 자락을 움켜쥐었다. 술냄새가 아주 역하게 풍겼다. 연홍은 길거리에서 낭패한 꼴을 당할 까 몹시 두려웠다. 이때 이용후가 소리를 벽력같이 질렀다. "웬놈이냐? 웬놈인데, 감히 부녀자를 희롱해?" "어어라? 그러는 댁은 누구 슈?" "내가 누군지는 네놈이 알 바가 아니니, 썩 길을 트렸다." "오오라. 말투 로 보아 양반인 것 같은데... 나를 언제 봤다고 이놈 저놈 욕지거리슈? 그리고 댁과는 상관없는 일 아니오?" "저런 쌍것이 있나. 나랑 동행하는 중이니 썩 물 러서렸다. 부녀자를 희롱하는 죄가 어떤 것인 줄 몰라서 이러느냐? 당장 포도청 에 끌고 가기 전에 당장 물렀거라." "희롱이라...? 마침 눈에 익은 기생을 만나 그저 아는 척만 했을 뿐인데, 그것이 어째서 희롱이란 말이오? 그렇다면 포도청 에 함께 가서 시비를 가려 볼깝쇼? 원래, 기생은 임자가 따로 없는 것이라, 희롱 은 가당치 않은 말이오." "네 이놈. 그래도 물러가지 않고 입을 놀려? 경을 칠 놈 같으니." "허허허. 나는 이미 경을 친 지 오래 된 놈이오." 놈이 갑자기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우악스럽게 생긴 팔을 이용후에게 들이밀었 다. 그의 팔뚝에는 '입묵자자'가 징그럽게 새겨 있었다. 입묵자자란 전과자임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옛날에는 전과자의 얼굴이나 팔뚝에 먹물로 표시를 새겨 넣 었다. '먹물뜨기'로서, 이를 경을 친다고 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경을 치면 조상 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해서 집안 제사에도 참석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보 는 사람들마다 그들을 무서워하는 바람에 장사조차 할 수가 없어 살아갈 길이 막막하였다. 결국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가산의 땅굴밖에 없는 신세였다. "이제 보니 아주 불상놈이로구나. 청계천 가산에나 처박혀 있을 일이지, 무슨 염치로 세상을 활보하느냐. 썩 물러서라. 그렇지 않으면 내 손으로 당장 요절을 낼 것이다." 이용후가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자 그제서야 그가 주춤주춤 뒷걸 음질을 쳤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이용후가 연홍의 팔을 낚아채 뒤로 숨겼다.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당장 내 앞에서 떠나라. 알았느냐." "양반이 라고, 호령은 제법이오." 그가 몇 마디 더 중얼거리고는 비로소 등을 돌렸다. 이용후는 마치 더러운 물 건이라도 만졌던 것처럼 손을 탁탁 털며 앞장서 걸었다. "보통 흉악한 것들이 아니온데, 나으리 담력이 대단하시옵니다." "비렁뱅이들 이란 원래 강자한테는 약하고, 약자한테는 강한 체하느니. 세상에서 격리된 자들 이라, 자연 흉악해질 수밖에. 그런데 저놈이 자네 얼굴을 어찌 아는가? 감히 기 방 출입을 한 것은 아닐 테고..." "저 자가 바로 수표교 꼭지이옵니다. 무슨 때 만 되면 몰려와 돈을 뜯어 가거나 음식을 얻어 가옵니다. 떼로 몰려와서는 소란 을 피우는 바람에, 그때마다 귀찮아서 몇 푼 줘서 보내곤 하였사옵니다." "경을 더 쳐야 정신을 차릴 놈들이네." "풍문에 의하면 지체 높은 분들이 저 자들을 비호한다고 하옵니다." "나도 들어서 알고 있네. 몇몇 세도가들이 놈들과 야합 하여 반대파의 행적을 염탐시키거나, 훼방놓도록 이용한다고 들었네." "그러니, 저 자들이 더 기승을 부리는 것 아니옵니까." "실은, 그 세도가들이 더 몹쓸 짓 을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세상이 이 모양으로 돌아가니 원..." "나으리." "왜 그러나?" "왠지 방정맞은 생각이 드옵니다." "무슨 뜻인가." "조정에서는 여전 히 천주교 교우들을 박해한다지 않습니까?" "전처럼 그리 심하지는 않네." "하 오나... 저 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지 뭡니까. 혹시, 서품 식에 포졸들이 들이닥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방금 하였사옵니다. 그리 되면..." "그것이 그리 두려운가?" "저같이 천한 것이 아무려면 어떻겠습니까. 다만, 나으리께서 낭패를 보게 되실까 염려되옵니다." "괜찮네. 우리한테는 천주 님이 계시지 않은가. 천주님께서 우리 교우들을 보호하실 걸세." "그렇기는 하 옵니다만..."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 가야 하네. 많이 지체하였어." 이용후는 연홍의 우려를 무시한 채 보폭을 늘려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그 러자 연홍이 종종걸음으로 굽히 따라붙었다. 14 승업이 약 보따리를 안고 헐레벌떡 대문을 들어서자 오래 전부터 지키고 있었 던 것처럼 집사가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고 있었다. 그가 승업을 위 아래로 훑어 내리더니 왜 이제 오느냐고 호령하였다. 승업은 구차한 변명은 않고 그저 달려 오는 길이라고만 하였다. 그러자 집사가 승업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이놈아. 이실직고하여라. 그렇지 않았다가는 주리를 틀 것이다." "정말입네 다. 약전에서 달려오는 길이야요." "이놈이 그래도..." 집사가 승업의 볼을 잡아 마구 비틀었다. 그리고도 부족한지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으며 종주먹을 댔다. "이놈아. 내 눈은 못 속인다. 네놈이 엿방에 들렀다 온 것을 내 다 알고 있는 데, 시치미를 떼?" 순간 승업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엿 먹은 것을 그가 어떻게 아는지 귀신 이 곡할 만큼 신기하였다. 그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추궁하는 데는 더 속일 방 법이 없었다. "그래도, 이실직고 못하겠느냐?" "실은, 엿 하나 사 먹었습네다. 엿만 샀디,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시요." "엿을 사 먹었다? 그 돈은 어디서 났느냐?" "...누 구래 주셨습네다." "누가? 변 주부가 주더냐?" "아닙네다. 이 진사 나으리가 주셨시요." "그가 누군데 네놈한테 엿값을 주더란 말이냐." "제가 이 댁에 오 기 전에, 저를 약전에 데리고 가신 나으립네다." "그 사람은 어디서 만났느냐?" "마침, 약전에 오셨댔시요." "사실이렸다?" "정말입네다. 기런데 제가 엿 먹은 걸 어드렇게 아셨습네까?" "이놈아. 네놈 볼때기랑 옷섶에 엿가루가 묻었는데, 그걸 왜 몰라." "기래서 아셨구만요. 정말, 귀신같이 찾아 내셨습네다." "이놈 아. 귀신이 따로 있냐? 내가 바로 귀신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나를 속일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라. 알았느냐." "...앞으로는 안 기러갔시요. 기런데 이 댁 아씨는 어데가 아픕네까?" "이놈아. 네까짓 놈이 그런 걸 알아서 뭐 해? 대감마 님께서 아까부터 네놈 오기를 기다리시니, 어서 여쭙거라." 승업은 집사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남기고 사랑채로 달려갔다. 인기척을 들었 는지 이응헌이 안에서 헛기침을 하였다. "승업이 왔느냐?" "네, 나으리. 약 지어 가지고 왔습네다." "수고했다. 어서 네 방으로 가 그림을 마저 그리도록 하여라." 그러나 승업은 자리를 바로 뜨지 않고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따로 할 말 이 있는 듯 버티고 있자 이응헌이 눈치를 채고 그제서야 방 문을 열었다. "왜 가지 않고 있느냐?" "...나으리."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게냐?" "이자는 남의 그림을 흉내내지 않고, 실물을 그렸으면 좋갔습네다." "벌써 실증이 났느 냐?" "아닙네다. 거저, 내래 실물을 보고 그렸으면 좋갔어서 기럽네다." "약전 에서 그리 시키더냐?" "아닙네다. 내래 혼자 생각했시요." 그리고는 약전에서 이용후한테 말했던 것처럼 이응헌한테도 그 뜻을 똑같이 반복해 전하였다. 이응헌이 잠시 눈을 감더니 무엇인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 에 한참 빠져 있었다. "나으리께서 안 된다고 하시면, 안 하갔시요." "무엇을 그릴 셈이냐?" "꽃도 그리고, 나무도 그리고, 산도 그리고, 닭도 그리고, 개도 그리고, 고양이도 그리 고..." "그만, 알았느니라. 네놈 뜻이 정 그러하다면, 어디 마음대로 그려 보거 라." "기럼, 허락하시는 겁네까?" "오냐. 그 대신, 꾀를 부려서는 안 되느니라. 알았느냐?" "명심하갔습네다." 승업은 매우 기뻤다. 이제는 방에만 처박혀 있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실물 을 제 생각대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기분이 날 듯이 좋아진 승업이 깡총거리며 사랑채를 벗어나는데 집사가 나타 나 불러 세웠다. 또 물독을 채우라는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라는 분부가 있었다 고 하자 들은 척도 않고 서둘러 채우라고만 하였다. 승업으로서는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엿을 몰래 먹은 사실을 속인 약점도 있는데다가 그에게 번번이 밉 게 보여서 신상에 이로울 것이 없겠다 싶었다. 승업이 물통과 지게를 가지러 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마침 약 달이는 냄새 가 코를 찔렀다. 이 댁 아씨가 먹을 약이려니 싶어 냄새나는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마침 찬모가 쪼그리고 앉아 약 화로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아주마이. 이거이 이 댁 아씨 약입네까?" "그건 왜 물어? 네놈도 먹고 싶으 냐?" "당치도 않습네다. 거저, 궁금해서 기럽네다." "그래. 아씨가 드실 약이 다." "기렇게 고운 아씨래 어데가 아파서 약을 드십네까?" "바람머리를 앓고 계시단다." "...어드렇게 아픈 게 바람머립네까?" "바람만 쐬면 머리가 아픈 병 이지." "기럼, 바람이 부는 날에는 늘상 방에만 계셔야 하갔습네다." "기러니, 얼마나 갑갑하시겠니. 불쌍도 하시지. 마음씨도 고운 아씨가..." "기런 병은 와 생기는 겁네까?" "이놈아. 내가 그걸 알면 의원 노릇을 하지, 왜 찬모를 하겠니. 안 그러냐?" "맞습네다." "꼼지락대지 말구, 어여 물이나 길어다 붜. 집사 어른 한테 야다맞지 말고." "...아씨 대신 내래 아팠으면 좋갔습네다." "싱겁 떨지 말 구, 어여 가." 승업은 다시 마음이 무거웠다. 찬모한테 말했듯이 정말 자신이 대신 아플 수 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 그녀를 병고에서 구출하고 싶었다. 참으로 세상이 불공 평하였다. 미향이처럼 못된 계집애는 아픈 곳 없이 쌩쌩한데 하필이면 선녀 같 은 주인집 아씨가 아플 것이 뭔가 싶었다. 미향이는 원체 차돌같이 단단해서 평 생 고뿔도 걸리지 않을 계집애였다. 그렇게 단정하자 미향이가 갑자기 더 얄밉 게 생각되었고 선녀 같은 아씨는 더욱 불쌍하였다. 미향이가 연홍의 시중을 끝내고 대청을 내려서는데 약전에서 일하는 동생이 정원으로 슬그머니 들어섰다. 뜻밖이라 놀라우면서도 반가웠다. "약은 안 썰고, 여긴 왜 왔니?" "누님이 보고 싶어서 왔지." "그렇게 한가하 니?" "주부 어른이 쉬라고 하셨어." "밥은 배불리 먹어?" "승업이라는 아이와 똑같은 소리를 하네. 내가 약전 일 배우러 갔지, 밥 얻어먹으러 갔나? 내가 거지 야?" "그렇더라도 배를 곯면 되니?" "누님이 자꾸 밥타령하는 걸 보니까, 승업 이 그 아이한테 옮았나 보다. 그렇지?" "너도 승업이를 만났니?" "아까, 약전 에서 보았지. 정말 미련퉁이처럼 생겼더라." "너도 그렇게 보았니? 하지만, 이젠 거렁뱅이가 아니래. 그림 잘 그리기로 장안에서 소문이 났댄다. 정말, 신기한 일 이지. 그런 밥버러지가 어떻게 그림을 그린단 말이니? 까막눈 주제에... 제 이름 석 자나 쓰는지 몰라." "주부 어른이 그러시는데, 승업이가 그림에 신동이래." "어머머, 신동? 소문처럼 정말 잘 그리나 보다. 그렇지?" "누님 말 듣고 거지 꼴인 줄 알았는데, 신수가 훤하더라." "여기에 왔었어. 정말 신수가 좋아졌더 라." "그런데, 누님이 그 아이를 왜 자꾸 능멸하지?" "처음에는 거지 꼴에다가 미련해서 그랬지." "지금은?" "...지금은 아냐." "누님 놀려 줄까?" "...어떻 게?" "누님이 그 아이를 흠모한다고." "어머머? 얘가 누님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까불지 말고 입 조심해." "저것 봐. 누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는걸." "얘가 정말... 그딴 소리 할라믄 썩 가 버려. 누님을 함부로 놀리는 동생이 어디 있니? 내가 흠모할 사람이 없어서, 그딴 아이를 흠모하겠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그리고는 휙 돌아서서 부엌으로 몸을 숨겼다. 동생하고 대거리를 계속했다가 는 속을 까 보일 것 같아 켕겼다. 동생의 지적에 그만 가슴이 뛰고 손끝이 떨려 더는 마주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동생이 약전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미향은 오랫동안 가슴을 식히지 못하고 있 었다. 왠지 요즘에 와서 승업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에서 방망이질을 해 대고 속이 상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다가 연홍 에게 들켜 곧잘 꾸지람을 듣곤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그 천덕 꾸러기가 사람 마음을 이처럼 어지럽게 할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구박하지 않을걸... 미향은 한숨을 쉬며 승업이 청계옥을 떠나던 날을 떠올렸다. 한편으로 섭섭했 던 자신의 마음도 모른 채 깡총대며 대문을 나서던 모습이 새삼스럽게 밉살스러 웠다. 천하에 미련퉁이 같은 이라구... 미햐잉 툇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미련퉁이, 미련퉁이를 연해 중얼거리고 있는 데 옥수가 살그머니 다가와서는 옆구리를 쿡 찔렀다. 미향이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바닥으로 나뒹굴 뻔하였다. "어이구 깜짝이야. 사람을 이리 놀래키는 법이 어디 있어요?" "비 맞은 중처 럼 혼자서 뭘 그리 중얼거리니?" "아무것도 아녜요." "아무것도 아니긴? 미련 퉁이 하고 중얼거리던데, 누가 미련퉁이란 말이냐?" "아씨는 몰라도 돼요." 미향이가 숨을 씩씩거리며 몸을 발딱 세웠다. 그러자 옥수가 미향의 팔을 잡 아 다시 끌어 앉혔다. "네가 지금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다 알고 있다." "내가 누구를 생각 한다고 그래요? 나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괜히 생사람 잡지 마세요." "너 정말 시치미를 뗄 것이냐? 내가 맞춰 볼까?" "어디, 맞춰 봐요." "너 승업 이를 그리워하고 있는 거지?" "어머머? 내가 그딴 거렁뱅이를 왜 그리워하겠어 요? 어림도 없어요." "그런데 왜, 얼굴이 빨개지고 몸을 사시나무 떨 듯 하니? 그게 바로 증거가 되는 것이다. 화류계 몇 년인데, 나를 속이려 드니? 너야말로 어림도 없는 수작이다." "아니라니까 자꾸..." 미향이 드디어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얼굴을 손에 묻어 엉엉 울었다. 그렇지 않아도 승업이 야속한 판에, 동생이 와서 속을 뒤집어 놓더니 이젠 옥수까지 달 라붙어 약을 올려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것들이 벌써부터 사랑놀음이라니... 그래, 사람을 사 무치게 그리워하다 보면, 때로는 님이 야속할 때가 있는 것이다. 승업이라는 아 이가 꼴을 저래도 범상한 아이가 아니다. 나는 그 아이가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부터 첫눈에 알아봤단다." "...아씨 눈에 정말 그렇게 보였어요?" "그렇대두. 허 긴, 네 눈에는 거지로만 보였겠지. 보아라. 지금은 그 아이가 장안에서 소문난 환쟁이라 않더냐. 까막눈이 어떻게 그림을 그리 잘 그릴 수 있는지 신통하거든. 안 그러니?" "...실은, 나도 그리 생각하고 있어요." "이제사 네가 이실직고하는 구나. 그러나 그리워한들 뭐 하겠니? 그 아이는 이미 떠난걸. 남녀간의 정이란 곁에 있어야 쌓이는 법이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하다가 지쳐서, 결국 체 념하게 되는 거란다." "정말 그래요? 남녀간의 정은 모두 그런 거예요?" "그렇 다니까. 너도 겪어 보면 자연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형님은 왜 안 오 시지? 진사 어른하고 도대체 어디를 간 것일까?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두 분이 살림이라도 차리셨나?" "연홍 아씨가 입 조심하라고 그러셨잖아요." "누구 듣 는 사람 없이 너랑 단둘인데, 어떠니." "만약에, 아씨께서 아시는 날에는 혼쭐이 나요." "아무래도 두 사람이 수상하단 말이다. 뒤를 밟아 볼 수도 없고..." 옥수가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이리 오너라." 하고 호령하는 이가 있었다. 음색으로 짐작컨대 새원 홍경무 같았다. 미향이가 폴짝거리며 달려나갔다. 역시 홍경무였다. "나으리. 안녕하셨사옵니까?" "오냐. 연호이 안에 있느냐?" "잠시 외출하셨 사옵니다." "어디로 말이냐?" "쇤네는 잘 모르는 일이옵니다." "이년이 바람이 났나? 제 서방이 없는 틈에 바깥 출입을 하다니." 옥수도 쪼르르 달려와 인사를 넣었다. 그러자 대뜸 연홍의 행선지를 물었다. 모른다고 하자 벌컥 화를 내었다. "이것들이 짜구서 연홍이를 빼돌리려 하느냐?"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옵 니다. 저희 같은 것들이 어찌 감히 나으리를 속일 마음을 먹겠사옵니까." "언제 나갔더냐?" "아침나절에 나가셨사옵니다." "하는 수 없지. 이왕 왔으니, 꿩 대 신 닭이라도 잡아먹고 가야지." 다행히도 연홍이와 함께 나간 사람을 묻지 않았다. 만약 이 진사와 동행하였 다고 하면 그가 큰 오해를 할 것 같아 옥수와 미향이 몹시 긴장하였다. "그런데, 다른 계집들은 어째서 코빼기도 내밀지 않느냐." "모두들 몸단자을 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내가 올 줄 알고?" "...그러하옵니다." 홍경무가 걸걸걸 웃으며 대청으로 오르자 때를 맞추어 아랫기생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며 다투어 인사를 하였다. "술상 차리거라. 오늘은 옥수 네가 내 수청을 들렸다. 거역하겠느냐?" "..." "왜 대답이 없느냐? 거역하려느냐?" "어서 안으로 드시옵소서." 옥수가 슬그머니 몸을 빼며 홍경무와 거리를 두었다. 그의 짓궂은 술버릇이 벌써부터 걱정스러웠다. 연홍이 없다는 핑계로 자신이 시달릴 것이 분명하였다. 그는 연홍과 살을 섞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내였다. 그러나 연홍의 마음은 바 늘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굳게 닫혀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기녀들 중에 연홍이 다음으로 인물이 반반한 옥수한테마저 손을 뻗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옥수가 만만한 기생은 결코 아니었다. 서로 정을 나누는 사내가 당장 있는 것은 아니어서 굳이 몸을 잠그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기녀로서 남 자 허우대 좋고 화대만 많으면 하룻밤쯤 허락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정이 들어 사내가 한 밑천 뚝 떼어 주면 그처럼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홍경무는 그런 위인이 못 되었다. 벼슬 없는 전형적인 한량으로서 이 여자 저 여자한테 집적거려 노리개로 삼으려는 수작뿐이었다. 게다가 술이 들어 가면 언행이 매우 지저분하여 연홍이처럼 문장이 있는 기녀들한테는 혐오감이나 줄 뿐이었다. "옥수 네년은 냉큼 들어오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냐?" 드디어 홍경무의 성화가 시작되었다. 제발 연홍 언니가 빨리 들어와야지 밤이 늦도록 오지 않았다가는 대신 크게 곤욕을 치를 것 같았다. "곧 들 것이옵니다." "꾸물거리지 말고 당장 들어오렸다." "...술상 보는 중이 옵니다." "술상은 찬모가 차릴 것이지, 왜 네가 나서느냐. 어서 들거라." 홍경무가 저토록 몸이 달아 있는 것이 아무래도 옥수를 요절이라도 낼 기세였 다. 옥수는 더 미적댈 수가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장침에 기대어 보료 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내가 싫으냐?"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술상을 차리도록 특별히 당부하고 있 었사옵니다." "그렇다면 기특하구나. 어서 다리 좀 주무르거라." 그리고는 천자을 향해 길게 누웠다. 응큼한 수작의 출발이었다. "몸이 불편하시옵니까?" 옥수가 그의 발목에서부터 손을 올려놓아 눈치를 살폈다. "먼 길을 오느라 다리가 아프구나. 무릎 위쪽부터 주물러라." 옥수가 그의 음흉한 마음을 꿰뚫고 있어 느럭느럭 손을 이동시켰다. 그러자 그가 옥수의 손을 잡아 대뜸 사타구니 쪽으로 옮겨 놓는 것이었다. 옥수가 짐짓 수줍은 체 손을 빼내려 하자 그가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스스로 욕정을 세우 려고 안달하였다. 마침 술상이 들어왔다. 옥수가 비로소 살았구나 싶어 얼른 몸을 세웠다. 홍경 무도 더는 어찌할 수가 없어 짜증스러운 얼굴로 일어나 앉았다. 옥수가 시켜 기 녀 둘이 더 들어와 앉았다. 그러자 홍경무가 기녀 둘을 나가도록 하였다. 그 속 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소녀 혼자 나으리를 모시기에는 너무 무료하옵니다." "일없다. 옥수만 있으 면 족하니라." "너무하시옵니다, 나으리. 기생이기는 마찬가지이온데, 어찌 저희 들만 물러가라 하시옵니까." 기녀 둘이서 항의하듯 쫑알대며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도 홍경무는 그쯤은 안 중에 없는 듯하였다. "나는 오로지 옥수만 좋아하느니라." "지체 높으신 나으리께서 어찌 일구이언 을 하시옵니까? 연홍 아씨가 계실 때는 오로지 연홍 아씨만 좋다고 하셨사옵니 다." "꿩이 없을 때는 닭고기도 맛이 있느니라." 그리고는 서슴없이 옥수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옥수가 몸을 빼려고 하자 그 가 팔에 힘을 넣어 꼼짝도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기녀들을 내보내지 않으면 놓아 주지 않겠다고 능청을 부렸다. 하는 수 없이 옥수가 그들에게 눈짓을 하여 내보냈다. "어찌하여 너는 그리 눈치가 없느냐?"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사실이 그 렇지 않느냐. 너와 단둘이 있고 싶은 마음을 뻔히 알며서도, 저것들을 불러들이 면 어찌하느냐." "미욱한 소녀가 나으리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사옵니까." "기생으로 몇 년인데, 여태 그런 누치를 잡지 못했단 말이냐. 어찌하였거나, 오늘 은 내 수청을 드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옥수를 보료에다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놀란 옥수가 재빨 리 일어나자 눈을 부릅뜨며 또 쓰러뜨렸다. 그는 성난 소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옥수의 저고리를 풀어헤쳤다. 젖무덤이 하얗게 드러나자 유방을 거칠게 움켜쥐 었다. 옥수가 그를 밀어 내려고 몸부림치는 동안 그는 어느새 옥수의 치마와 속 곳의 허리띠를 풀었다. "나으리.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양반의 체통을 차리셔야 하옵니다." "통정 에는 양반 상놈이 따로 없느니라." 홍경무가 서둘러 바지를 까 내렸다. "나으리. 제발..." 그러나 옥수한테는 불가항력이었다. 땀을 흠뻑 뒤집어쓴 채 기진맥진하여 사 지를 시신처럼 늘어뜨렸다. 그가 눈을 흰자위로 가득 채우고 옥수의 샅을 여유 있게 열었다. 실물을 그려도 좋다는 이응헌의 허락을 받아 낸 승업은 그 이튿날부터 한나절 을 거의 후원에서 보냈다. 화단에 쪼그리고 앉아 화목과 꽃잎을 관찰하고, 연못 에서 잉어가 노니는 모습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감나무 밑에 서서 발갛게 익기 시작하는 열매를 올려보기도 하였다. 장시간을 그저 관찰만 하는 것이었다. 그뿐 만이 아니었다. 나뭇잎이나 꽃잎을 따서 한참 만져 보기도 하고 갈래갈래 찢어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깊이 빠져 혼자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기도 하였다. 이응헌은 멀리 사랑채에 앉아서 승업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승업 이 왜 그러고 있는지 까닭이 있겠다 싶어 헛기침 한 번 내지 않았다. 승업이 실 물을 어떻게 그려 낼 것인지 몹시 궁금하였지만 재촉하지는 않았다. 해질녘이 되어서야 승업을 불러들였다. 완성한 그림이 있느냐고 묻자 아직 없 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실물을 그린다는 걸 빙자하여 종일 놀기만 했단 말이냐?" "아닙네 다." "아니라면, 왜 그림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게냐?" "가만히 들여다보니 까니, 나무나 풀이나 꽃이 제각기 특별한 성질을 품고 있는 것 같았습네다." "... 그래서?" "거저, 생김새만 똑같이 그린다면 남의 그림을 흉내내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네다. 제 생각에는 그것들이 품고 있는 성질을 알아낸 다음에 그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네다." "그렇게 장시간을 들여다보고도, 나무와 꽃의 성질 을 깨닫지 못하였단 말이냐?" "아직은 잘 모르갔습네다." "그렇다면, 얼마나 더 관찰해야 깨달을 수 있단 말이냐?" "...잘 모르갔습네다." "네놈이 꾀를 부 려, 나를 속이려는 것은 아니렸다?" "기럼요. 감히 나으리를 속이갔습네까? 제 뜻을 믿어 주시라요. 그림을 완성하면 곧바로 나으리께 바치갔습네다." "가까이 있는 식물은 그렇다 치고, 멀리 산이나 바위를 그릴 때는 어찌할 셈이더냐? 그 것도 관찰하고 만져 보고 일일이 깨뜨려 본 다음에 그릴 참이더냐?" "...산 속에 들어가 있으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네다." "허허. 산이나 바위를 그리기 위해, 산 속으로 들어가겠단 말이냐?" "나으리께서 허락하시면, 기렇게 하갔습네다." "음... 밥은 굶고?" "주먹밥을 싸 가지고 가면 됩네다." "그래도 굶겠다는 말은 아니 하는구나." "네, 나으리." 이응헌은 승업을 물러가게 한 다음 한참을 생각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범상 한 인물이 아니었다. 글도 깨우치지 못한 까막눈의 아이가 어떻게 자연의 성질 을 운운할 수 있는지 신기하였다. 글을 수십년 읽어도 그러한 진리를 깨닫기란 쉽지 않은 법인데, 승업의 나이에 이미 깨닫고 있음은 하늘이 내려 준 아이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예능이란 학문과는 또 다른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 야 되는 것이다 싶었다. 승업이 정말 하늘이 내려보낸 신동이라면 자신이 더 데 리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수업하게 하는 것이 옳을 듯싶었다. 이튿날, 이응헌은 승업에게 서찰을 건네며 변 주부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승업 은 또 약을 짓는 것인가 싶어 대뜸 바람머리를 앓고 있다는 그의 딸을 떠올렸 다. "아가씨래 아직도 많이 아픕네까?" "이놈아. 어서 서찰이나 전하거라." "네, 나으리." 승업은 약전을 향해 뛰면서도 서찰 내용이 궁금하여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서찰을 펴 봐야 글을 읽을 수 없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였다. 비로소 글을 배 우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선녀 아가씨래 죽으면 안 됩네다. 제발, 빨리 완쾌하시라요. 제발... 15 연홍이 전옥서(구금된 죄수들의 형벌을 집행하던 관청)에 잡혀온 지 벌써 나 흘째였다. 이용후와 함께 김후안의 사제 서품식을 보기 위해 베르뇌 주교가 오 기를 기다리던 중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해 끌려왔다. 연홍이뿐만 아 니라, 이용후와 김후안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교우 십여 명 모두가 붙잡혀 왔다. 누군가에 의해 밀고된 것이 틀림없었다. 배교자 중에 하나이거나 천주교를 사교로 보는 자들일 것이다. 천주교인들은 모두 윤상범(인륜을 어긴 죄수)들이 있는 감방에다 남녀를 분리 하여 수감하였다. 당시 한양의 사법기관으로는 양반 죄인들을 수감하는 의금부 와 평민을 수감하는 포도청, 그리고 이들의 죄를 다시 심의하여 최종 판결하는 형조가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은 신분이 비록 양반 출신이라도 포도청에서 형벌을 집행하였다. 죄수들은 그 죄질을 구분하여 따로따로 수감하는데, 강도나 절도범들은 주야 로 차꼬에 묶여 있어야 하고, 매맞은 장독(곤장 맞은 상처의 독)으로 살이 썩는 데다가 굶주림이 겹쳐 모두가 해골의 형상이었다. 천주교인들도 차꼬만 차지 않 았을 뿐 굶주림이나 가혹한 형벌은 강력범들과 같았다. 하루에 조밥 덩어리 한 끼만 먹일뿐이고 물조차 주지 않았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이들은 깔고 자는 멍석 자락을 뜯어먹거나 감옥 안에 들끓고 있는 이를 잡아먹기도 하였다. 또 갈 증을 참지 못한 이들은 자신들의 오줌을 받아 먹었다. 여옥(여자 죄수들의 감방)에 갖힌 연홍은 공포에 빠져 하루를 여삼추로 보내 고 있었다. 형리들의 고문도 못 견딜 노릇이지만 그보다도 감방 내에서의 갖가 지 린치가 더 무서웠다. 죄수들 중에 제일 먼저 들어온 두목급을 마왕이라 부르 는데 여감방에서는 그녀를 여마왕이라 하였다. 이들 여마왕의 폭력은 몸서리쳐 질 만큼 잔인하였다. 새로 들어온 죄수가 얼굴이 예쁘면 이를 시기하여 손톱으 로 얼굴을 할퀴거나 머리를 마구뜯었다. 뿐만 아니라, 코가 예쁘면 코를 잡아 비 틀고, 턱이 예쁘면 꽉 깨물고, 심지어 유방이 예쁘면 애무하듯이 장난하다가 이 빨 자국을 내었다. 연홍이 예외없이 여마왕한테 참혹한 수모를 당했다. 여마왕은 나이도 많은데 다가 피골이 상접하고, 게다가 손톱까지 길러 영락없는 마귀할멈이었다. 얼굴이 흉하게 얽은 그녀는 병든 시어머니를 학대한 죄로 들어온 윤상범이었다. 앙칼지 고 잔인하기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연홍을 보자마자 마치 피에 굶 주린 늑대처럼 달려들어 다짜고짜 머리채를 잡아 흔들었다. 연홍이 비명을 지르 면 발로 가슴을 냅다 걷어찼다. 연홍이 가슴을 안고 바닥에 뒹굴자 요괴의 웃음 소리를 내뿜으며 무슨 죄로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천주님을 믿은 죄예요." "천주님? 오오라, 그 요망한 귀신을 믿는구만. 네 년들은 그 천주님인가 뭣인가 하는 귀신을 제 아비라고 한다면서? 그러면, 네년 은 원래 아비가 없는 년이냐?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온 년이야?" "아주머니. 천 주님은 귀신이 아녜요. 세상 사람 모두의 어버지랍니다." "이년아. 아주머니라 니... 마왕님이라고 불러. 나라에는 상감이 있지만, 여기서는 내가 왕이야. 알았어, 이년아?" "...네." "방금, 그 귀신이 내 아버지라구 했어? 그렇다면, 그 귀신은 누구랑 씹을 해서 나를 낳았지? 그 귀신이 우리 아버지 몰래 들어와 우리 어머 니랑 간통을 했나?" "그런 뜻이 아녜요. 천주님은 전지전능하시어 이 세상 만물 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내려보내셨어요." "그럼, 우리가 지은 죄도 용서한단 말이지?" "천주님 을 믿으셔야 용서받을 수 있어요." "그것 참 이상하네. 자기를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감옥에 끌려왔는데도 구해 내지 않는 아비가 세상에 어디 있냐?" "곧 구해 주실 거예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있네. 이년이 미쳐도 단단 히 미쳤군." "마왕님도 천주님을 믿으세요.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어요." "시끄 러워, 이년아." 그리고는 연홍의 따귀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연홍이 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 자 머래채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얼굴이 꽤 반반한 년인데... 대체, 뭐 하다 온 년이야? 혹시 기생질하는 년 아 니냐?" 연홍이 대꾸를 않자 또 따귀를 올려붙였다. "이년아. 맞아 틀려?" "...맞아요." "그러면 그렇지. 사내깨나 홀린 쌍판이구 나. 그 동안 몇 놈이나 잡아먹었지? 이놈 저놈 돌아 가며 씹질을 하니까, 맛이 어떻든?" "저는 그런 짓 안 해요." "이년아. 그걸 누가 믿어?" "정말예요." "그래? 그렇다면 내가 검사를 해 봐야지. 옷을 벗어." "그럴 수는 없어요." "그 럴 수가 없다? 이년이 감히 누구한테..." 마왕이 달려들어 연홍의 저고리를 벗기려 들었다. 연홍이 구석으로 도망해 몸 을 동그랗게 오그렸다. 그러자 마왕이 다가와 연홍을 바닥에 쓰러뜨려 깔고 앉 았다. 연홍이 기를 써 벗어나려고 했으나 다른 죄수들이 합세하여 팔과 다리를 꽉 붙드는 바람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연홍의 옷이 하나씩 벗겨져 나갔다. "기생질하는 년이라 몸매가 좋구나." "마왕님. 제발 살려 주세요." "시끄러워, 이년아. 네년이 정말 처녀인지 아닌지, 내 눈으로 봐야 해." 마왕이 연홍의 다리를 부채처럼 쫙 벌려 놓고는 국소에 서슴없이 손가락을 넣 었다. 연홍이 사지를 비틀며 울부짖었다. 국소에서 손을 뺀 마왕이 손가락을 이리저리 살폈다. 혈흔이 보이지 않자 주 먹으로 연홍의 얼굴을 냅다 후려쳤다. "요런, 앙큼한 념. 처녀막이 진작에 터졌는데도, 네년이 숫처녀라구?" "제발, 이러지 마세요." "아마, 수십 놈하고 붙어먹었을 거다." 마왕이 숨을 씩씩대며 이번에는 연홍의 유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입에 처 넣고 장난을 치더니 이빨 자국을 여기저기에 남겼다. 연홍이 결국 정신을 잃어 시신처럼 늘어지자 그제서야 마왕이 떨어져 나갔다. 이용후는 잡혀온 그 이튿날 풀려났다. 신분이 양반이고 좌참찬 김우근의 처남 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훈계만 하고 풀어 주었다. 이용후는 남아 있는 교우들 한테 미안하였으나 구해 낼 방법이 당장 없었다. 특히 연홍이가 누구보다도 걱 정스러웠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온갖 고초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니 차마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천주교를 믿게 한 것도 자신이려니와 사제 서품식에 참 석토록 한 것도 자신임을 생각할 때 그녀에게 미안하고 모든 것이 후회가 되었 다. 초장에 이러한 시련을 준 천주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이용후는 연홍이를 구해 낼 생각으로 그의 이종 형인 한흥주한테 도움을 청하 였다. 돈 백 냥만 빌리자고 하니, 용도를 물었다. 이용후가 사실대로 말하자 그 가 선뜻 응하면서 백 냥을 더 얹어 주었다. "기생 하나만 구해서야 되겠나. 남자들은 몰라도 아녀자들만이라도 빼내는 것 이 도리일세." "제가 마음이 급하다 보니, 미처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여자 신도가 몇 명인가?" "모두 다섯입니다." "이백 냥이면 형리들이 눈감아줄 것이 네." "고맙습니다, 형님." "천주교를 믿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겠네. 그러나 또 잡혀가지는 말게." 이용후는 돈 이백 냥을 가지고 즉시 전옥서로 달려갔다. 옥장(옥졸의 우두머 리)에게 찾아온 까닭을 말하자 어림없는 소리라며, 이용후를 더는 거들떠보지 않 으려고 하였다. "제가 어찌 그냥 내 달라 하겠습니까." "허면?" 이용후의 속을 뻔히 들여다보고 있는 옥장이 그제서야 얼굴의 근육을 풀었다. 이용후가 주위를 살피며 품에서 돈 보따리를 꺼내었다. "이백 냥입니다." "이백 냥... 여자들이 모두 몇이오?" "다섯입니다." "이름 을 적어 내시오." 옥장이 돈 보따리를 재빨리 무릎 밑으로 끌어넣으며 이용후에게 지필묵을 내 주었다. 이용후가 여자 신도들의 이름을 적어 주자 그 즉시 옥졸을 불러들여 명 단을 내주며 당장 풀어 주라고 하였다. 이용후가 먼저 나가 전옥서 앞에서 연홍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한 참 만에 연홍이가 다른 여자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다섯 명 모두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사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빠져나온 몸이라 그 형상은 거지 꼴에 다가 그 사이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귀신의 모습이었다. 특히 연홍의 모습이 제 일 불쌍하였다. 이용후가 다가가자 그녀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쓰러지듯 맥없 이 주저앉았다. 이용후는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어 잠시 허공에다 눈길을 걸어 놓았다. "고생이 많았네. 이 모두가 내 탓일세." "...아니옵니다. 하온데, 어찌하여 풀려 나게 되었사옵니까?" "옥장한테 뇌물을 주어, 여자들만 풀려난 것일세." "나으 리께서 큰일을 하셨사옵니다." "큰일은... 자네한테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네." "이렇게 나오게 돼서 다행이옵니다." "어서 가세. 몸이 많이 상했을 것이니, 보 신부터 해야 되겠네." 이용후는 연홍이를 부축하여 청계옥에 혼자 들여보내고 그는 그 길로 변 주부 약전으로 갔다.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는 변 주부는 이용후가 들어서자 전 처럼 반갑게 맞았다. "그렇지 않아도, 나으리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오?" "며칠 전, 이응헌 나으리께서 서찰을 보내셨습니다." "...서찰이라니요?" "승업 이를 명성 있는 화가한테 사사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하셨지 뭡니까." "그거 참 잘된 일이오. 그래, 누구한테 보낸다고 합디까?" "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아직 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급히 약을 지 어야 되겠소." "누가 어떻게 아픈 건지요?" "스무 살 된 여자이고, 며칠 옥에 갇힌 고초를 심하게 당했소이다. 몸이 많이 쇠약해져, 뼈만 남은 듯 보였소이다." "외상은 없습니까?" "형리들이 주리를 튼 듯싶으니, 외상도 있을 듯하오." "곧 약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변 주부가 약을 짓는 동안 이용후는 내내 연홍이만 생각하였다. 그녀의 몰골 을 떠올리면 측은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형리들로부터 혹독하게 고문 당했을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몸이 오싹해지고 심장이 콩알만하게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약을 받아 청계옥에 당도하자 애고애고 여럿이 우는 소리가 담을 넘어 흘러나 왔다. 기녀들의 울음소리였다. 이용후가 들어서자 더 섧게 울었다. 이용후는 자 신에 대한 원성으로 들렸다. "나를 원망하는 모양이로구나." "나으리. 대체 어찌 된 노릇이옵니까? 우리 형님을 데리고 나가시더니, 무슨 연유로 이 지경으로 만드셨습니까? 나으리는 멀쩡하신데, 어째서 우리 형님만 몸이 상하셨습니까?" 그러자 연홍이 힘에 겨운 목소리로 옥수를 꾸짖었다. 이용후한테는 아무 잘못 도 없음을 애써 변명하였다. 그런데도 옥수는 화를 죽이지 않고 연유를 캐물었 따. 이용후는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연홍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사실 을 알았다가는 경악할 것이 분명하고, 그로 인해 연홍이 또 다른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나으리. 우리 형님이 무슨 연유로 이 지경이 됐는지, 자초지종을 말씀해 주십 시오. 궁금해서 죽겠습니다." "차차 알게 될 것이니, 그리 채근하지 말아라." "저희가 알아서는 아니 될 일이옵니까?" "궁금해도 참거라. 우선은 몸을 치유하 는 것이 급선무이니, 병간호나 잘 하도록 해. 몸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이용후는 더 앉아 있기가 민망해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진해 누워 있는 연홍이를 들여다보는 것도 괴롭고 기생들의 눈총을 받고 있는 것도 거북스 러워 등짝에 진땀이 흘렀다. "내일 또 들를 것이니, 몸조리 잘 하게." "나으리. 저 때문에 심려하지 마십시 오. 그리하시면 제 마음이 더 아프옵니다." "알았으니, 어여 눈이나 붙이게. 그 럼 나는..." 이용후는 기생들의 따가운 눈총을 등으로 받으며 도망치듯 청계옥을 빠져나왔 다. 참으로 후회막급한 일이었다. 승업이 비를 들고 후원을 쓸고 있는데 집사가 소리 없이 와서는 다짜고짜로 엉덩이를 걷어찼다. 승업은 전혀 무방비여서 맥없이 고꾸라졌다. "와 기럽네까? 뭐 잘못한 거이 있습네까?" "네놈이 찬모한테 주먹밥을 만들 어 달라고 하였느냐?" "기렇습네다." "무엇에 쓰려고?" "산에 가서 먹을 겁네 다." "산에 가서 먹다니? 누가 네놈보고 나무 해 오라고 하더냐?" "기런 게 아 닙네다. 나으리께서 산수를 그려 보라고 하셨습네다. 기래서 산에 가는 기야요." "이놈아. 꼭 산에 가야 산을 보느냐? 여기서도 삼각산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이지 않느냐." "산에 가야디 범을 잡는다는 말도 있잖습네까. 산을 가까이서 봐야 산 의 성질을 더 잘 알게 됩네다. 강을 그릴 때도 마찬가집네다." "허면, 강을 그리 기 위해서 강 속으로 뛰어든단 말이냐?" "아닙네다. 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습 네다." "네놈이 건방지게 나를 가르칠 셈이냐?" "저 같은 놈이 감히 누구를 가 르치겠습네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씁입네다." "글도 깨우치지 못한 놈이 조둥이 는 잘도 놀리는구나. 꾸물대지 말고 어여 비질이나 해." 집사는 무엇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승업이를 한 차례 더 쥐어박고는 비 맞은 중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사라졌다. 어제 이응헌이 승업의 실물 그림을 보더니 산수를 그려 오도록 분부하였다. 실물을 그린 것은 두 장이었다. 꽃나무 밑에 암탉 한 마리가 서서이고 그 옆에 꽃잎 서너 개가 흩어진 꽃가지가 누워 있는 그림이고, 또 한 장은 연못에서 노 니는 잉어를 그린 것이었다. 모사한 것보다는 다소 질이 떨어지지만 실물의 첫 그림치고는 웬만하였다. 닭의 형상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고, 흩 어진 꽃잎도 바람에 곧 날릴 것같이 생생하였다. 잉어 그림도 매우 사실적이어 서 지느러미를 처리한 세필은 감탄할 수밖에 없을 만큼 미려했다. 승업이 후원을 다 쓸고 잠시 쉬고 있는데 이응헌의 아들 운경이가 다가왔다. 산책하러 나온 듯싶었다. "도련님. 안녕히 주무셨습네까?" "너도 잘 잤니?" "네 도련님." "아버님이 그러시는데, 너 오늘 산으로 그림 그리러 간다면서?" "기렇습네다." "어느 산 으로 갈 것이냐?" "자하문 너머로 갈 생각입네다." "너 혼자 간단 말이지?" "기럼요." "무섭지 않니? 자하문 밖은 낮에도 호랑이가 다닌다는데." "마음을 굳게 가지면, 호랑이도 무섭지 않습네다." "나도 따라나섰으면 좋겠는데, 호랑이 를 만날까 두렵다." "기럼, 도련님은 가지 마시라요. 미리 겁을 먹으면, 다람쥐 나 토끼도 무서운 법입네다." "설마, 다람쥐가 무서울라구?" "다람쥐나 토끼가 숲에서 바스락대면, 마치 호랑이가 숨어 있는 것처럼 무서워지는 겁네다. 기러니 까니, 처음부터 담력이 있어야 어떤 경우에도 무섭지 않은 겁네다." "너는 어찌 그리 잘 알지?" "어른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습네다." "그렇다면, 호랑이를 봤 니?" "호랑이를 보지는 못했지만, 호랑이가 지르는 소리는 들었습네다." "어디 서 들었니?" "황해도 고향에서 들었시요." "그런데도 무섭지 않았단 말이지?" "여러 사람이래 같이 있었으니까니, 무섭지 않았시요." "만약에, 오늘 산에 갔다 가 호랑이를 만나면 어찌할래?" "호랑이한테 물려 가도 정신만 잃지 않으면, 산 다고 했시요." "바보. 호랑이한테 물려 가는데, 어떻게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 겠니?" "내래 할 수 있시요." "말은 청산유수로구나. 어디 두고 봐야지. 만약, 오늘 안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호랑이한테 물려 간 것으로 생각해야 되겠다." "기렇게 생각하시라요. 기런데, 운옥 아씨께서는 쾌차하셨습네까?" "지난번 약 으로 차도가 있는 것 같다." "다행입네다." "그런데, 네가 왜 누님 걱정을 하 니?" "상전인데, 어드렇게 걱정이 안 됩네까. 도련님이 아파도 걱정합네다." "네 충성심이 갸륵하구나." "머슴이니까니, 당연한 겁네다." 이때, 뜻밖에도 운옥이가 바람처럼 사르르 나타났다. 승업은 그녀를 보는 순간 너무 놀랍고 황송하여 들고 있던 비가 스르르 미끄러져 나갔다. 그만 인사하는 것도 잊은 승업은 입을 벌린 채 어깨를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누님이 웬일로 나왔지?" "신선한 공기를 쐬러 나왔다. 운경이는 거기서 뭐 하니?" "승업이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 "오오라. 이 아이가 그림을 잘 그린 다는 승업이냐?" "그렇다우." "운옥 아씨. 안녕히 주무셨습네까?" 승업이 그제서야 정신을 수습하고 인사를 넣었다. 그러자 운옥이 얼굴에 꽃물 을 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꼭 그린 것처럼 아 름다웠다. 백옥같이 눈부신 피부에 이마가 반듯하고, 새카만 눈동자는 마치 구슬 이 들어앉은 것처럼 초롱초롱 빛이 나고, 오똑한 코는 꼭 조각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짧고 선이 또렷한 인중 아래로 굳게 다문 입술은 마치 붉은 꽃잎을 물고 있는 것 같았다. 승업은 지금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아버님이 보여 주셔서 네 그림을 봤는데, 재주가 훌륭하더구나." "부끄럽습 네다." 승업은 몸둘 바를 몰라 그녀 앞에서 오랫동안 쩔쩔매었다. 그녀에게 칭찬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가 없어 정신이 자주 들락날락하였다. "누구한테 그림을 배운 적도 없다면서, 어찌 그리 잘 그릴 수가 있지?" "거 저, 붓 가는 대로 그릴 뿐입네다." "재주가 신통하구나. 나도 너처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나도 연습을 하면 너처럼 잘 그릴 수 있겠니?" "기 럼요. 아씨도 훌륭하게 그릴 수 있습네다."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겠지. 예능의 재주는 아무나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니까." "기렇지 않습네다. 자꾸 그려 보시라 요." 그러자 운옥이 "말이라도 고맙구나."를 여운처럼 남기고 사랑채가 있는 쪽으로 하늘하늘 사라졌다. 승업은 그 고운 자태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저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는 여태 본 적이 없어. 기럼. 없구말고. 승업이 자하문 밖을 다녀온 그 이튿날, 이응헌이 승업에게 와서 어제 본 산수 들을 당장 그려 보라고 하였다. 승업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화선지 앞에 무릎을 꿇더니 눈을 감고 묵상하는 자세를 한참 동안 가졌다. 마음에 담아 둔 소재들을 정리하여 화면을 구성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그가 붓 들기를 기다리던 이응헌은 승업의 자세를 바라보며 그 진지한 태도에 다시 한번 감탄하였다. 드디어 승업이 붓을 들었다. 일필지휘로 힘있게 나아가는 붓 끝에서 삼각산의 기묘한 바위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잡은 붓은 잠시도 쉬는 법이 없었 다. 한 폭의 그림이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그가 옮겨 놓은 자연은 사실적이기보 다는 그의 주관이 많이 표현된 듯싶었다. 그렇다고 기교를 부린 것도 아니었다. 자연을 보는 자신의 느낌을 아주 솔직하게 표현하였다. "산세가 너무 험악하지 않느냐?" "나으리. 산이 온통 바윗덩어리라서 그 기운 을 그리고 싶었습네다. 산을 보고 있으니까니, 마치 바위가 눈을 부라리고 호령 하는 것 같아서 무서운 마음이 들었습네다." "산수를 화포게 담으니, 기명절지 나 난초나 짐승을 그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더냐?" "산을 그리니까니, 붓에 힘이 들어가 좋습네다." "허면, 앞으로 산수를 더 그릴 참이냐?" "나으리께서 허락 만 하시면 자꾸 그리고 싶습네다. 산이나 바위의 생김생김이 모두 다르고, 또 그 것을 바라보는 곳에 따라서 느낌이 또 다릅네다." "그래서?" "기래서, 산에 자 주 가고 싶습네다." "그보다는... 승업아. 이제는 너를 더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 을 것 같구나." "나으리. 와 기러십네까? 제가 뭐 잘못한 거이 있습네까?" 승업은 더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이응헌의 느닷없는 선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처도 없이 쫓겨나는가 싶어 눈앞이 캄캄했다. "일을 게을리 한다고, 집사 어른이 고자질한 겁네까?" "이놈. 어른의 말을 채 듣기도 전에, 경망스럽구나." "...잘못했습네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그림을 배우도록 주선할 셈이다." "기럼, 머슴으로 가는 겁네까?" "이놈아. 이제는 머 슴이 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하느니라. 너는 오로지 그림을 잘 배워서, 장차 훌 륭한 화가가 되는 포부를 가져야 해." "저같이 천한 것이 어드렇게 훌륭한 화가 가 되갔습네까." "어허. 네가 당장은 어렵게 살고 있지만, 그림을 잘 배워서 노 력하면 장차 그리 되는 것이다. 내 말을 알아듣겠느냐?" "네 나으리. 기럼, 누구 래 제 스승이 되는 겁네까?" "차차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스승 밑에 들어가기 전이라도 게을리 하지 말고 그림을 더욱 열심히 그리거라." "네, 나으리." 승업은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주인한테 미움을 사 쫓겨나는 것으로 잠시 오 해하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자신을 위해 주인의 배려가 그토록 깊으리라고는 미 처 상상하지 못했다. 이 진사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였다. 자 랑이 하고 싶어 갑자기 안달이 솟기도 하였다. 누구보다도 기뻐할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데 조금도 망설일 것이 없었다. 스승이 될 분은 어드런 그림을 그릴까? 그리고, 마음은 좋은 분일까? (중권에 계속)